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그녀의 집착은 포기를 모른다. (1)

1장 그녀의 집착은 포기를 모른다. (1)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아니, 그보다 그 말의 저의가 대체 뭘까?

인생을 맡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 적어도 캠퍼스 길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내 생각을 반증하듯, 그녀의 미모에 시선을 사로잡힌 사람들이 나와 그녀 사이의 대화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지켜보기 시작했다.

내가 24시간 행복회로를 핑핑 돌리는 놈이었다면 천사에게 고백을 받았다며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1년 간 인간관계에서 쓴맛만 맛봐왔던 내게 여자의 고백은 이제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내게 달콤한 말만을 속삭이며 시간과 재화를 쏟아 붓게 만들었던 여자에게 석 달 동안 꽂혀 정신을 못 차리다가.......

‘우연히’ 그 여자가 다른 남자와 함께 ‘똑같이’ 즐거운 얼굴로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심지어 그 여자는 자신이 저지른 죄악으로 내게 누명을 씌워 여론을 휘어잡는데 성공하고야 만다. 졸지에 나는 애인을 두고도 다른 여자와 놀아난 쓰레기가 되었다.

한동안 여자의 치밀함과 뻔뻔함에 치를 떨었으나, 정신을 단단히 부여잡은 지금은 나름 값을 치르고 인생살이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때의 경험은 내 가슴에 쉽게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겼다.

즉, 내가 이 비주얼 천사의 기괴한 제안을 고백으로 받아들일 리는 없단 얘기다. 그렇다면 대체 뭘까?

농담 따먹기를 위해 날 불러 세운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여자, 연의 두 눈은 진지했다. 게다가 아름다운 여자가 외톨박이인 나와 해프닝이 생겨봤자 하등 좋을 게 없었다.

여신과 하층민 사이라면 보통 대다수의 구설수는 하층민을 향하겠지만, 여신의 순결(?)을 의심하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나오겠지.

길을 걷다가 얘기만 나눠도, 세 다리만 지나도 같이 잤네, 갈 때까지 갔네 마네 하는 소문으로 뻥튀기 되는 것.

그 빌어먹을 악의적인 무관심은 전국팔도 그 어디에서든 해당이 되는 썩어빠진 기본 옵션이다.

‘즉, 나 같이 한심한 녀석과 엮이면서까지 이뤄야 할 목적이 있다는 건데.......’

남자든 여자든 일면식도 없는 작자의 표면을 그대로 믿는 건 어리석은 일. 그래도 이 연예인 뺨치는 여자가 인생을 맡기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할 정도의 진지함이라면 호기심이 동했다.

허나 넙죽 받아들이기에는 제대로 된 제안이 아니었다. 내 인생설계를 위한 몇 백 장짜리 보고서가 첨부되었다면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봤겠지만.......

“거절할게요.”

설마 내 입에서 거절이 떨어질 줄은 몰랐는지, 연은 조그마한 입을 크게 벌리며 놀라는 눈치였다.

주변에서도 연이 고백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매몰차게 거절의사를 내비친 나를 보며 각자의 방식대로 놀라는 중이었다.

참 할 일들 없다....... 그러니 언론사들이 엉망진창 찌라시로도 먹고 살지.

호기심보다 경계심이 더 앞섰다. 어떤 표정을 짓든 아름다울 것 같은 여자와 비정상적으로 엮이면 좋을 게 하나도 없을 것이다.

연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등을 홱 돌려 다음 강의실로 향하려던 나를, 그녀의 필사적인 외침이 붙잡았다.

“자, 잠깐만요!”

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게 될지는 몰라도 여자가 매달리는 경험은 꽤 신선하네. 인생, 일단은 오래 살고 볼 일일세?

나는 픽 하고 힘 빠진 웃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다른 용무가 있나요?”

“왜 거절하는 거죠? 당신이라면 손해 볼 게 하나도 없는 제안일 텐데요? 인생을 바꿀 기회라고요?”

“하, 이건 또 무슨.......”

슬슬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내 눈썹이 치켜 올라갔는데도 이 여자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마치 법칙에 어긋나는 현상을 본 과학자마냥 놀란 얼굴 그대로인 것이다.

기가 찼다. 절로 숨이 탁 뱉어졌다. 나는 대답도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강의실로 향했다.

비주얼 천사는 포기를 모르는 성격인지,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며 날 설득하려 부단히 애를 썼다.

“다시 생각해봐요. 손해 볼 것 없다니까요?”

“댁이 누군 줄 알고 그 말을 믿습니까?”

“정말 날 몰라요? 나 이 학교에서는 꽤 유명해졌는데.”

“모릅니다.”

외톨박이가 대학교의 인기인에 관심을 둘 거라고 생각하느냐는 말이 내 입속에서 유영하며 튀어 오르려 했다.

애써 이 방정맞은 주둥이를 다물면서 걷는데, 비주얼 천사는 생글생글 웃으며 이전보다 더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 되었다. 자기를 모른다는 말이 그렇게 기쁜 걸까? 아무튼 내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게 튀어나왔다.

빙그레 웃느라 날 세치 혀로 설득하는 것을 그만두어서 다행이라 할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그녀의 끈질김에 혀를 내둘러야 할지.......

나는 날 따라 강의실까지 들어와 내 옆자리를 떡하니 차지한 천사를 바라보며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캠퍼스 길가에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 끈 미모가 강의실이라고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강의실에 있던 늑대들은 침을 흘리고, 여우들은 선망과 질시가 섞인 얼굴로 변했다.

그리고 그 옆에 앉은 놈은 대체 전생에 어떤 위업을 달성했기에 이런 행운을 누리는 것이냐는 시선이 내게 꽂혔다.

가뜩이나 ‘피치 못한 사정’ 때문에 이 대학교의 자타공인 외톨박이로 지내던 내겐 사람들의 주목이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결백했지만 누명을 쓴 죄수는 원죄를 지적하는 천사라도 만난 듯 책으로 얼굴을 가리며 옆의 비주얼 천사에게 속삭였다.

“<식품의 유통과 보관>에 관심 있어요? 당신의 전공이랑 전혀 상관없는 것 같은데.”

그뿐이랴? 이 수업은 이번 주가 3주차인데 이 비주얼 천사가 강의를 듣는 모습은 전혀 본 일이 없었다. 즉, 이건 명백한 도강(盜講)이다.

“만물, 만사, 그 모든 게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 했습니다. 배워두면 언젠가 쓸모가 있겠지요.”

“하, 당신이 남자 때문에 도강하는 여자란 소문이 나면 좋을 게 없을 텐데요?”

“흐음? 당신이 소문으로 남을 걱정해줄 줄은 몰랐네요.”

내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 여자도 그 헛소문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얘기는 빨랐다.

“알고 있는 모양이네요. 저는 ‘그런’ 놈입니다. 지금도 당신을 눈앞에 있는 탓에 아랫도리가 부풀어 오르고 있죠. 언제 슥삭 당신을 덮칠지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내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온 것일까? 비주얼 천사는 두 눈을 크게 뜬 뒤에 배시시 웃었다.

“거짓말. 저는 헛소문은 믿지 않아요. 보고, 듣고, 겪어본 것들에만 확신을 갖지요. 그리고 저는 저에 대한 더한 소문들도 듣는 걸요? 한꺼번에 남자 열을 가지고 노는 불여우라는 소문도 있어요. 심지어 경영학부의 모든 남자 과대들하고 돌아가면서 잔다는 소문도 있죠. 후후, 대체 누가 그런 소문들을 내는 걸까요? 얼굴 한 번 보고 싶네요.”

미녀는 괴로워~! 아니 뗀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 이 따위의 가벼운 말들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너무 나간 소문들 밖에 없었다.......

진짜로 이 남자 저 남자 가리지 않고 흡정(吸情)하는 몽마(夢魔) 같은 여자라면.......

나 같은 한심한 놈에게 괴상한 제안을 할 게 아니라 지금쯤 어울리는 녀석들과 침대에서 뒹굴고 있겠지.

미모에 몸매까지 흠잡을 데 없는 여자가 겪는 고충은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비방성 게시글로만 접해봤다. 새삼 여자들의 악의와 치밀함에 치가 떨렸다.

“고생이 많군요.”

“알아줘서 감사해요. 그래도 당신이 저의 제안을 받아들여준다면 힘이 조금 날 텐데....... 어때요?”

“거절합니다.”

비주얼 천사와 잡담을 나누는 사이에 수업이 시작되었고, 난 당연히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옆에서 생글생글 웃는 미녀가 수업 내내 날 쳐다보는데 집중이 될 리가 있나?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나는 오늘따라 더 하얀 내 공책을 접으며 한숨을 좀 더 깊게 쉬었다.

“대체 언제까지 날 따라다닐 겁니까?”

“당신에게 승낙을 받을 때까지요. 안심하세요. 아무리 저라도 욕실이나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갈 생각은 없답니다.”

“볼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심적 부담감이 심각합니다만.......”

“괜찮아요. 해치지 않아요. 오늘은 공강이라 시간이 참 많네요.”

“젠장.......”

그 뒤로도 수업 두 개를 더 듣고 대학교 근처 내 허름한 원룸으로 향하는데, 비주얼 천사는 기어코 내 집 앞까지 따라왔다.

아싸들만의 길목만 이용하지 않았다면 집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사람들의 시선에 찔렸을 것이다. 다행히 오늘은 애매한 시간에 마지막 수업이 끝났기에, 나는 기적적으로 아무하고도 마주치지 않고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혹시 무단침입까지 할 생각입니까?”

“아뇨. 아무리 제가 원한다 해도 법에 저촉하면서까지 일을 추진할 생각은 없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 게요.”

“오늘은.......?”

“다른 대학교로 편입하거나 해외로 유학을 떠날 생각은 없으실 테니까요. 맞지요?”

비주얼 천사의 눈웃음을 보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아났다.

그녀의 제안이 가진 자의 변덕이나 여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철저히 준비한 프로젝트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내가 비주얼 천사에 대한 음모론을 쓰는 동안, 그녀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에 우리가 왔던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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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2-05 13:39 | 조회 : 529 목록
작가의 말
싱어송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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