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만남도 이런 만남이 없다.

* 이 글은 BL 요소를 다소 포함하고 있습니다.
동성애, 집착, 추격전(?)을 불편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은 읽으시는 것을 삼가주세요.

리유비아가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산에서 내려와 있었다.
순간 리유비아는 주변을 둘러보며 혹시라도 아리아가 있는지 살폈으나 다행히도 황실기사단과
황제는 이미 돌아간 것 같았다.
안심하며 숨을 내쉬는데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가 그제야 눈에 다시 보였다.
남자는 갈색의 눈동자와 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평범한 남자였다.
그 남자는 아까 숲에서의 차가움은 어디가고 웃고 있었다.

“ 위에서는 갈색인 줄 알았는데 눈동자도 적색이시군요. ”

“ 네.. ”

리유비아가 피가 나는 자신의 손목을 그러쥐며 눈치를 살폈다.
동시에 몸을 조심히 뒤로 빼며 이곳에서, 정확히는 저 남자에게서 벗어나려는데 남자가 리유비아를 불러 세웠다

“ 이리 만난 것도 우연인데.. 술이라도 함께 하지 않겠어요? ”

“ 죄송하지만 제가 조금 바빠서... ”

“ 아, 이런... 아주 조금도 안 될까요? 어머니를 여의고 늘 혼자였는지라 조금 적적해서 그렇습니다. 안 그래도 오늘은 어머니의 기일이니... 부탁드릴게요. ”

끈질기게 붙어오는 남자를 보며 리유비아는 이를 악 물었다.
그렇게 무섭게 몰아 붙였다가 갑자기 살갑게 구는 것도, 반말을 내뱉다가 존대로 갑자기 말을 하는 것도 모든 게 의심스러운 남자였다.

“ 아주 조금만이면 됩니다. 네? ”

또다시 거리를 좁혀 손을 잡아오는 남자를 보며 리유비아는 손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유비아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손을 놔주고는 좋은 술집을 안다며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리유비아는 자신의 손목을 재차 북북 긁어대며 뒤를 탐탐치 않게 따랐다.

***

오가는 수다소리에 소란스러우면서도 술집 분위기는 근사했다.
오렌지 빛 조명과 나무로 된 인테리어들이 그윽하면서도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단 하나 남은 빈자리에 앉자 남자가 리유비아를 지그시 보았고, 리유비아는 남자의 시선을 피하며 안 쪽 잇몸을 괜한 초조함에 깨물었다.

“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요? 제가 살게요. ”

“...아무거나 괜찮아요. ”

리유비아의 말에 남자는 술과 간단한 안주거리를 시켰다.
예상외로 음식은 무척이나 빨리 나왔고 리유비아는 답답한 마음에 술을 목구멍 가득히 들이켰다.

“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모르네요. 이름이 뭐죠? ”

“ ... 리비. ”

“ 그래요. 난.. 이안. 이안이에요. ”

남자, 이안은 리유비아를 지그시 바라보며 입 꼬리를 휘었다.
그 시선이 불편해 리유비아는 술을 다급히 들이마셨다.
조금이라도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리유비아는 집에 가면 바로 짐을 싸고 잠시 눈을 부친 뒤에 일을 그만둔다는 메시지를 가게 문 앞에 적어놓고 새벽에 나갈 생각을 하며 입 안에서 느껴지는 알콜을 안주로 닦아냈다.

“ 취한 것 같은데... 괜찮나요? ”

“...응-?..아..어..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술병이 2병하고도 반병을 비워가자 리유비아의 눈꺼풀이 살이라도 찐 듯 무겁게 내려앉으려 했다.
느릿하게 눈을 꿈뻑인 리유비아가 눈동자를 굴려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술에 취하지 않았는지 말짱한 눈으로 리유비아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마치 리유비아가 술에 취하기를 기다린 것 마냥 이안은 느릿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리유비아에게 말을 꺼냈다.

“ 아까 보니... 손잡기를 무서워하는 것 같던데-.. ”

“ ... ”

“ 이런 실례였나요? ”

두 사람이 있는 그 한 테이블의 분위기만 차갑게 가라앉았다.

“ ... 손..불쾌해, ”

리유비아의 나긋하지만 잠긴 목소리에 이안은 살살 눈웃음치며 물었다.

“ 불쾌하다고요? ”

“ 그래.. ”

“ 어째서요? ”

“ .... ”

“ 응? 말해 봐요. 리비”

이안의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가 리유비아의 귀를 가볍게 간질이자 리유비아는 머뭇거리다 이내 입을 떼었다.

“ 더러운 게 닿는 게 떠오르니까. ”

“ 더러운 거... 그럼 아무와도 손을 못 잡나 보죠? ”

“ ..그건 아냐.. 너처럼...후.. 딱 너처럼 나보다.. 키가 크고 남자라면...그러면 그래. ”

“ 저런.. ”

이안이 리유비아의 말에 안타까움을 표하며 리유비아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 손목은요? ”

“ ... 간지러우니까. ”

리유비아의 말에 이안이 의문을 담은 말을 내뱉으려 하자 리유비아가 말을 덧붙였다.

“ 새 살이 돋으면 간지러우니까. ”

“ ... ”

이안이 여전히 미소 지으며 리유비아를 천천히 훑었다.
안타깝게도 리유비아는 술에 절어 그런 것이 제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 내뱉는 말이 리유비아로서인지 정혜수로서인지 분간이 가지를 않았다.

“ 하하 리비. 술 마시기 전에는 몰랐는데.. 용케도 그런 분위기를 죽였군요? ”

“ ... ”

“ 당신을 불쾌하게 만들었던 그 더러운 건... 벌 받아야 할 텐데.. ”

이안이 웃으며 말하자 리유비아가 비릿하게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눈을 휘었다.

“ 받았어. ”

“ 받았다? ”

이안의 말에 리유비아가 정말 기쁜 듯이 볼을 얕게 붉히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는 정반대라 참으로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 아주 밑바닥으로... 그렇게 높은 곳을 좋아했지만.. 결국 밑바닥으로.. 발버둥 치면서.. 마치 벌레처럼.”

“ ... ”

“ 아주..아주 기뻤지.. 아.. 드디어.. 내 몸을 기는 벌레가 사라졌구나..하고.. ”

리유비아가 해사하게 웃음을 짓다가 표정을 굳히며 곧 공허하게 보이는 눈동자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메마른 그의 입술 사이로 메마른 말이 기어 나왔다.

“ 근데.. 몸에 기는 벌레는 사라져도.. 그 벌레가 깐 알은 몸 안에서 기었어. 더럽게.. 내 뇌를 따라서 알을 까고-.. 죽여도... 다시 태어나서 기어코 기어 다녀... ”

“ 바퀴벌레 같군요. ”

“ 하하.. 정확해.. ”

“ 머릿속에 바퀴벌레가 득실거리는 거 치고는 아주 멀쩡해 보여요. ”

“ 벌레를 죽이고서... 희로애락 속에서.. 죽기 위해 책도 읽고..일도 하고.. 사랑도 했지.. 그러고 나니까.... 그냥 평범하게..남들처럼.. 그렇게 살았지..죽기 싫고 이기적이고 행복하고 싶은.. ”

리유비아가 술잔을 기울이며 달게 느껴지는 술을 또다시 가득히 마시고 차가운 식탁에 볼을 데었다.

“ 아무도 못할 거라고.. 할 수 없는 짓이라고.. 다 그렇게 생각했어.. ”

“ ... ”

“ 근데..근데 내가 했다?.. 그러니까..진짜 ”

리유비아가 술에 취해 몽롱한 눈으로 이안을 보고는 미소 짓는 입 사이로 천천히 느릿하게 뱉었다.

“ ..시발 ..좆나 황홀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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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3-16 13:13 | 조회 : 1,558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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