19화 챗바퀴는 달리는 것만으로 벗어나지 못한다.

* 이 글은 BL 요소를 다소 포함하고 있습니다.
동성애, 집착, 추격전(?)을 불편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읽으시는 것을 삼가주세요.

“ ..허 ”

리유비아는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가방을 떨어트렸다.
이안을 따라 이런 곳이 있어나 싶을 정도로 깊은 동굴을 지나자 황실에서 내어주었다는 마물이 보였다.
곧고 높게 치켜 올려진 등과 거대한 몸짓에서 나오는 기품이 눈을 사로잡았다.
마물이라고 부르기에는 아름다웠고 마물이 아니라고 하기에는 그 눈이 너무나 흉흉하고 괴이했다.

“ 리비, 걱정말아요. 조금도 위험하지 않아요. ”

“ ...네 ”

“ 저한테만 안 떨어진다면요. ”

이안이 곱게 눈을 휘며 손을 내밀었다.
평소라면 괜찮다고 하거나 한 번은 거절했을 테지만 제 앞에 있는 저 마물에게서 떨어진다면 그건 최악의 일이었다.
그의 손에 제 명줄이라도 달린 듯 리유비아는 평소보다도 강하게 이안의 손을 잡았다. 그것이 퍽 만족스러운 듯 이안이 마주 잡으며 리유비아를 끌었다.

“ 발 조심해요. ”

이안의 도움으로 겨우 등에 올라탄 리유비아는 가죽 안장으로도 느껴지는 마물의 고동에 신기함을 감출 수 없었다.
제 팔을 최대한 벌려 감아도 전부 감아낼 수 없을 두꺼운 목도 전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신기함도 잠시 제 등 뒤로 따뜻한 온기가 맞닿아왔다.

“ 제 팔 잘 잡아요. 떨어지면 큰일이니까. ”

마치 자신을 뒤에서 안 듯 팔을 뻗은 이안이 마물의 목줄을 잡아 들었다.
이안이 목줄을 잡자마자 마물이 커다란 소리를 내지르더니 순식간에 날개를 퍼덕거렸다.
막상 날아오르려니 무서워 무심코 눈을 감아버렸다.
무엇이든 안 보이는 게 가장 무섭다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막상 무서워지니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시야를 차단한 시점에서 자신이 의지할 것이라고는 이안의 단단한 팔이었다.
작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강한 바람 소리가 그 웃음소리를 전부 휩쓸어갔다.

몇 분을 감고 있었을까 어쩐지 별 큰 소리도 얼굴을 강타할 것 같았던 강한 바람도 마물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요한 정적만이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눈을 떠볼까 했지만 떠버렸을 때 보일 그 아찔한 광경이 무서워 차마 뜨질 못했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 제 귀 가까이 이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리비, 이제 눈 떠도 돼요. ”

“ ... ”

“ 별로 안 무서워요. ”

이안의 어르는 말에 리유비아는 두려움에도 겨우겨우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그제야 바람이 제 얼굴을 강타하지 않은 이유도,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은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이안과 자신을 빙 둘러 보호하듯 펼쳐진 얇은 막이 둥그렇게 있었다.
리유비아가 놀라움에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자 곧 그런 그를 보며 다정하게 웃고 있는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 그쵸? ”

“ ...아, 네 ”

“ 그나저나..역시 바시타로 가는거죠? ”

“ 음..네 그러려고요. ”

“ 잘 생각했어요. 바시타라면 이 상태로 몇 시간이면 도착할 거에요. ”

이안이 웃으며 마물의 목줄을 잡아당겨 방향을 틀자 넓게 펄쳐 진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바다는 그에게 최악의 장소였다.
정확히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라는 장소가 그에게 지옥이었다.

“ ... ”

“ 이니베리타는 바다가 아름답기로 유명하죠. 리비는 바다를 좋아해요? ”

리유비아는 그 질문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바다는 아름답지만 그 깊이는 사람을 집어삼키는 괴물이라 혐오스러웠다.
햇살에 비춰 보석처럼 반짝거리며 사람을 현혹시키는가 하면 그 누구도 벗어나지 못하게 고립시키는 바다는 좋지만 싫었다.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지는 바다에 리유비아는 고개를 돌렸다.
이안의 시선이 느껴져 리유비아는 무거운 입술을 벌렸다.

“ 좋아...했었죠. ”

“ 지금은 싫어요? ”

“ ... ”

“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요. ”

어느새 제 어깨에 기대어 빼꼼 얼굴을 내민 이안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가까운 얼굴에 코라도 닿을 것 같았지만 이안의 눈동자는 저를 피할 수 없게 만드는 듯했다.

“ 단지, 리비를 알고 싶어서 그랬어요. 불편하게 해서 미안해요. ”

“ ... ”

“ 난.. 계속 좋아해주면 좋겠어요. ”

“ 네? ”

“ 바다는 좋아했었겠지만.. 나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죽어서라도 날 좋아해주면 좋겠어요. ”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남 좋은 일만 해주는 이안을 저런 것에 비하는 일은 정말 잘못되었지만 어쩐지 그가 저 바다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아름답고 반짝여서 저도 모르게 다가가지만 어느새 육지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멀리 온 것 같았다.
제게 남은 것은 고작 이 바다가 전부인 듯이.

“ ...옛날에 ”

“ ... ”

“ 아주 어렸을 때 바다를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어요. ”

제 뇌 속을 기어다니는 벌레가 기어코 그 기억을 찾아낸 듯싶었다.
울렁거려오는 속에도 리유비아는 저절로 입이 열렸다.
설마 너는 아닐 테지? 라는 질문을 돌려 말하는 것처럼.

“ 처음이었죠. 그것이 나와 같이 밖에 나가는 일은 없었으니까. 그 어린 나이에 얼마나 기쁘고 신났었는지 평소라면 용기도 못 냈을 행동을 서슴없이 했어요. 그것의 손을 잡는다거나 먼저 말을 건다거나 소리 내어 웃고 아빠라고 불러보고 ”

“ ..그랬군요. ”

“ 그날은 달이 정말 아름답게 떴어요. 밤에 보는 바다는 정말 예뻤고 물 위로 비추어진 달도 아직 잊지 못했어요. 그러던 중 그것이 낡아 보이는 배 한 척으로 다가가더군요. 그것이 그 위로 올라타니 저도 무슨 생각이었는지 냉큼 올라탔습니다. 멍청하게 ”

리유비아의 내리깐 시선이 바다에 맞닿았다.
저 깊은 바다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경멸로 흔들렸다.

“ 그것이 배를 움직였고 그 배는 점점 육지와는 멀어졌죠. ”

“ ... ”

“ 그때 배에서 내렸어야 했는데.. 설령 헤엄치지 못하고 죽어버릴지언정 그게 차라리 나았을 텐데. ”

리유비아의 꽉 진 손이 강하게 떨렸다.
아름다운 배경과 아름다운 음악이 어우러진 동화에 결코 어울리지 않는 추하고 더러운 내용이 섞여버린 것처럼 그 순간은 정말 그랬다.
하늘도 바다도 그 날의 자신도 더없이 아름답고 행복했지만 그 뒤의 이야기는 그렇지 못했다.

“ ...바다의 한 가운데로 와버려서 더는 육지가 보이지 않을 때쯤.. 굳게 닫힌 문이 원망스럽게도 열렸고.. 그 사이로 더러운 벌레가 쏟아졌어. ”

“ ... ”

“ 벌레의 친구는 벌레라는 걸 몰라서.. 그것을 아빠라고 생각해버려서.. 결국 아무것도..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 더러운 벌레들이 내 몸을 핥고 내 몸을 갈라 비집고 들어와도 아무것도 못 했어. 도망치기엔 이미 너무 멀리와서.. ”

리유비아는 필시 제 세포 하나하나를 기어 다닐 벌레들을 토해내고 싶어서 몸을 떨었다.
제 목구멍으로 손을 집어넣으면 뱉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욱신거려오는 눈에 얼굴을 찌푸리자 가죽 안장 위로 작은 물방울들이 스며들었다.

“ 아무것도 없어서.. ”

“ 리비.. ”

“ 도망칠 수도... 누군가 내 목소리를 들어줄 수도.. 그렇다고 맞서 싸울 수도 없어서.. 그래서 ..그래서.. ”

“ 쉬-.. 괜찮아요. 리비. ”

말하면서 숨이 차오르고 목소리가 떨려오자 이안이 리유비아를 살짝 당겨 제 몸에 기대게 만들었다. 아마 그가 마물을 몰고 있지 않았더라면 아니 리유비아가 소리 내어 목청껏 울었다면 당장이라도 멈춰 몇 번이고 다정한 말을 속삭이며 부드럽고 아쉬운 짧은 입맞춤을 연신 해주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한 짓을 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리유비아는 결코 소리 내서 울지도 아파서 몸을 비틀지도 않았다.
그저 이안의 가슴팍에 그대로 기대 눈을 감았다.

“ ... ”

만일 그가 사랑을 속삭여 달라면 그래 줄 것이고 안아달라고 한다면 안아줄 것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이안 자신도 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가 스스로 모든 것을 제게 내보이고 저를 갈망하고 원하고 기대기까지 이안은 아무것도 해주지 않을 것이다.
일반적인 사이로는 부족하고 평범한 사랑으로도 부족했다.
그것들은 언제든 부수어질 수 있는 것들이니까.
자신이 없다면 절대 살 수 없는.. 자신이 그의 숨이 되는 것.
이미 리유비아는 자신에게 그런 존재이니까.
그러니 리유비아도 그렇게 돼주지 않으면 안 됐다.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그의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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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6-08 20:21 | 조회 : 1,680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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