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노는 것도 힘들다. (2)

2장 노는 것도 힘들다. (2)

다행히 체하지 않고 식사를 맛있게 해치웠다.

언제나 요리를 만들기 전에는 겸양의 말부터 먼저 꺼내지만, 맛은 그 겸양의 토양 속에 피어난 꽃 같았다.

“정말 맛있네요! 전문적으로 요리를 배우신 적 있나요?”

“아뇨. 비전문이에요. 자격증도 없어요. 하지만 요리를 해서 먹는 걸 좋아해서 다행히 실력이 늘었어요.”

“대단하네요. 변함없이 좋아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오늘도 어김없이 설거지는 내 몫이었다. 그릇을 많이 쓰지 않아서 설거지도 간단히 끝났다. 한데 오늘은 평소와는 달리 연이 끝까지 남아 있었다.

인생설계사라고 자칭하는 사람답게 기다리는 시간도 함부로 흘려보내지 않았다. 개인적인 노트를 꺼내 이리저리 훑어보거나 뭔가를 적었다.

그녀의 행동은 언제나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일상적인 모습조차도 그녀라면 특별한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생각을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여자 앞에서는 특히 본심을 숨기게 되었다. 마음을 열었다가 된통 당했으니 나라고 별 수 있나.

내가 설거지를 끝내자, 그녀는 노트를 손가방에 집어넣고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저한테 말하고 싶으신 게 있지요? 이번이 이번 달의 마지막 기회에요.”

마지막이란 단어가 대답을 부추겼다. 그걸 알아챘음에도 나는 조심스레 속내를 털어놓았다.

“슬슬 노는 게 지겨워졌어요.”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게 끝이었다. 내가 그 다음은 없느냐고 묻기도 전에 그녀는 평소와 같이 정중히 인사하며 물러났다.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허탈한 한숨을 내뱉었다.

인생설계에 대한 주옥같은 충고를 들을 줄 알았건만, 그녀는 자신의 말을 끝까지 지켰다. 진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으음....... 오늘은 일찍 잘까?”

자기주도적인 인생설계를 위하여.

*

구수한 냄새가 내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김없이 맛있는 냄새였지만, 내가 염두에 둔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저녁에도 먼저 들어와 있었지?

“당신!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저희들이 함께 술을 마셨을 때 술술 부르시던데요? 잘 부탁하신다면서....... 상당히 귀여우셨어요, 후후.”

절로 한숨이 나왔다. 과거의 나를 기막혀 하면서 이마를 탁 쳤다.

“이 놈의 술이 웬수지.......”

“술은 나쁘지 않아요. 마신 사람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만 하면 되지요.”

“주당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젊으니까 술 마시고 사고 칠 기회도 많이 없었어요. 앞으로의 일은 모르지만요.”

생글생글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단호했다. 앞으로의 일을 모른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술로 인생을 말아먹지 말라는 충고인 걸까? 어쩌면 둘 다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아침은 뭔가요?”

“간단하게 토스트와 양송이 수프에요. 오늘은 저도 함께 식사해도 될까요? 아침에 약속이 있어서요.”

“물론이죠. 여태까지 혼자서만 식사하느라 눈치 많이 보였다고요.”

간단한 메뉴인데도 맛은 일품이었다. 딱 알맞게 구운 토스트는 바삭했고, 인스턴트식품을 쓰지 않고 만들어낸 양송이 수프는 담백하고도 버섯의 맛을 제대로 살려냈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살짝 급한 모양인지 토스트에다 수프를 발라 먹는 것도 모자라, 빠르게 수프를 떠먹었다.

“누구를 만나기에 그렇게 서두르십니까?”

“이사장님이요. 프로젝트에 대한 보고를 드려야 하거든요.”

“저에 대한?”

“아니오. 제 개인적인 프로젝트에요. 저는 유수 고등학교 교수 자리를 노리고 있거든요. 제가 만들어낸 새로운 학문을 도입시키는 게 목표죠.”

정말이지 야심만만한 목표였다. 인터넷과 데이터베이스 덕분에 여태까지 발전해온 인간의 지혜가 총집합되었을 현대에 새로운 학문을 탄생시키겠다니.

“인생설계에 관련된 학문이겠군요.”

“네! 아직도 학문 이름을 무엇으로 정할지 고민 중이에요.”

시작이 반이라고, 자신만의 학문을 명명(命名)하는 것은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선택일 것이다.

“바쁜 와중에 미안합니다만, 정식으로 부탁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맡은 제 인생을 설계해 주세요.”

이번에는 내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제갈량을 얻기 위해 삼고초려를 했다는 유비만큼은 아니더라도, 인생을 건 결정이라 나름 심각했다.

꿈이나 목표는 없고, 그저 무난하게 먹고 살 만큼의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일념은 예전부터 변하지 않았다. 살다가 그냥 가는 거지, 뭐.

그녀는 고개를 숙인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내 정곡을 쿡 찔렀다.

“인생을 어떻게 설계하실 생각이신가요?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으시죠?”

진짜 이 여자 독심술이라도 배운 게 아닐까? 내 속내를 마치 투명하고 맑은 시냇물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한다.

그건 그렇고 대답이 궁했다. 살면서 꿈이나 목표를 세워본 적은 손에 꼽았다.

용돈을 더 받으려고 전교 석차를 몇 십 등 올리려는 노력은 해봤지만, 남들이 다 준비한다는 흔한 자격증이나 어학시험도 등한시했으니까.

“없어요. 꿈이....... 목표가....... 그렇게 한심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은 생각을 정리해 주세요.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없어요. 당신께서 진짜 원하는 게 분명히 있을 거예요. 그게 없다면 좋아하는 것이라도 있지요.”

그걸 찾는 게 제일 첫 번째로 꿰어야 할 단추랍니다. 연이 싱긋 눈웃음을 지으며 원룸을 나섰다. 서서히 닫히는 문을 허망하게 바라보던 나는 곧 진지하게 눈을 깎아 떴다.

“이게 그녀가 내게 해준 첫 번째 상담이야. 소홀히 봐서는 안 돼.”

나는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었다. 두 눈을 감고 고행하는 수행자처럼 명상에 빠져들었다. 가끔씩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있거나, 쓸데없이 감정이 격해질 때면 어김없이 명상을 했다.

이번에는 내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원하는 게 무엇인지 확실히 하기 위해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거의 모든 능력 수치가 평균인 나. 남자치고는 꿈이나 야망이 없어서 성적에 따라 고른 학과와 대학에 다니다가 잘만 알콩달콩 하던 여자를 보내고 군대에 다녀왔지. 한데 여자를 잘못 만나 나만 쓰레기가 되고 지금에 이르렀어.......’

사회적으로는 이미 죽었고, 정신적으로도 죽어가고 있었다. 외동인데도 부모님의 기대는 이미 사라지고 없고, 일가친척들도 마찬가지.......

그 와중에 내게 기대를 갖고 인생을 맡겨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한 여자가 나타났다. 솔직히 무척 기뻤다. 이런 내게도 할 수 있다며 직접 해준 요리를 먹이는 것으로 위로해주었다.

여자에게 받은 상처를 여자로 치유할 수 있는 것일까? 그건 의문이 들었으나, 그녀가 조심스레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니 분노와 허탈함을 많이 털어버릴 수 있었던 건 사실이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인생설계는 자기주도적인 의지로 해내야 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지요?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요?

그녀의 질문이 머릿속에 은은하게 울렸다. 그녀가 제안하면서 결코 후회하지 않게 해주겠다고 선언했다.

화려한 삶이라던가, 부귀영화라던가, 야망이라던가. 확실한 물질적인 보상을 약속하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더욱 신뢰가 갔다.

“돈은 많을수록 좋다지만 너무 많은 것도 좋지 않지.”

부모님의 기대는 못 받았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아들내미라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셨다. 두 분 덕분에 나는 살면서 돈으로 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철부지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은 없지만, 금전은 내 인생에서 1순위는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뭘까?

부귀영화는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지식에는....... 욕심이 있다.

“그렇다고 지식이 전부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 후우.......”

스스로에게도 솔직하지 못한 것일까? 두 눈을 꾹 감고, 빛이 차단된 허공에 집중해보았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것이, 그 이미지가 확실하게 다가왔다.

“당당해지고 싶어. 거들먹거리는 게 아니라 어깨를 편 채로 걷고 싶어. 그리고 능력이 된다면 힘든 사람들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어.”

원하는 것은 확실하게 파악했다. 다만 그 원하는 것을 손에 쥘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에게 조언을 듣고, 노력하면 얻는 게 있을 거야.”

한 번 정해두니 심란했던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초등학생 시절, 선생님들의 강요로 방학 전날 학교에서 만들었던 동그란 계획표가 떠올랐다.

“우선 계획표라도 적어볼까?”

줄 없는 노트를 한 장 뜯고, 연필을 쥐니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옛날 수학 시간에 쓰고는 처박아둔 컴퍼스를 찾아 원을 그리고, 나름대로 현실적이라 생각한 계획표를 완성했다.

“생각보다 금방 완성되는구나.”

00:00~08:00 취침. 08:00~09:00 아침식사 후 씻기. 09:00~10:00 독서. 10:00~12:00 운동. 12:00~12:30 샤워. 12:30~14:00 점심식사. 14:00~17:00 자기계발. 17:00~18:30 저녁식사. 18:30~21:00 휴식 및 오락. 21:00~00:00 자격증 공부.

수험생이나 고시생처럼 공부에 매진하는 시간표는 아니지만, 스펙을 한 줄이라도 더 만들기 위한 시간표였다. 그녀의 말대로 주도적으로 시간을 쓰는 훈련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계획을 세웠으면 내일부터!”

나는 마음을 편하게 먹고 새롭게 빌린 책을 펼쳤다. 그 자리에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판타지 소설이었다. 장편 중에서도 제법 분량이 길어 전부 독파하려면 두어 번 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야 했다.

“룰루루~!”

가벼워진 마음, 내친김에 휘파람과 콧바람을 불었다. 나는 간만에 깨어있는 순간을 편하게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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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10 11:55 | 조회 : 298 목록
작가의 말
싱어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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