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마차는 인연을 싣고

…… 멍청이 왕은 심사숙고한 끝에 고개를 내려 떠돌이와 눈을 마주보았다.

"자네를 처음 본 건 사실 마차 안이 아니라 어느 한 동네의 구석진 골목이었네."

"그럼, 마차에서 있었던 일은 다 거짓말이었던 겁니까? 그, 그러니까, 처음부터 계획된 만남이었다는 말씀입니까?"

"어허, 짐을 꾸짖는 겐가? 그리고 말일세, 의도되었거나 거짓되었다 하더라도 만남은 인연일세! 우리의 인연이 이정도인가?"

왕은 아무리 보아도 억지로 지은 듯한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떠돌이에게 일어나라 명했다. 떠돌이는 이 장소가 왕과 자신만의 밀회인 것을 떠올리곤 손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전하, 제가 너무 힘든 나머지 실언을 한 것 같습니다. 저희의 인연은 그 정도가 아니라 이정도지요!"

후에 왕의 실록에는, 어느 날 왕의 이마에 커다락 혹이 생겼는데 이는 넘어져서 옥체가 다친 흔적이라 쓰여진다.

-한 때, '인연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준비하던 교수가 잘못 가져온 자료. 그러나 그 강연은 대성공이었다고 전해진다.-



소년이 눈을 떴을 땐, 가진 거라곤 짐 가방과 머리 뒷쪽에서 느껴지는 자그마한 혹과 흔들리는 마차 안이라는 느낌 뿐이었다. 마차가 덜컹 흔들릴 때마다 뒷쪽이 욱씬거리는 게 남성에게 정말 좋은 선물을 받은 것 같다고 생각한 소년은 손사레를 절레 절레 치며 민망한 자세로 널부러져 있던 몸을 가지런히 앉혔다.

"설마 이렇게까지 하실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됬으니 어쩔 수 없는 건가?"

소년은 남성을 조금은 원망했지만 화가 난다거나의 감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언가 실수를 벌이면 웃어 넘기는 남성의 모습을 떠올리며 제 앞날이나 걱정하려 했다. 하지만 혼자만의 생각을 갖기도 전에 앞쪽 야트막한 벽 건너편 마차꾼의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손님 한 분 합석이요!"

마차를 그리 많이 타보진 않았지만 손님이 합석한다는 건 대체적으로 흔치 않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던 소년은 갸웃 했다. 그와 동시에 나무문이 끼이익 거리며 열리고, 그 사이로 누군가가 들어오는 걸 확인했다.

마차 안으로 한 발짝 발을 올린 손님은 검은색에 가까운 붉은 머리칼에 매서운 눈매의 붉은 눈, 약간 도드라진 광대와 독특하지만 조금 해진 망토를 두른 사내였다. 그 모습은 시골의 고아원에서 순하게 자란 소년에겐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소년은 험악한 인상의 사람들에게 안 좋은 기억이 있었다. 목으로 침을 꼴깍 삼킨 소년은 식은 땀을 흘리며 멈춰버릴 듯한 심장을 움켜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혹여나 사내가 그 모습을 발견하지 않도록 구석 한쪽으로 몸을 돌린 채 했다.

사내는 터벅거리는 걸음걸이로 걸어와 옆에 앉았다. 마차라 할 게 합석하면 같이 앉아야 하는 좁은 공간일 뿐이다. 소년은 옆에서 남성의 눈치를 보며 힐끔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소년에겐 무서운 얼굴일 뿐이다. 얼굴이 무섭다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판단은 섣불리 하지 않는 것이라고 배웠던 소년이지만 오늘만은 그렇지 못했다. 그렇게 소년이 힐끔 힐끔 쳐다보기를 반복할 즈음, 그 시선을 느낀 사내는 인상을 쓰며 얼굴을 돌려 소년에게 말했다.

"어이, 꼬마. 한가지 말해두는데 나는 옆에서 힐끔 힐끔 쳐다보는 사람이 싫다. 코흘리개 꼬마면 더 싫고, 남자면 더더욱 싫다. 나는 지금 피곤하니 조금 조용히 찌그러져 있어라. 알겠나? 그렇다고 울진 마라 머리가 울려서 짜증나니까."

예상치 못한 남성의 길고도 자세한 내용의 협박에 숨이 턱 막힌 소년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 사내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아래쪽만 바라봤다. 그리고 목적지에 금방 도착하거나, 남성이 빨리 내리기를 바라기만 했다. 하지만 소년이 가는 곳은 남쪽 끝이라 할 수 있는 거리상으로 꽤 있는 곳이었고, 그곳으로 가는 길로는 모두 인적이 드문 곳이라 사람이 사는 곳이 없어 사내가 내릴 리는 없었다. 애초에 사람들이 남쪽 끝으로 가는 이들은 소수로, 사제가 되길 원해 설원의 신전을 찾아 가는 이들 뿐이었다. 유동 인구치고는 소수의 이들이지만 사년마다 한 번 있는 날이 될 즈음이면 마차들이 그곳으로 향하니 신전에 가려는 이들에게 어려움은 없었다. 마차들이 저 때 모이는 이유는, 사람이 사는 장소에서부터 사람 없는 기나긴 땅을 지나 신전까지 이동하다보니 거리가 꽤 되어 돈을 많이 벌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던 소년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방금 자신이 생각한 게 사실이라면 바로, 저 사내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신전에 가고 있다는 것이다. 저 무서운 사람과 도착하고 나서도 헤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소년은 그러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하늘을 붕 뜨는 기분을 느낀다면 저 사람에게 던져지고 있는 거겠지?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면 명치를 맞았을 때일 거야. 가만, 붕 뜨는 거라면 마차 밖으로 던져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지! 하지만 꼭 저 사람이 나쁘리란 보장은 없잖아? 저 사람이 신전으로 가고 있다는 건 나처럼 사제가 되기 위해서잖아?' 라는 생각을 하던 소년은 저 사내가 사제가 되려 한다는 추측에서 눈을 번뜩였다.

"저, 저기요!"

한 가지 희망에 메달려 용기낸 소년의 말은 아쉽게도 입을 때자마자 끝이 났다. 남성이 소년의 얼굴만한 커다란 손을 펴서 소년의 입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읍읍 거리며 발버둥치는 소년의 모습과 두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는 사내의 관계는 흡사 잘못을 저질러 반죽음 당하는 노예와 까칠한 주인 같았다.

"짜증 난다. 팔 하나쯤 부러져도 되겠나? 조용히 찌그러져 있으라니까 자꾸 주둥이를 놀려?"

"저, 저기요! 가는 곳이 혹시 설원의 신전인가요? 사, 사제가 되러 가시는 건가요?"

일말의 대답을 들으려한 사내가 손을 때자마자, 소년은 말하지 못하고 죽어서 한이 될 뻔한 말을 했다. 그리고 후련한 마음으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사내를 바라봤다.

그는 소년의 물음에 대번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잠시 뒤 생각을 하고 난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어이. 이 주변에 사람 사는 곳이 없다는 건 밖을 바라보면 알 수 있지 않나? 메말라 붙은 황무지에 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무슨 그런 눈으로 쳐다보나? 그래, 그래. 설원의 신전에 간다, 가. 그리고 사제가 되러 간다고!"

소년의 초롱하고 간절한 눈빛에 조금은 애 대우를 해준 사내는, 더 이상은 그런 특혜따윈 없다는 듯 손으로 턱을 괸 후 눈을 감아버렸다. 그 모습을 본 소년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남성을 조금만 더 귀찮게 했다.

"제 이름은 아드노아예요! 줄여서 노아라 불러도 되고 드노라 불러도 되요!"

"조용히 해라. 드노든 노아든 뭐든 간에 짜증나니까!"

아드노아는 겁을 먹은 척 몸을 돌리곤 창문 밖을 바라봤다. 메말라 있는 황무지가 서서히 초록빛을 띄기 시작했다. 생명이 잘 살 수 있는 장소로 바뀌려면 아직 멀었지만, 그 사실만으로도 기절해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있었다. 신전까지도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시간 안에 저 까칠한 사람과 친해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천진난만한 소년은 웃었다.

"이름이 뭐예요?"

마차 안에서의 소란은 야트막한 나무벽을 가뿐히 넘어 마차꾼을 웃게 만들었다. 이상하게도 합석을 자주 받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차꾼은 두 손을 위로 올렸다가 아래로 내려쳐 말들을 다그쳤다. 바람을 가르며 대지를 지나가는, 인연을 실은 평범한 마차. 비록 아드노아의 확신은 맞지 않았지만 조금은 더 가까워질 계기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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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9-14 00:00 | 조회 : 790 목록
작가의 말
nic25961341

빼애애애액 울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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