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어두운 방 안, 풍성한 갈색 머리칼을 가진 남성이 서 있었다. 남성은 물을 끓여 느긋한 손길로 찻잔에 붓고는 어디선가 꺼냈을 검붉은 찻잎을 넣었다. 그리고 찻잔을 제 허리 높이까지 오는 투박한 상에 내려놓고서 창가로 다가가 초록색 휘장을 활짝 걷었다. 그러자 휘장이 가리고 있던 창문의 속살 사이로 보랏빛으로 물든 파도가 한눈에 보였다.

남성은 경치를 한참을 감상하다가도 원래 하려던 일을 떠올리곤 파도의 매력에서 빠져나와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들어오는 새벽과 아침의 상쾌한 공기를 깊게 들이쉬고 내쉰 다음, 아까 내려놓았던 찻잔을 왼손으로 들어 얼굴로 가져다 댔다. 그는 차의 향기를 맡으면서 아침을 맞이했다. 아직은 모든 게 평안한 아침, 상쾌한 기분으로 차를 마신다.

그러던 도중 창문 옆으로 튀어나온 나뭇가지가 남성의 시선을 훔쳤다. 두 갈래로 나뉘다가 안으로 굽어 있는 흔하다면 흔한 평범한 나뭇가지였지만 남성에겐 그렇지 않았다. 그 나뭇가지의 모양새가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 것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이라면 지금 남성이 손을 떨다가 찻잔을 떨어트릴 이유가 되지 않는다.

남성은 찻잔을 떨어트린 것도 느끼지 못한 채, 황급히 어디론 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달리고 달려도 목적지로 금방 도착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사는 건물은 원래는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돌보는 곳이었다. 그런 곳이다 보니 건물이 자연스레 거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남성과 아이, 단둘만 살고 있어서 아침의 쌀쌀함은 이로 말할 수 없었다.

한참을 달리고 기둥을 돈 순간 문 하나를 발견한 남성은 급하게 멈춰 섰다. 그리고 거친 숨을 돌리기 위해, 조금 있다가 있을 일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스읍, 하아."

숨을 고르며 잠시 쉬고 있던 남성이 서 있는 곳은 아이가 곤히 자고 있는 방 앞이었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원래 아이를 깨우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성이 한시가 급하게 달려왔던 모습대로 그는 예정됐던 시간에 아이를 깨우는 걸 실패했다. 남성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크게 후회했다. 조금만 더 현명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라고.

아이를 깨우지 못했다는 사실은 남성에겐 평소라면 그리 중요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이의 운명이 달린 날이었던 것이다. 아이에겐 꿈이 하나 있었다. 바로, 사제가 된다는 것. 남성은 그 말을 듣고, 세상엔 직업의 귀하고 천한 것이 없다는 제 지론대로 환하게 웃으며 어떤 신을 위해 봉사하는 사제가 될 것인지 물어보았다. 그 당시 아이가 대답한 사제는 설원이라는 신단의 사제였다. 무언가 알고 있던 남성은 그 말을 들은 직후 인상을 쓰며 제 견해로 볼 때 힘든 길이 될 것이라고 만류했지만 아이의 확고한 의지는 꺽을 수 없었다.

아이는 그 당찬 마음으로 당장이라도 사제의 길을 걷기 원했지만 당시의 나이, 열 한살로는 할 수 없다는 게 그 신단의 규칙이었다. 게다가 사제가 되는 이들을 위한 의식은 사 년에 한 번 있는 일이기 때문에 아이가 열 다섯이 되는 지금까지 기다려야 했다.

아이에게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었지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은 심란한 표정으로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열리는 문 사이로 곤히 자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식사를 마친 후의 구렁이처럼 보이는 이불이 보였다. 그 안에 아이가 들어 있는건 당연지사, 남성은 한숨을 쉬며 한발짝 앞으로 움직이고 입을 열었다.

"저, 아이야."

남성은 힘겹게 꺼낸 말에 미동 없이 꿈의 세계에서 신전에 도착했을 아이를 흔들며 깨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잠시후 꿈나라에서 나오기 싫었던 아이가 한 손으로는 침대를, 한 손으로는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남성이 창문 바깥으로 봤었던 나뭇가지와 비슷한 모양새의 노오란 머리칼이 부드럽게 너풀거리는 모습은 앞으로의 일을 전혀 모르는 아이를 보여주는 듯 했다. 아이는 노란 눈동자를 깜빡이며 잠에서 덜 깬 아이들의 표본이 되어주었다.

"으, 우?"

"일어났구나? 아이야. 잘 들으렴."

"네?"

아이는 눈을 뜨자마자, 긴박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성을 보면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남성만 애가 탈 뿐이었다. 그리고 시간은 지체할 수 없었다.

"해가 떴어."

"네?"

남성은 제 말을 듣고서 이해하지 못한 건지, 너무 충격을 먹은 나머지 정신을 놓쳐버린 건지 모를 아이를 쳐다보며 곧 일어날 화를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그러나 시간을 들인 후 아이를 쳐다봤을 때, 아이는 멍한 표정도 분노에 일그러진 표정도 짓지 않고 있었다. 일그러지긴 했지만 눈물샘에서 수용 한계를 돌파한 나머지 댐 무너지듯 터져나오는 눈물을 얼굴에 범벅을 하고 있는 아이만이 보였다.

"흐, 흐으윽. 윽, 끅. 끄으윽."

"아, 아이야!"

남성은 당황해하며 아이의 어깨를 툭툭 치며 주의를 자신에게 끌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할 말이 없던 남성은 입을 꾹 다문채 곧 다시 댐이 무너질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있어야만 했다.

잠시간의 정적, 아이가 다시 울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울지 않았다. 오히려 이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한 건 아이였다.

"저, 방법은 있는 거죠? 네? 말좀 해봐요."

"무, 물론 있지! 안 그러면 내가 무슨 낯짝으로 너를 찾아왔겠니!"

사실 방법은 없었지만 남성은 아이를 울리기 싫은 나머지 거짓말을 해버렸다. 속으론 이를 갈고 있는 남성은 황급히 머리를 굴렸다. 시간은 늦었지만 마침 마차가 자주 지나가는 시간, 그리고 짐은 이미 싸 놨다. 한 가지 계획을 완성한 남성은 곧바로 아이에게 말했다.

"드노야, 너는 신전에 도착하는 건 내가 장담하마. 단지, 조금 이례적인 존재가 될 뿐이란다."

"예?"

무슨 소린지 이해도 하지 못한 아이를 빨리 씻고 나오라며 보낸 후, 남성은 건물을 재빨리 벗어나 마차를 찾았다.

물기 묻은 머리를 말리며 방으로 나온 드노는 갈아 입을 옷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도 제 앞날과 남성의 앞날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후,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걸까? 날 많이 챙겨주시지만 저래도 꽤 뻔뻔하신 분인데. 내가 간 이후에 다른 사람들에게 밉보이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드노는 자신이 떠난다고 생각하자 지금 서 있던 방을 둘러 보았다. 처음 남성을 만났을 때, 다정했던 그의 모습에 눈물을 흘리며 잠들고 일어났을 때 봤던 방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방이었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자신의 특이한 머리칼을 만들어준 남성에게 고마웠고, 행복했던 곳이었다.

그런데 사실 아이의 이름은 드노가 아니고 아드노아다. 드노는 단지 남성이 아드노아를 아이라고 부르지 않을 때만 줄여 부르는 이름이다. 그리고 아직 일찍 일어나는 걸 힘들어하지만 자신은 아이가 아니라 어엿한 소년이라고 생각한다.

옷을 갈아 입은 소년은 창 밖으로, 내려 오라고 부르는 남성을 보고는 황급히 망토를 두르고 짐을 챙겨 내려갔다. 정이 안 들래야 안 들 수 없던 이 건물과 이젠 헤어져야 한다. 이 건물에 축복이 있기를 바라며 건물에서의 마지막 발을 떼었다. 그리고 남성을 바라보며 숨을 거칠게 들이쉬며, 왔다고 말했다.

"왔구나, 그래. 그럼, 사랑한다. 그리고 미안해!"

"무, 무슨!"

도착하자 마자 남성이 팔로 자신을 들어 앉았을 땐 눈물을 흘릴 것 같은 걸 참고 있던 소년이었지만, 앉은 채 마차로 던져 버리며 미안하다고 외치는 남성을 보며 황당해 했다. 뭘 하는 거냐고 소리치기도 전에 소년은 그대로 무언가에 박은 건지 기절해버려, 그 무슨이라는 말이 지난 칠년간의 관계를 끝내는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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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9-06 02:04 | 조회 : 780 목록
작가의 말
nic25961341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가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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