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노는 것도 힘들다. (1)

2장 노는 것도 힘들다. (1)

의심이 많은 내게 그녀는 이사장 직인이 찍힌 서류와 학생증까지 내밀었다. 그것들이 위조일 가능성이 있긴 했다.

‘그래도 상대가 유수 고등학교인데 사칭하는 간 큰 짓은 못하겠지.’

속는 셈치고, 그녀의 말을 믿기로 하니 근심걱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

혹시 모를 사태를 위해 얼마 동안 교환학생으로 유수 고등학교에 통학하게 되었다고 솔직하게(?) 말하니 부모님께선 안심은 물론이고, 내심 나를 대견하게 보는 눈치셨다.

내 역량이나 노력이 일체 포함되지 않은 성과라 어머니의 기쁜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내 양심이 굉장히 고통스러워했지만 잠시뿐이었다.

휴학계를 제출했다는 핑계로 난 실컷 놀았다.

수업을 듣느라 놓쳤던 흥행영화들을 몰아보거나, 평소 읽고 싶었던 소설들이나 만화책들을 쌓아서 읽거나, 평소에는 관심도 없었던 예능프로나 다큐멘터리 방송까지 섭렵했다.

다행히 SNS 활동은 등한시했다. 친구도 없고, 관심종자도 아니고, 무엇보다 가짜일 확률이 농후하더라도 남들이 행복하게 지내는 사진이나 영상을 보고 앉아 있으면 열이 치밀어 오른다.

‘SNS는 인생의 낭비라고 했지. 나는 그 동안 문화 활동을 즐길 따름이야. 응. 그래.’

꼴에 방어기제랍시고 자기변명까지 완벽하게 마친 뒤라 더더욱 거리낌이 없었다. 그렇게 사흘이 흘렀다.

늦게 일어나 어제 보다 만 영화를 이어서 보는데, 어김없이 맛있는 냄새가 풀풀 풍겼다.

“인 씨. 점심 다 됐어요! 어서 드세요.”

내 학적까지 바꿔놓은 주제에, 내게 아무런 짓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연은 내 원룸에 머무르면서 내 세끼 식사를 책임지기 시작했다.

“맛있겠다!”

오늘 점심 메뉴는 삼계탕에 찹쌀밥. 그녀가 직접 담근 갓김치를 죽죽 찢어 고기와 함께 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었다.

힘쓰는 일이 없는데도 보양식을 얻어먹게 된 터라 두꺼워진 시작한 낯도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얻어먹는 게 사흘째 되니까 나름 익숙해지네.’

이 신세는 언젠가 갚겠다고 다짐은 했는데, 날이 갈수록 점점 메뉴가 호화스러워졌다. 사흘째 점심이 삼계탕이니 일주일이 지나면 만한전석이라도 만드는 게 아닐까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불안감을 티내지 않기 위해 농담이나 지껄이기로 했다.

“헨젤과 그레텔이 떠오르네요.”

“그렇다면 당신이 제게 내밀 뼈다귀는 뭔가요?”

역시 그녀는 당해낼 수 없었다. 할 일은 없고 시간은 많아지니 절로 쓸데없이 사색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잦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과연 내가 내밀 뼈다귀는 뭘까?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난 설거지를 했다. 요리는 그녀의 몫, 설거지는 내 몫. 암묵적으로 만들어진 규칙이었다. 이래서야 딴 여자로 갈아탔다는 소문을 개소리라며 반박할 수 없겠군.

내 원룸에 거의 살다시피 하는 여자가 요리까지 해주니, 살림을 차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낮선 여자가 집안에 머무르니 놀자판이 되어도 몸가짐을 함부로 하지는 못했다. 원래는 팬티바람으로 돌아다니며 배를 벅벅 긁었을 텐데, 여자가 있으니 아무래도 옷은 제대로 입고 다녀야 할 것 같았다.

설거지를 끝내고, 다시 방구석 폐인처럼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만졌다. 내 전공이 컴퓨터 공학이었다면 자택근무로 용돈이나 좀 만졌겠지만, 애석하게도 식품영양학은 아싸가 활약하기에 어려운 분야였다.

새로운 영화를 골라 보려는데, 그녀가 옆에 다가와 물었다.

“저녁은 뭘 드시고 싶으세요?”

“진짜 골라도 됩니까?”

“골라주시는 게 더 편해요. 그래야 낭비 없이 재료를 사니까요. 괜히 ‘아무거나’라는 말이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마법의 주문이 아니죠.”

잠시 고민하다가 딱 하나의 메뉴가 떠올랐다. 요리예능에 나왔던 메뉴라 새벽에 프로그램을 보면서 침을 꼴깍 삼켰다.

“동파육이 먹고 싶네요. 할 수 있나요?”

“대가(大家)의 손맛을 기대하시지 않는다면 얼마든지요.”

“부탁할게요.”

“그럼 오늘도 마음껏 당신의 시간을 써주세요.”

그녀는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원룸을 나섰다. 동파육을 위한 재료를 사러 나간 것이다. 그건 그렇고....... 대체 그녀는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 걸까?

다른 사람을 위해 하루 세 끼를 빠짐없이, 그것도 미리 만들어둔 음식 없이 매 끼마다 각기 다른 메뉴를 대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기 시간 관리는 어쩌고? 인생을 맡았다면서 내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니.......”

재료값도 안 내고 매끼를 얻어먹는 주제에 의심부터 하는 나. 내가 생각해봐도 정말 별로다.

평소에 못해본 ‘문화생활’과 사색으로 다시 일주일을 보냈다. 그리고 진부하게도 아주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지루해.......”

새롭고, 꿀맛 같았던 휴식은 지루함으로 돌아와 내 뒤통수를 후려 갈겼다. 못 본 영화나 도서나 예능프로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난 흥미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흥미를 잃은 오락은 지루함을 가중시키는 정신적인 노동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질리지 않는 거라면 원룸 근처 도서관에서 빌려보는 책들이었다. 어려서부터 공부는 못했어도 책은 편식하지 않고 즐겨 읽어왔다.

다만 세종대왕처럼 눈병이 걸릴 때까지 기생 대신에 책을 끼고 살 만큼은 아닌 게 문제였다. 방구석에 처박혀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래도 이제 와서 나가서 뭘 좀 해보겠다는 말을 꺼내기도 어렵지.......”

내 원룸에서 내가 나가겠다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그녀가 뭐라 첨언할 리는 없겠지만....... 난 밖의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수치심을 아는 남자다.

그럼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면 끝나는 문제 아닌가? 마침 다 읽은 책들이 쌓여 있었다. 슬슬 반납하러 도서관에 들러야 할 때가 왔다.

“운동 삼아 가볼까?”

회색 추리닝을 입고 얼굴을 가리기 위해 검은색 야구 모자를 푹 눌러썼다. 가볍게 달리면 운동이 될 정도로 내 체력은 엉망이었다. 군대에서 정기적으로 단련한 체력은 사회물 1년 먹으니까 싹 사라졌다.

“그나마 흡연자가 아닌 게 다행이지.......”
뛰어서 도서관에 도착하니 10분 정도 걸렸다. 토, 토할 것 같아....... 두어 번 헛구역질 한 뒤에 도서관 내부로 들어갔다.

“어, 어서 오세요.......”

내 꼴이 말이 아니었는지, 젊은 사서는 평소와는 다르게 말을 더듬으며 반납하는 책을 처리했다. 나는 새로운 책 다섯 권을 빌렸다. 사서가 예쁘장한 여자라 난 눈길도 주지 않으며 모자를 더 깊이 썼다.

집으로 향할 때는 걸었다. 한 번만 더 뛰었다가는 헛구역질 대신에 점심에 먹었던 걸 게워낼 것 같았다.

터덜터덜 걸어서 원룸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날 맞이해 주었다. 이게 바로 신혼이나 연애 초기를 기점으로 1~2년 전후에만 겪을 수 있는 행복이라 했던가?

아버지한테 결혼에 대해서 물어봤을 때, 당신의 대답을 잊을 수 없었다.

결혼은 최대한 늦게 하렴. 왜요? 나중에 크면 알게 될 거다.

그 대답을 처음 들었을 때는 아버지가 귀찮아서 대충 대답하시는 줄 알았다. 한데 나이를 좀 처먹고 보니까 그 말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이해할 수 있었다.

결혼이나 연애는커녕 아주 억울한 치정 때문에 쓰레기 낙인이 찍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잠시 잿빛으로 물든 과거를 회상하며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을 때, 요리에 집중하던 연이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 오셨어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마침 집에서 해둔 간장 소스가 있어서 조리 시간이 줄었어요. 소스를 끓이고 돼지고기 위에 얹기만 하면 끝!”

“냄새부터 맛있는데요? 고맙습니다.”

“그 감사, 감사히 받을게요!”

연의 말대로 5분 뒤에 동파육이 완성되었다. 간장 소스와 돼지고기의 풍미가 냄새에서부터 느껴졌다. 이거 자취생 입맛을 너무 고급으로 끌어올리는 게 아닌가 모르겠네.......

저녁밥상은 상당히 단출했다. 밥에 배추겉절이에 동파육이 끝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게 동파육을 부각시켜주었다.

“요리가 이렇게 뚝딱뚝딱 완성되는 거였나요?”

“사랑을 담으면 뭐든 즐거울지니....... 요리도 마찬가지에요.”

“사랑이라고요?”

내가 질색하면서 되묻자, 더더욱 무거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요. 한 번 뿐인 인생을 제게 맡겨주신 분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누구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당신, 외톨박이요? 젊은이들 중에서 사랑을 무겁게 여기는 사람은 외톨이밖에 없는데.”

멀리 나가지 않아도 된다. 나도 ‘사랑’을 신성시 여기게 된 외톨박이였으니까.

“아니오. 인맥은 있다가도 없는 법이지요. 그저 사랑의 종류가 다른 것뿐이에요. 살을 맞대는 남녀의 사랑 따위는 결코 아니며, 신이 내리기에 오히려 실감하기 어려운 범우주적인 아가페(Agape)도 아니요, 부모님께서 원 없이 베풀어주시는 내리사랑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연은 말끝을 흐리면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끝까지 진중한 어조로 자신의 사랑을 어필했다.

“이 사랑은 어떤 식으로든 변해도 당신의 삶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겁니다.”

상대가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다는 말이 너무나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흔히들 죽어서도 잊지 않겠다, 내 사랑은 변치 않는다며 낭만을 논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물론 나도 여느 남자와는 다른 외톨박이라 그녀의 색다른 사랑표현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먹기도 전에 체하겠군요.”

“먹여드릴까요? 매니악한 취향이시라면 입으로 먹여드릴 수도 있어요.”

“제발....... 식사가 끝날 때까지 입 좀 다물어주실 수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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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08 15:23 | 조회 : 443 목록
작가의 말
싱어송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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