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그녀의 집착은 포기를 모른다. (3)

1장 그녀의 집착은 포기를 모른다. (3)

평소에 술을 즐기지 않는 터라 도수가 낮은 맥주 두 캔만으로도 불콰하게 취하고 말았다. 그래도 착잡함과 잿빛으로 물든 분노를 안주삼아서 계속 술을 마셨다.

다섯 캔 정도 마셨을 때, 새로운 캔에 손을 뻗었는데 비주얼 천사가 부드러운 손길로 내 손을 막았다.

“많이 마셨어요. 술, 자주 안 드시잖아요?”

“저에 대해서 많이도 조사했군요. 보통 언제 수음하는지도 아는 것 아닙니까?”

질 나쁜 농담에도 비주얼 천사는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았다. 그저 가볍게 미소하며 성심성의껏 대답할 뿐이었다.

“저한테 인생을 맡기실 분인데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죠.”

은근슬쩍 인생설계를 맡겼다고 기정사실을 만든다. 알면 알수록 만만치 않은 여자다.

“모든 설계사들이 의뢰인의 인생을 철저하게 알아보지는 않아요.”

“그 작자들은 프로가 아닌 거겠지요. 철저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고서 어찌 프로라는 명함을 내밀 수 있겠어요?”

“당신은 프로라는 얘기네요.”

“네. 자신 있어요.”

배시시 미소를 짓는 비주얼 천사가 밑에 깔린 초록색 병을 꺼내들었다. 나와 보조를 맞춰 맥주 다섯 캔을 마시고 난 뒤에도 소주를 까는 것이다.

가끔씩 여자들 중에서 말술이 있다고는 들었으나, 눈앞의 미녀는 반 농담식으로 말하는 여자 말술과는 차원이 다른 주당인 것 같았다.

“안 취했어요?”

“취했어요. 그래도 아직 소주 일곱 병은 더 마실 수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절로 혀를 내둘렀다. 앞으로 일곱 병이나 들어간다는 말을 지키려는지, 비주얼 천사는 거리낌 없이 소주 뚜껑을 땄다.

내가 놀란 눈으로 일련의 행동을 지켜보는 가운데, 비주얼 천사는 병나발을 불었다.

술 마시는 모습만 보면 인생설계사가 아니라 비관론으로 하루하루 심신을 알코올로 적시는 작자 같았다. 이러다 평온했던 원룸에서 송장 치우게 생겼다.

“그만 마셔요! 찻잔을 줄 테니까 마실 거면 차라리 찻잔에다 따라 마셔요! 그러다 죽겠어요.”

“놔두세요. 너무 속상해서 그래요.”

움찔. 비주얼 천사가 울먹이는 눈으로 바라보는데, 난 아주 괴상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무관계인 그녀가 내 불행을 두고 가슴 아파하는 모습을 끝까지 의심하면서도 그것을 믿고 싶다는 충동이었다.

여자에게 호되게 당한 탓에 생긴 상처를 다른 여자를 믿음으로써 치유하겠다니....... 알코올이 돌아다니기 시작한 내 두뇌가 점차 이성을 잃어가는 것 같았다.

“어머?”

나는 비주얼 천사가 반쯤 마신 소주병을 낚아채고는 그녀와 똑같이 병나발을 불었다. 단박에 반병을 들이킨 탓에 머리가 핑핑 돌았다.

앞으로 꼬꾸라지는 나를 그녀가 부드럽게 받쳐주었다. 얼굴에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져왔다.

그 감촉이 무엇인지 뒤늦게 떠올렸으나, 술로 쓸데없는 용기를 얻은 나는 그 감촉과 차오르는 온기를 순수하게 즐겼다.

“지쳤어....... 다 때려치우고 싶어.”

내 주둥이는 기어코 반말을 토해냈다. 상대가 여자라서, 얼토당토않은 제안을 들고 온 탓에 억지로라도 더 거리를 두려고 했던 시도가 도루묵이 되었다.

비주얼 천사, 아니 연은 날 껴안은 채로 등을 아주 천천히 쓸어내리기를 반복했다.

울어대는 갓난아기를 달래듯, 화들짝 놀란 어린 아이를 진정시키듯....... 어느 새 졸음이 밀려들 만큼, 그녀의 손길은 너무도 따뜻했다.

이 온기에 모든 걸 맡기고 그저 쉬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아낸 것 같은 여자가 내 귓가에 감미롭게 속삭였다.

“많이 힘드셨죠? 이제 괜찮아요. 조금은 다 놓고 쉬어도 문제될 건 없어요.”

취하지 않았다면 울컥해 당신이 뭘 아느냐며 역정을 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사람이 약해진 틈을 노리는 비겁한 짓은 하지 말라며 충고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연의 말에서 무형의 힘이 느껴졌다. 부드러운 어조 속에 숨겨진 단호함이라 해야 할까? 이거 술에 취해서 그런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 같네. 취한 김이나, 내친김이나.......

나는 부모님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본심을 완벽한 타인에게 털어놓았다.

“지쳤어. 이젠 아무것도 하기 싫어.”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라면 내 어리광을 언제까지나 받아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연은 내 생각을 빠짐없이 읽은 사람처럼 나를 살포시 껴안으며 다시금 귓가에 속삭였다.

“괜찮아요. 한동안, 마음을 추스를 때까지 모든 걸 놓아도 되요. 말했죠? 인생을 맡겨보지 않겠느냐고. 그거, 빈말 아니었어요.”

“응. 잘 부탁....... 해.......”

여자의 품에 안겼다. 참 야릇한 상황인데도 얼굴색 하나 붉어지지 않았다. 흥분은커녕 진정제라도 놓은 듯 온몸이 나른하게 풀렸다.

나는 간만에 불면증에 시달리지 않고 스르르 두 눈을 감았다.

*

꿈이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꿈을 꾸지 않았다.

심한 불면증을 앓는 것도 모자라, 잠을 심하게 설치는 편이라 반드시 하룻밤에 꿈 하나를 꾸곤 했다. 극심할 때는 한 번에 여러 꿈을 오가기도 했는데, 오늘 아침은 무척 상쾌했다.

항상 성가시게 여겼던 아침햇살마저도 따스했다. 자는 도중에 뒤척이지도 않았는지 이불도 깔끔하게 덮여져 있었다.

“신기한 일이네.......”

적당한 잠기운이 매우 기분 좋았다. 게다가 혼자 사는 남자의 원룸에서는 절대로 날 수 없는 음식 냄새도 났다. 그것도 밥과 국 냄새였다.

배달음식으로 거의 모든 끼니를 해결하고, 요리라고 해봤자 고기를 굽거나 라면에다 파를 송송 썰어서 넣어 먹는 게 전부였다.

간신히 잠기운을 몰아내고 가스레인지 쪽을 바라보니, 앞치마를 두른 연이 느린 곡조를 흥얼거리며 요리를 하고 있었다. 국이 거의 완성된 모양인지, 시식용 종지에다 국을 살짝 담아 맛을 보았다.

“음, 완벽해.”

“연......?”

살짝 놀라서 두 눈을 홉뜬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다있소에서 천원을 주고 산 싸구려 앞치마인데, 그녀가 입으니 명품처럼 보였다.

“이제야 이름을 불러 주시네요?”

“음.......”

부끄러웠다. 은근히 거리를 두었으나, 그녀라면 대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런 주제에 술에 취해서 품에 안기기까지 했으니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미안합니다.”

“개의치 마세요. 술을 가져온 것도 저고, 당신을 위로해주기 위해서 먼저 안은 것도 저에요. 그건 그렇고....... 역시 소문은 믿을 바가 못 되네요?”

“애초에 믿지도 않았잖아요.”

소문이란 단어에 자동적으로 그 년의 얼굴이 떠올라 열이 확 뻗쳤다. 치가 떨렸지만 이내 분노는 허망함에 뒤덮여 잠잠해졌다.

“끙....... 갑자기 나른하네요. 아무것도 하기 싫어요.”

“어제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 그랬어요?!”

“네. 쉬고 싶다고 하셨죠. 내키는 대로 하세요. 어차피 자고 계시는 동안에 휴학 처리를 해놨으니까요.”

“뭐?”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야? 하도 어이가 없어서 반말이 튀어나왔다. 부끄러움이 싹 가시고 차디찬 현실이 내 뺨을 후려치는 느낌을 받았다.

허나 정작 내 혼을 빼놓은 당사자는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도 당당한 모습에 일순간 내가 잘못한 걸까 착각이 들었으나, 겨우 정신을 부여잡았다.

“누구 마음대로 일을 벌이는 겁니까?!”

“으음? 당신은 분명히 쉬고 싶다면서 잘 부탁한다고 제게 말했어요.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신다면 녹취록을 들려드릴 테니 법적 공방도 괜찮아요.”

“이런 빌어먹을....... 대체 대학 행정은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본인동의가 없는데 휴학 처리를 해버리다니!”

아무리 최고 우등생의 말이라지만 주먹구구식 행정도 아니고, 한 사람의 학업이 달린 일을 본인에게 직접 묻지도 않고 처리하다니? 그다지 명망 높은 대학은 아니었지만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아, 너무 탓하지 말아주세요. 정확히 말하자면 휴학 겸 1년 간 유수 고등학교의 교환학생이 되었거든요.”

“유수 고등학교? 교환학생? 허헛.......”

졸지에 대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격하(格下)되었단다. 하지만 유수 고등학교라면 얘기가 달랐다. 4년 혹은 5년제 과정인데다 국내의 모든 대학들을 아래로 둔 것도 모자라 세계적인 대학들에게도 인정을 받는 학교였으니까.

유수 고등학교 입학은 이사장의 최종면접에 통과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고, 졸업장과 학위를 따는 것은 입학보다 더 어렵다고 들었다.

“면접도 없이 대체 어떻게 날 꽂아 넣은 겁니까?”

의표를 찔렸는지, 처음으로 연의 얼굴에 당혹이 서렸다.

“실은 편법을 조금 썼어요. 정확히는 제 인생설계 대상자로 기록되어 있어요. 실험체로 쓴다는 얘기는 듣기 좋지 않으니 대외적으로는 교환학생이라고 얼버무려야 했지요.”

“실험체....... 그럼 지금부터 약물을 주입당할 각오라도 다져야 합니까?”

“아뇨!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인생을 맡긴다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인생설계는 자기주도적인 의지가 없으면 소용이 없거든요. 그러니 어제 말씀하신 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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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06 16:23 | 조회 : 475 목록
작가의 말
싱어송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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