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그녀의 집착은 포기를 모른다. (2)

1장 그녀의 집착은 포기를 모른다. (2)

비주얼 천사의 끈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날 설득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자신의 수업이나 사전에 잡아둔 약속이 있는 시간에는 내게 10분 전에 양해를 구하고는, 자유로이 쓸 수 있는 시간에는 어느 샌가 내 앞에 나타나 날 설득하는데 쓰는 것이다.

차라리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쪽이 성가시더라도 소름이 끼치지는 않을 거다.

비주얼 천사는 정확히 내 스케줄을 파악하고 움직였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 난 그녀가 자신의 수업을 듣고 난 뒤에 정확히 내 수업도 듣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그녀는 일부러 내 수업과 겹치는 것 없이 자신의 스케줄을 조정해놨다는 뜻이다.

만약 그녀가 가택침입조차 서슴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내가 원룸에서 뭘 하면서 지내는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냐, 어쩌면 이미 알고 있어서 굳이 내 원룸까지 들어올 필요가 없는 건지도 몰라.

그녀가 공강이고, 내 수업이 있을 때에도.

가장 값싼 학식 1번 세트로 대충 때우는 점심식사도.

빈 시간을 나름 성실하게 보내려고 독서실에서 예습 복습을 철저히 할 때에도.......

비주얼 천사는 언제나 나와 함께 했다.

“아, 그 필기 틀렸어요. 제가 노트를 적어놨으니까 참고하세요.”

심지어 도강한 수업인데도 전공자인 나보다 그 수업에 대한 이해도가 더 높았다. 이거 자괴감이 드는데?

“혹시 식품영양학에 조예가 깊어요?”

“아뇨. 배움에 조예가 깊어요. 뭐든 바른 방법으로 노력하면 아무리 그 분야에 재능이 없어도 일정 수준의 경지에는 오를 수 있거든요. 그건 당신도 예외가 아니랍니다.”

비주얼 천사는 이따금씩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팁들을 들려주었다. 인생을 자신에게 맡기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려는 것일까?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그녀의 명확한 의도는 뜬구름보다 더 파악하기 힘들었다.

둔재가 감히 천재의 생각을 짐작하고자 하는 것은 소용없는 시도. 허나 일주일이나 일상의 일부를 함께 한 여자에게 호기심이 드는 것은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만 두는 게 어떻습니까? 당신 말대로라면 시간낭비는 인생에 있어서 독일 텐데요? 가망이 없는 내 인생 말고 좀 더 나은 떡잎을 건드리는 게 성공할 확률이 높지 않겠어요?”

“아뇨. 제가 고안한 인생설계법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적어도 대한민국 내에서 당신이에요.”

할 말을 잃었다. 그만큼 내 인생이 비루하다는 거냐? 길거리에 나앉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는 제일 밑이라 이거야?

“이해할 수가 없네.......”

대놓고 싫은 소리를 하는 날 보면서도 비주얼 천사가 입가에 담은 건 미소였다.

냉소도 아니고, 실소도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은 미소. 이 빌어먹을 미소에 내가 제법 많이 당했지.

순간 내가 접했던 여자들의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절로 이가 갈렸다.

내 얼굴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는, 굳이 거울로 비춰보지 않아도 잘 알겠다. 분명 엉망일 것이다.

그럼에도 비주얼 천사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어린 날의 나라면 곧장 반해버렸을 단순호치(丹脣皓齒).......

“아직은 이해하실 필요 없어요. 하지만 제가 단언하는 건, 제게 상담을 받으신다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죠.”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며 책임지겠다고 말하면서도 후회하지 않게 하겠다는 단언을 더하는 것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

자기가 지껄인 말을 밥 먹듯이 어기는 부류가 아닐까 의심이 들었으나, 그럴 리는 없었다. 아름다운 여자라면 행동거지와 사고방식도 아름답겠지, 라는 치기 어린 편견은 아니다.

나 역시 그녀와는 비할 바가 못 되지만, 나름대로 그녀에 대해 조사를 했기에 내린 결론이었다. 싫은 소리나 욕을 들을 각오를 하고 경영학부의 부장까지 찾아가 연에 대해서 물었다.

부장은 질 나쁜 소문의 주인공이 얼굴을 보이자 눈살을 찌푸리며 마뜩찮게 말해주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미녀가 꼽추에 고백하고 차인 뒤에도 따라다니며 계속 들이대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으니까.

<아, 그 신입생? 쟁쟁한 인재야. 무려 유수(流水) 고등학교 출신이니까. 그래도 우리 대학에 일시적으로 교환학생으로 왔을 때 학장님과 이사장께서 정말 기뻐하셨지. 그런데 대체 왜 그 애는 너한테 집착하는 거냐?>

부장의 질문에는 어영부영 대답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정확한 이유는 나도 잘 모르잖아? 천재의 생각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전형적인 사기꾼이 하는 말 같네요.”

“굳이 부정하지는 않겠어요. 저는 실패한 경험이 적어요. 실패했더라도 몇 번 더 도전해서 결국에는 성공했고요. 실패의 쓴맛도 겪어봤고, 성공에도 익숙해요.”

“면접관이 된 기분이라 참 좋네요. 당신도 잘 알다시피 곧 수업이에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젠 상습적인 도강이 대놓고 이루어지는데, 학교 측에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숨마 쿰 라우데(Summa Cum Laude)의 행동이라면 그게 중범죄가 아닌 이상에야 막을 이유가 없겠지. 어떤 분야에서든 끗발이 있는 우등생이라면 대우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열등생으로서는 조금 씁쓸한 얘기지만.......

“아, 오늘은 선약이 있어요. 그래서 너무 유감이지만 오늘은 옆자리에 함께할 수 없네요. 그래도 수업이 끝나시면 바로 설득하러 올 테니 걱정마세요!”

그녀의 말에 내 얼굴 표정이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드디어 해방인줄 알았는데 일시적인 휴가나 다름없었다.

대체 왜? 라는 끝없는 의문이 머리를 두들겼다. 어차피 똑같은 대답을 들을 게 뻔하니 굳이 되묻지는 않았다.

홀로 듣는 수업은 홀가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빈자리가 생각보다 크게 느껴졌다. 드디어 미녀가 꼽추를 버렸다며 수군대는 게 들렸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어차피 구설수에 시달리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간만에 마음을 놓고 수업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다.

비주얼 천사가 옆에 있었던 시간만큼은 어울리지도 않게 착실하게 시간을 썼기에 나도 모르게 우등생의 삶이 습관이 돼버린 모양이다.

“이거 하나는 바람직한 일이네.”

나는 교수의 말을 빠짐없이 필기하며 픽 웃었다.

유난히 집중이 잘 되었던 수업이 끝나고 귀가하려는데, 내 시야에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두 얼굴이 저 멀리서 들어왔다.

나로서는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퍼뜨린 년과 그 년의 애인이 저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날 쓰레기로 만든 여자는 가뜩이나 같은 학과라 되도록 눈도 마주치지 않게 조심해왔는데, 오늘은 정말이지 운이 더럽게 없었다.

눈에 띄어봤자 좋을 게 하등 없다. 나는 똥을 피하는 심정으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어이, 쓰레기!”

움찔! 좋게 말하면 호쾌한, 나쁘게 말하면 시비조인 말투가 내 두 귀를 간질였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이젠 엮이고 싶지 않은 커플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아직도 학교에 다니고 있었네? 쓰레기 짓을 하고도 자퇴하지 않았다니....... 차라리 군대를 다시 가지 그러냐? 말뚝 박는 게 나았을 텐데?”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멈춰 선 두 사람은 서로 닮은 미소를 지었다. 아예 작정하고 시비를 걸려는 것 같았다. 남자의 큰 목소리 탓에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시선이 몰리니 괜히 몸이 움츠러들었다. 난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죄가 있다면 여자를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다는 것밖에 없는데!

분노와 수치심으로 몸서리가 쳐졌다. 하필이면 입안의 살까지 같이 씹는 바람에 피 맛이 났다.

“치잇.......”

나는 대꾸도 않고 등을 홱 돌려 성큼성큼 걸었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졌으나 입 밖으로 꺼낼 말이 없었다. 진실을 말한다고 해서 자극적이고 나쁜 소문에만 귀를 여는 녀석들이 믿어줄 리는 만무했다.

사람들이 대놓고 퍼붓는 욕설이며 구설수며, 내 귓가와 가슴에 깊게 박혔다. 그 와중에 날 물고기처럼 다뤘던 여자의 나지막한 욕설이 내 속을 가장 많이 뒤집어 놓았다.

“병신.”

난 진짜로 병신 새끼처럼 한 마디 반박도 못하고 야유 속을 걸었다.

어떻게 집까지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비주얼 천사의 선약은 제법 길게 이어지는지 집까지 걷는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원룸에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대충 팽개치고 침대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몸이 떨리면서 꾹꾹 참아왔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베개가 젖어 축축해졌는데도 난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한참을 소리 없이 울었다. 마음 같아서는 나라 잃은 놈처럼 통곡하고 싶었지만, 이놈의 원룸은 싼값을 하는지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내가 이 따위 일로 슬퍼하는 꼴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게 바로 찌질한 내가 유일하게 해낼 수 있는 자존심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한참을 울어 두 눈이 퉁퉁 부었다. 지랄 같은 군 생활을 겪으면서도 부모님의 조언에 따라 술과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술이 무척 땡겼다.

편의점에서 맥주라도 왕창 사서 마시고 죽자. 캡을 거칠게 쓰고 밖으로 나섰는데, 원룸 건물 밖 현관에 주전부리와 맥주로 가득한 두 봉지를 든 천사와 마주쳤다.

“뭡니까?”

“술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같이 마셔도 될까요?”

시간이 아깝지 않느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오늘의 나는 나보다 여러 방면에서 훨씬 뛰어난 여자한테 냉소적으로 굴 체력이 없었다.

나는 대답도 않고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섰고, 그녀는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따라 들어왔다. 무신경한 것인지 겁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패배견의 얼굴을 감상하는 게 취미인 건지.......

“얼마죠? 돈 드릴게요.”

기어코 비주얼 천사가 볼에 바람을 집어넣었다. 서운한 티를 팍팍 내는 얼굴에 나는 입맛을 다셨다.

“정말 이러기에요? 지난 일주일은 당신께 아무것도 아니었던 건가요?”

“하핫, 실없는 농담이라도 들으니 조금 낫네요.”

나와 그녀는 서로의 맥주 캔을 가볍게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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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05 13:42 | 조회 : 400 목록
작가의 말
싱어송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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