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챗바퀴는 달리는 것만으로 벗어나지 못 한다.

* 이 글은 BL 요소를 다소 포함하고 있습니다.
동성애, 집착, 추격전(?)을 불편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읽으시는 것을 삼가주세요.

새까만 밤에 밝아오는 여명 속에서 쇳소리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끊기지 않고 계속해서 황실 기사단 훈련장에서 들려왔다.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검이 당장이라도 피를 튀길 듯 살기를 품고 있었다.
몸 전체에 오러를 두른 단발머리의 여자가 땀 한 방울을 흘리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는 것이 정녕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였다.

“ 음? 단장님. 설마 계속해서 여기 계셨던 겁니까? ”

평소 넉살이 좋은 부단장 조나단이 허리를 이리저리 돌려 몸을 풀며 다가왔다.
적나라하게 살기를 뿜어내는 그녀에게 아무렇지 않게 다가가는 모습이 꼭 죽기 위해 안달 난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 또 훈련부족이다 뭐다 인가요? 솔직히 단장님만큼 강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아, 굳이 언급하자면 폐하 정도일까..”

그녀는 폐하라는 단어가 조나단의 입에 오르자 눈썹을 꿈틀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붉은색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저를 보니 조나단의 피도 짜게 식어가는 것 같았다.

“ 아하하... 알았어요. 알았어.. 조용히 할게요. ”

조나단이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더니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그런 그를 조금 더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몸을 돌려 검을 매섭게 쳐 올렸다.
갈증으로 가득 차 보이는 그녀를 바라보다 조나단이 웃음기가 섞인 어조로 입을 열었다.

“ 그러고 보니 황제 폐하께서 .. 최근 ‘위브’를 움직이게 시켰다던데.. ”

“ ... ”

“ 폐하께서 위브까지 움직이게 할 정도라...무척 중요한 일이었나 봅니다. ”

“ ..위브라면 폐하의 그림자 말인가. ”

“ 네, 근데 듣기로는 말입니다.. ”

조나단이 검만 휘두르던 그녀가 반응을 보이자 신난 듯 웃으며 다가왔다.
무언가를 은밀하게 말하는 듯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주변을 살피는 눈이 퍽 조심스러웠다.

“ ..폐하께서 찾으신 것일지도 모른답니다. ”

“ ...찾아? ”

“ 들었거든요. ”

조나단이 제 귀를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며 웃었다.
경박스럽게 보이는 웃음 속 살짝 뜬 눈이 이질적으로 굳어 있었다.

“ ...폐하께서 위브를 ‘정보원’과 ‘감시원’으로 썼다고.. ”

“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지? ”

“ 위브라고요. 위브. 이상하잖아요. 그 위브를 감시자로 쓰는 거야 전례에도 많이 있던 일이니 그렇다고 쳐도 고작 사람 한 명을 조사하는데 쓴 거라고요. 그냥 황실 정보원을 써도 되는데 굳이 위브를 쓴 거라니까요?”

위브, 이니베리타 황제의 그림자라고 불리며 동시에 양날의 검이라고 불리는 황실의 비밀 단체였다. 그 무엇 하나 자세하게 알려진 것이 없고 그 수도 많은지 적은지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저 알려진 것이라곤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만 동시에 황제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이며
그들만의 검은색 문신을 모두 새기고 있다는 것.
조나단은 제 가슴에 손을 얹으며 빙긋 웃었다.

“ 그렇다면 황실 정보원들은 이미 해내지 못 했고.. 위브가 감시해야 할 만큼 위험하거나 아님 소중한 ‘사람’.. 황제 폐하께서 마음에 품고 있다는.. ‘그’ 사람밖에 더 있을까요? 그것 말고는 그 위브에게 그런 사소한 일을 시키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

위브는 황제의 그림자지만 결코 황제도 그들에게 마음대로 명령할 수 없다.
합당한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위브는 황제를 도와주기 때문이었다.
그 대가는 무엇을 원하는 가에 따라 천차만별이었고 대가를 정하는 것은 언제나 위브였기에 황제들도 당연히 그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없었다.
그런 위브를 감시자와 정보원으로 사용했다?
조나단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 단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렇다면.. 폐하가 그 자의 정보를 얻어냈다는 말인가? ”

“ 뭐.. 그럴 수 있다는 거죠. 추측입니다. 추측. ”

과거 황실 정보원들이 황제가 찾는 ‘사람’을 찾아내는 걸 실패하고서 황제는 바로 위브에 이를 알아낼 것을 요구했으나 그러기에는 그들에게도 너무나 정보가 작아 위브들도 해낼 수 없었다고 한다.
듣기로는 이번 대가는 받지 않도록 하겠으나 다시 한 번 명령한다면 적어도 최소한의 정보를 가져오라 요구했고 위브가 움직였다는 것은 황제가 정보를 가져왔음을 의미했다.

“ 뭐,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저도 이만 몸을 풀러 가야겠습니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

조나단이 제 할 말은 끝났다는 듯 빠르게 물러 사라졌다.
조나단이 사라지고 홀로 남은 단장이 곧 제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에 가져다댔다.
기분이 저조할 때마다 맡는 이 냄새가 보존 마법을 걸어둘 만큼이나 그녀에게 소중했다.
눈을 감고 깊게 냄새를 맡던 그녀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그 안에 있던 붉은색 눈동자가 차갑게 일렁였다.

‘ ...어떻게 나보다 빨리 찾은지는 몰라도..결국 끝에는 내꺼야..’

***

“ 이안! 저 좀 도와줄래요? ”

“ 아, 네! ..조심해요..그냥 제가 해도 되는데 .. ”

“ 제가 진짜 전등설치 잘 한다니까요. 좀 기다려 봐요. ”

이안의 손이 리유비아의 허리를 받쳐주자 리유비아는 그 손에 기대 이리저리 조립하며 전등을 갈았다.
어느새 이안의 손이 불쾌하지 않자 리유비아는 보다 이안이 편해지고 이안도 리유비아에게 조금 더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이안에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저도 해주겠다고 했으나 이안답게 그는 그 무엇도 리유비아에게 요구하지 않아 결국 리유비아 스스로 할 일을 찾기에 이르렀다.
리유비아가 일을 찾아 무언가를 행할 때면 늘 이안은 불안한 듯이 이를 지켜봤다.

“ 리비.. 조심..!! 리비 그냥 가만히 있어요!! ”

“ 그럼 이안이 저한테 뭘 요구하든가요.. 불편해서 살 수가 없어요. ”

“ 제발 조심해요..리비가 다치면.. 전 정말 속상해요.. ”

이안이 리유비아의 손을 잡아 제 볼에 가져다 대며 볼을 비볐다.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이안의 보드라운 볼에 리유비아가 헛기침을 하며 손을 거두지도 못 하고 눈을 피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안은 계속해서 손에 얼굴을 살살 비볐다.

“ 쪽 ”

그때 리유비아의 손바닥에서 묘한 자극이 느껴졌고 리유비아는 화들짝 놀라 손을 거두었다. 아직도 이안의 입술 감촉이 남은 듯한 손바닥을 리유비아는 다급히 매만졌다.
정작 원인 제공자인 이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자 리유비아는 더욱 당황스러웠다.

“ 어..어? ..”

“ 네?.. ”

“ 바, 방금.. ”

“ 아..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이안이 볼을 긁적이며 땅을 내려다보았다.
저보다도 더 부끄러워하는 이안을 보며 리유비아는 눈을 깜빡였고 손을 타고 제 심장 부근까지 간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 싫..었죠. 죄송해요. 리비. 리비가 좋아서 그만.. ”

“ 예??.. 아, 아니 싫지 않았어요.. 어, 그니까.. ”

“ ...미안해요.. 많이 불쾌했죠.. 정말.. ”

“ 아니!! 싫지 않았..! ”

리유비아가 다급히 부정하자 이안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코가 맞닿았다.
제 귀를 붉게 물들이며 어버버거리자 이안은 리유비아의 귀를 매만지며 나긋하게 물어왔다.

“ 그럼요?.. 싫지 않으면.. 어땠어요? ”

“ 예?..그,... ”

“ 응?.. ”

“ 조..조..좋..”

쿵쿵.

횡설수설 이야기를 늘어놓던 때 누군가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리유비아가 화색을 띄우며 이안에게서 다급히 벗어났다.
뒤에서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리유비아는 문 두드리는 소리와 제 심장 소리에 묻혀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 누구세요? ”

리유비아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조심히 물었다.
누군가 이안의 집을 찾은 것은 처음이었고 제게는 친구도 없으니 놀러온 것이라면 이안의 친구라 생각했다.

“ 황실 기사단입니다. 잠시 여쭐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문을 열어주시겠습니까. ”

그러나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리유비아가 생각했던 많은 경우의 수 중 그 무엇도 아니었다.
순식간에 간담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낀 리유비아는 몸이 굳어 멍하니 문 건너편을 떠올렸다.

“ 리비? 누구에요? ”

“ 아... 황실 기사단이라고...”

굳어 있는 리유비아를 이상하게 여긴 이안이 조심히 다가와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들의 말이 맞았는지 황실의 문양을 새긴 갑옷을 입은 3명의 기사가 문 앞에 서 있었다.

“ 황실 기사단 분들이 여긴 어쩐 일로? ”

사색이 된 리유비아를 본 이안이 그를 뒤로 물리며 기사들에게 웃으며 물었다.
기사들은 이안을 보며 가만히 서 있다가 곧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 ...황제 폐하께서 이안님을 부르십니다. 급한 일이라고.. ”

“ ... ”

리유비아는 이안의 등에 서 이안의 얼굴을 보지는 못 했으나 이안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사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며 이안의 말을 기다리는 듯 가만히 서 있었다.

“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지요. 황제 폐하의 명이시니... 그만큼 중요한 일이테니까. ”

그리 말하는 이안의 목소리가 더 없이 차갑게 느껴지자 리유비아가 이안을 바라보았고 몸을 돌린 이안은 늘 알던 모습 그대로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 황제 폐하께서 절 부르셔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리비 오늘은 먼저 식사하고 있어요. ”

“ 아, 네. 다녀오세요. 이안.. ”

“ 미안해요.. 금방 올게요. ”

이안이 리유비아를 한 번 안아주고는 곧 기사들을 따라 집을 나섰다.
리유비아는 홀로 남은 집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순간 다리가 풀려 풀썩 주저앉았다.
이안의 편안함에 저도 모르게 이곳이 여주와 남주의 나라임을 잊고 있었다.
어차피 일주일 뒤면 항구가 다시 열릴 것이고 자신은 이안을 버리고 타국으로 갈 것이다.
너무 과한 정을 준 거 같아 리유비아는 씁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굉장히 따듯하고 좋은 집이라고 느껴졌던 집이 이안이 빠지니 순식간에 허전해지는 기분이었다.

“ 하아.. ”

리유비아가 축 처지는 기분에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감촉이 리유비아의 기분을 더 가라앉혔다.

“ 후.. 장이나 보고 와야지.. ”

식료품을 사러 문을 나선 리유비아는 집을 나섰음에도 무거운 마음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눌러 앉았다. 평소라면 기분 좋게 샀을 음식들도 지금은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어느 정도 짐바구니에 음식들을 채운 리유비아는 마지막으로 과일이나 좀 사러 몸을 돌렸다.
신선한 사과까지 손에 넣고 이만 돌아가려던 때,
리유비아는 과일이고 뭐고 집으로 갔어야만 했다고 생각했다.
제 귀에 들려오는 결코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저를 불렀으니 말이다.

“ ...리유비아? ”

시간이 지나서도 여전히 아름답고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을 것 같은 목소리.

“ 리유비아 맞지?.. 응? ”

제 몸을 돌리는 단단하면서도 얇은 팔.
아리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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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3-31 18:21 | 조회 : 1,686 목록
작가의 말

아리아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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