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노는 것도 힘들다. (3)

2장 노는 것도 힘들다. (3)

그녀는 내 배꼽시계가 슬슬 울릴 준비를 하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점심을 만들기 위한 재료가 담긴 봉투를 든 채였다.

“슬슬 시장하시죠? 준비할게요.”

“저기....... 저도 함께 요리할 수 없을까요?”

내가 먼저 말해놓고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여자와 무언가를 함께하는 것 자체가 오래간만이었다. 특히 함께 먹는 식사를 함께 요리하는 일은 특히나 요원한 일.

세간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내 행동은 대놓고 관심을 표출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부끄러움을 속으로 삭이고 있을 때에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빈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기쁘네요. 드디어 당신께서 조금이나마 마음을 열어주신 것 같아서요.”

“열렸다니요? 제 마음은 항상 열려 있었던 걸요.”

내 마음에도 없는 말을 듣자마자, 그녀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말이나 못하면.......”

내가 뒤통수를 벅벅 긁자, 샐쭉한 표정의 얼굴이 다시금 함박 미소로 범벅이 되었다. 그녀가 내 팔을 부드럽게 잡아 주방으로 이끌었다. 진정되었던 얼굴이 다시금 확 달아올랐다.

쓰레기로 낙인이 찍힌 이후로는 여자와의 접점이 없어서 그런지, 여자와의 가벼운 접촉만으로도 내 얼굴은 쉽게 붉어졌다.

제발 그녀가 특별한 여자라서 그런 거라고 누가 말해줬으면 좋겠다.

붉어진 얼굴을 수습하기 위해 나는 쓸데없이 농담을 지껄였다.

“셰프. 오늘 함께 만들 점심은 뭔가요?”

“오늘은 라면을 끓여먹을 거예요.”

표정관리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간 화려한 메뉴들로 내 입을 즐겁게 해준 그녀가 라면을 끓이겠다니....... 아무리 MSG의 축복으로 라면이 대한민국 국민들의 입맛을 사로잡아왔다지만, 그녀의 요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사랑이 담긴 라면입니까?”

“물론이지요. 혹시 라면이라고 방심하고 계신가요? 라면도 어엿한 요리에요. 취향 따라, 토핑 따라, 요리법도 바뀌고 들이는 노력이 달라져요. 그래서 이것저것 가져오는 바람에 짐이 많아졌어요.”

나는 바닥에 놓인 봉지를 힐끗 보았다. 토핑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 많은 식재료들이 눈에 띄었다. 심지어 아직도 살아서 움직이는 주꾸미도 보였다.

예능에서 라면에 온갖 귀한 식재료를 때려 넣어서 먹는 연예인을 보면서 아까운 짓 한다고 욕한 게 엊그제 같은데, 내가 그런 호사를 누리게 되다니.

“사랑이 너무 부담스럽군요.”

“익숙해지실 거예요.”

“그것도 곤란하지요. 이런 사랑에 익숙해지면 싸가지 없는 놈이 되잖아요. 그러긴 싫소.”

“제가 그래서 당신한테 반했잖아요. 그 마음이 변치 않는 한, 제 사랑은 당신이 죽을 때까지 계속될 거예요!”

약간 무거워진 대화는 그녀가 물을 담은 냄비를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자, 그럼 재료 손질부터 시작하죠! 요리 도중에 불가피하게 이루어지는 신체접촉은 눈감아드릴 테니 행운을 노려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그런 말을 들으면 당신이 벗고 있어도 의욕이 죽겠네요.”

새롭게 창안한 학문으로 교수를 꿈꾸고 있는 사람답게, 그녀는 진짜로 의욕이 죽는지 시험해 보겠다며 옷을 벗으려고 했다. 물론 난 지나치게 기쁜(?) 상황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 뜯어 말렸다.

그녀와 함께 하는 요리교실은 늙어서도 특별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았다. 첫 요리는 어이없게도 고급진 라면이었지만, 다양한 메뉴들을 그녀와 함께 배우고 싶었다.

비단 요리뿐이랴? 인생을 맡겼으니 거의 대부분의 학문들은 그녀의 손을 통해 내 머릿속에 저장될 것이다.

그녀가 겁준 것에 비해서 라면의 조리과정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다. 애초에 웬만한 자취생이라면 라면을 안 끓여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역시 하루 세끼를 똑같은 라면으로 때운 적이 있었다.

물을 끓이는 동안 라면에 들어갈 재료들을 적당한 크기로 손질하고 자른다. 그녀가 간단히 시범을 보이고, 그걸 내가 그대로 따라하는 방식이었다.

주방에서 칼을 잡은 건 진짜 오랜만이네. 옛날 생각을 떠올리며 칼을 다루니 곧잘 그녀가 시키는 대로 재료를 손질할 수 있었다.

“잘하시네요. 요리를 많이 안 해 드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렸을 적 어머니가 요리하시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많이 봤거든요. 음식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드는 능력이 멋져 보여서 한때 잠깐이지만 요리사가 꿈이었던 적도 있었죠.”

“꿈을 포기하게 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부모님 두 분 모두가 심하게 반대하셨어요. 성공하기 어렵다면서 말이죠. 물론 제가 많은 것들을 해보고, 많이 그만둔 다음이라 외길이라 할 수 있는 걸 제가 물어오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말씀하셨죠.”

신기한 일이다. 무덤까지 가지고 가리라 결심했던 기억들을 그녀 앞에서는 아주 손쉽게 말하게 된다. 인생을 맡겼다는 말이 가져다주는 마력은 대단했다.

손질한 재료를 넣고 라면을 완성하니 냄새부터 건강했다. 스프를 반만 넣고, 각종 채소나 양념으로 맛을 낸 덕분에 인스턴트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음, 맛있네요.”

“당신의 솜씨가 일품이니까요.”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칭찬이 싫지는 않았는지, 그녀는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는 같이 요리해요. 저녁은 뭘 드시고 싶으세요?”

“이번에는 당신이 먹고 싶은 걸로 부탁해요. 괴식을 좋아하지는 않지요? 독거미라던가.”

“후후, 한 번 먹어보고 싶긴 하네요. 걱정마세요. 상식적인 재료만 엄선할 테니까. 음, 지금 떠오르는 메뉴는 없네요. 그럼 당신의 각오를 보면서 생각해볼 게요.”

“제 각오요? 어엇?!”

어느 샌가 그녀의 손에 내가 작성한 원형 시간표가 들려 있었다. 대체 언제 발견하고, 어떻게 나 몰래 가져간 걸까? 뭐든 노력하면 된다는 그녀의 말이 새삼 무섭게 다가왔다.

내가 당황하느라 입만 뻐끔거리고 있을 때, 그녀는 금세 내 시간표를 훑고는 싱긋 웃었다.

“이 시간표, 얼마동안 계속하실 건가요?”

“음....... 생각 안 해봤네요. 얼마나 지속하면 좋을까요?”

“그것도 당신의 마음대로에요. 하지만 추천해주고 싶은 기간은, 어느 샌가 이 시간표를 보지 않아도 몸에 그 계획이 밸 때까지입니다. 현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계획의 양질이 아니라 계획을 지키려는 의지를 기르는 일이거든요.”

의지박약이라며 에둘러 말하는 것 같았다. 사실이라 반박할 수가 없네.

노오력만 하면 뭐든 가능하다는 꼰대들의 주장과는 달리, 그녀는 인내심을 가지고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는 나를 지켜보고자 했다. 어렸을 적 부모님을 다시 만난 것 같아.

“그리고 당신의 목표는 뭔가요?”

“아직 모르겠어요. 되짚어보니 목표를 세워본 적이 없는 인생이었네요. 참 엉망이죠?”

“네. 그래도 걱정마세요. 죽기 직전까지는 늦은 게 아니거든요. 성공은 사람을 가린다고들 하지만, 저는 그 말을 믿지 않아요. 누구나 성공할 자격은 없어도, 기회는 있으니까.”

우와, 정말 전형적인 청춘드라마 명언이 납시었다. 절로 얼굴이 붉어지는 말인데도, 난 그 말을 반박하고 싶지 않았다. 다들 포기한 내 인생을 웬수 멱살 잡듯이 꽉 붙들어준 그녀를 믿고 싶었다.

언제나 이성과 태만으로 살아왔던 내게 감성적인 선택은 익숙지 않았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말아먹은 인생, 2회차를 노릴 수는 없으니 많이 수상하지만 의욕 하나만큼은 가상한 인생설계사한테 맡겨보자.

“계획표는 내일부터.......”

“밤에 독서라도 하고 주무세요. 계획대로 일어나지 못하실 것 같으면 일찍 주무시고요. 저녁은 생각해둘게요.”

그녀는 미소로 말을 끝맺었으나, 형언할 수 없는 압박이 전해져왔다. 한 번 칼을 뽑았으면 한 번이라도 제대로 휘두르라는 무언의 압박!

이래서 웃는 얼굴에 침을 못 뱉나? 마음 속 헛소리와 함께, 내 입에서 삐져나온 대답은 힘없는 승낙이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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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25 17:33 | 조회 : 554 목록
작가의 말
싱어송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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