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만남도 이런 만남이 없다.

* 이 글은 BL 요소를 다소 포함하고 있습니다.
동성애, 집착, 추격전(?)을 불편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읽으시는 것을 삼가주세요.

리유비아는 정말 과장 조금도 안 보태고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남주랑 여주가 판을 치는 이곳에서, 이 거지 같은 곳에서 벗어나려고 원하던 축제도 못 보고 이상한 남자에게 흑역사를 남기고 최종적 목적마저 이루지 못한 이 현실에 울 것 같았다.

“ ..아무런 공지도 없이 이러는 게 어디 있어.. 남주면 다야? ”

리유비아가 마른세수를 하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집도 팔았고 직장도 막무가내로 나왔다.
직장이야 휴베에게 무릎이라도 꿇으면서 부탁하면 다시 할 수야 있겠지만 집은 당장 사기에는 어렵고 여관에 머물게 생겼다.
생각하지 못 하는 지출로 인하여 여길 떠나고 나서 어려워질 판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동자로 항구만 애타게 바라보았다.

***

결국 애탄 눈빛에도 굳건한 경비병들에게 내쫒기며 힘없는 발걸음으로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다리에 통증이 느껴질 때 쯤 저를 부르는 달콤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 리비? ”

“ ..이..이안? ”

갈색 눈에 갈색 머리카락.
어젯밤 애교를 부리고 –추측이지만- 일어나자마자 밥을 얻어먹고 뭣도 없이 바로 튀어버린 최악의 모습을 본 당사자, 이안이었다.
리유비아가 뻣뻣하게 굳어 이안을 바라보자 이안은 반갑다는 듯이 눈매를 접어 웃었다.

“ 아침에 많이 급하게 나가시더니... 일이 끝났나 봐요? ”

“ 아... 예...뭐... ”

리유비아가 입술을 달싹이며 시선을 피하자 이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기울였다.

“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표정이 안 좋아 보이네요. ”

“ 별건...아닙니다. 오늘 아침엔..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감사드립니다. ”

“ 하하.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되게 어수선 하더라고요. ”

이안이 자신의 턱을 집은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며 눈을 느릿하게 껌뻑이곤 리유비아를 응시했다.

“ 아침...에요? ”

“ 네, 보아하니 항구가 막혔다고.. 한 동안 특정 사람을 제외하고는 여행.. 입국도 출국도 잘 안 된다고... ”

“ ..네.. 그거 때문에 망했지만요. ”

“ 이런, 어딜 가시려고 했나 봐요. ”

“ 하하.. ”

리유비아가 머리를 긁적이며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썩 편한 사람이 아닌지라 지금의 상황이 무척이나 어색하고 답답했다.

“ 저..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여관을 알아봐야 해서 바쁘거든요. 나중에 다시.. ”

“ 여관?? ”

이안이 기다렸다는 듯이 잡아 물고는 리유비아에게 눈으로 이유를 물었다.

“ .. 오늘 출국을 하려고 해서 집을 팔았거든요. 근데 보다시피.. ”

“ 저런... ”

“ 그러니 이만.. ”

알아들은 것 같은 이안의 모습에 안심하며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헤어지려는데 이안이 리유비아의 말을 끊고 살풋 미소를 지었다.

“ 그럼 제 집에서 지내세요. 보아하니 한 동안 항구는 열리지 않을 텐데.. 그동안 여관에서 지내기에는 식비며 숙박비며 돈이 꽤 들 겁니다. ”

이안의 말에 리유비아가 기겁하며 거절하려는데 리유비아의 말은 곱게 밟듯 이안이 말을 이었다.

“ 출국하면 타국에서 또 정착하셔야 할 텐데.. 그 돈도 부족할지 모를 판국에 아껴야 하시는 거 아닌가요? ”

정곡이 찔린 리유비아는 말문이 막혀 어버버거렸다.
그때 이안이 자신의 손목에 걸린 장바구니를 들어 올려 보여주며 흔들었다.

“ 마침 장도 봤고.. 식사도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하는데.. ”

“ ... ”

“ 정 뭣하면.. 지내보시고 영 아니시면 그때 가도 늦지 않아요. ”

“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

솔직히 돈이 걱정이었던 찰나 저 제안이 아주 나쁜 제안이 아님은 인정한다.
아니 어쩌면 리유비아 제 자신에게 최고의 제안일지도 모른다.
결국 리유비아는 한풀 꺾여 이안의 뒤를 따랐다.

***

....인정한다.
리유비아의 앞에 있는 음식은 전생을 통틀어 최고일 만큼이나 맛있고 집도 아늑했다.
무엇보다 이 주변에서는 보기 드물 만큼이나 집이 좋았다.
귀족이 살기에는 부족하지만 평민이 살기에는 더없이 훌륭하고 멋진 과분한 집이었다.

‘ 거 음식 하나는 더럽게 잘하네.. ’

리유비아가 자신이 비운 많은 접시들을 째려보며 아직도 입 안에서 감도는 풍미를 아쉬운 듯 다셨다.
그의 앞에 빈 접시가 치워지고 색만큼이나 아름다운 향을 풍기는 차와 과일이 식탁을 차지했다.

“ 감사합니다.. 너무 신세를 지네요. 정말 맛있었습니다. ”

“ 맛있었다니 다행이네요. ”

이안이 부드러이 웃으며 차를 마시자 그의 목울대가 짧게 움직이는데 그것이 퍽 야스러웠다.

‘ 잠시만 야스러워? 정혜수 네가 드디어 단단히 돌았구나.. 야스럽기는 뭐가.. ’

괜히 찔린 리유비아는 제 앞에 놓인 차를 급히 마시다 목구멍까지 데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안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잇따르자 리유비아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떼어냈다.

“ 그나저나 참 안 됐네요... ”

“ ? ”

“ 항구 일 말이에요... 황제폐하도 참.. 미리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막아버리다니.. 곤란한 사람이 이만저만 아니겠어요. ”

“ 아...하하.. 그, 렇죠. ”

리유비아가 꽤 품질이 좋아 보이는 차를 들이키며 말끝을 흐렸다.
향긋한 차를 천천히 마시는데 이안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턱을 괴곤 리유비아를 직시했다.
그 따가운 시선에 찻잔을 입에서 떼지도 못 하고 뜨거운 차만 계속 들이켰다.
슬슬 한계가 올 때쯤 이안이 천천히 입술을 벌리며 말을 꺼냈다.

“ 그러고 보니.. 리비는 황제폐하를 어떻게 생각해요? ”

“ 예? ... 황제..폐하요..? ”

이안이 곱게 눈을 접으며 긍정을 표하자 리유비아는 갑작스런 황제폐하 호불호 질문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안은 대답을 재촉하듯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 어..뭐.. 페르..아니 이니베리타를 일으킨 성군이라던데요. ”

“ 일으킨 게 아니죠. 넘어트린 겁니다. ”

“ ..아 ”

“ 리비도 알고 있죠? 황제 폐하가 황실가 사람들에게 적대 받은 사람이었다는 거. ”

이안의 말에 리유비아가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이니베리타의 황제, 4황자는 광장에서 채찍질을 당하고 외면당하며 폭언, 그리고 추방까지 당한 비운의 과거를 가진 사람이었다.

‘ 다시 생각해보니 이 때문에 남주가 여주를 불쌍하게 여겨 관심을 가지고 보호해주기 시작했던 거였지. ’

“ 그리고 그를 적대한 모든 사람들이 그의 손에 죽었죠. ”

“ ... ”

“ 재물과 여자를 좋아한 아버지에게선 그의 자리와 성기를 앗아가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늘 중심에 서 있기를 바란 어머니에게선 아름다운 외모를 난도질해 불로 지지고 아무도 모를 숲 깊이 묻어버렸죠. 제 형과 동생들도 그들이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을 모두 빼앗아 갔다고 합니다. ”

이안의 말에 리유비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눈을 깜빡였다.
이안은 차분하고 느릿하게 4황자가 한 행동들을 하나하나 읊었다.
마지막까지 모두 말한 이안이 흔들리는 리유비아의 눈동자를 마주보며 미소 지었다.

“ 너무 잔혹하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핏줄을 죽인 그가? ”

“ ... ”

“ 그런 이는 두렵나요? ”

“ ......잖아요... ”

“ 뭐라고요. 리비? ”

“ 그들이 잘못 한 거잖아요. ”

리유비아의 말에 이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애써 보호를 하려는 것인지를 보려 눈을 굴리자 차갑게 가라앉은 눈이 이안을 직시했다.

“... 애초에 그리 빼앗길 각오가 없었다면 남의 것도 빼앗지 말았어야지. 모두가 착하고 도덕적이라 빼앗지 않는 게 아니에요. 빼앗기는 게 두려운 사람이 빼앗지 않을 뿐이지. ”

“ ...흠? ”

“ 감정, 몸, 사람과 집... 그걸 빼앗겼고 그것에 응징했을 뿐인데 무엇이 문제죠? .. 그대로 있었다면 그대로 빼앗기기만 했을 뿐입니다. 더 빼앗기고 싶지 않다면 내가 빼앗을 수밖에 없죠.”

리유비아의 단단하면서 차가운 눈에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이안이 자신의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생각에 잠기자 정적이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이안이 눈을 들어 올리며 리유비아를 바라보았다.

“ 그래... 남들이 못한다고 한 일을 해내는 건... ”

이안의 느릿한 말에 리유비아의 눈이 점점 커졌다.

“ 매우 행복한 일이니 말이야.. ”

입가를 가린 손가락 사이로 이안의 입매는 매끄럽게 휘어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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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3-16 13:16 | 조회 : 1,422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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