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괜찮아, 이미 늦었으니까..

츤데레 여친과 헤어진 뒤에는?

8화. 괜찮아, 이미 늦었으니까..

카페베너가 있는 중앙로터리는 이 주위에선 가장 북적거리는 번화가이다. 뭐.. 워낙 내가 사는 동네가 타지역에 비해 낙후된 지역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번화가라곤 해도 단순히 몇안되는 상점가들이 몰려있고 노래방과 PC방 몇 개에, 상영관이 5개 밖에 되지않는 영화관과 크지도 작지도 않은 카페가 하나씩 있는게 전부인 그런 곳이다. 그 크지도 작지도 않은 카페가 바로 이 카페베너지만.. 아무튼 주말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해메고있는 청소년들을 그나마 편하게 해주는 장소라고 하면 이 주변에는 역시 이곳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런 예정없이 이곳에 와서 PC방에 가보면 꼭 아는 놈 한두명 씩은 꼭 있는 법이고, 테이크 아웃을 위해 카페에 간다해도 그곳에서도 꼭 아는 놈들 몇명이 수다를 떨고 있으니, 주말에 공부하기도 싫고 그렇다고 멍때리기도 싫은 젊은이들은 전부 이곳에 모이는 것이다. 대부분 PC방은 남자애들 경우고, 카페베너는 여자애들 경우라서 각각 차이는 있는 편이지만, 결국 결론적으로는 양 쪽 모두 '놀 곳이 여기밖에 없다'라는 이유에서 이곳으로 오게된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본래 20분이나 일찍 온 내 잘못도 있지만 지나가는 여자를 구경하는 것도 지루해지기 시작했을 무렵, 저 만치 떨어진 신호등 앞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흔들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송다혜'

중학교 때부터의 오랜 악연이며 고미나와 만나기 전부터 알고지낸 친구이다. 그리고 오늘은 나의 전담 상담사로써의 역할을 맡은 인물이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똑같이 손을 흔들어줬고, 다혜는 신호가 바뀌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 내 앞에 섰다. 다혜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에 살짝 웨이브를 준 헤어스타일에 딸기모양 헤어핀, 흰색바탕에 라임색이 스타일리쉬하게 가미된 원피스에 연한갈색의 워커를 신고있었다. 오늘도 화려하구만 이 녀석..

살짝 숨이 찬듯 다혜는 허리를 숙여 한숨을 푹쉬고 머리를 들어 내게 살짝 웃어보이고는 허리를 펴고 다시 내 쪽을 바라봤다. 음.. 뭔가 이렇게 약속잡고 다혜보다 일찍 온 건 처음이라 놀려주고 싶은데.

"참 거하게도 늦으셨습니다. 송다혜씨."
"으으.. 헛소리에 존댓말까지! 싸우자는거야? 나름 빨리온거란 말야.."

내 거들먹거리는 말투에 다혜는 살짝 화를 내며 얼굴을 붉혔다.
물론, 다혜는 약속시간에서 약 5분정도 빨리 도착해서 나에게 아무런 핀잔을 들을 필요는 없었지만, 뭔가 내게는 이럴 때가 아니면 다혜를 놀릴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어우~ 요즘 애들은 말하는게 아주.."
"도대체.. 얼마나 기다렸길래 그런 말투가 되는걸까?"
"글쎄.. 적어도 한 시간?"

나는 손가락으로 1을 만들어 다혜에게 내보이며 말했다. 다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에게 삿대질을 하며 의심스런 눈빛으로 날 쏘아봤다.

"허풍떨기는~ 해봐야 10분이겠지. 안그래? 딱 봐도 처음으로 나보다 일찍 도착하고는 기고만장해져서 어디 한 번 놀려볼까나~? 하고 생각했겠지."

음.. 이렇게 간단하게 간파당할 줄이야..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포기할까보냐!

"거참.. 사람을 못믿으시네."
"사람을 못믿는게 아니라, 못믿을 사람이란게 있는거야 바보야."

다혜는 피식웃으면서 팔짱을 꼈다.

"그래서 지금 내가 못믿을 사람이라고 하는거야?"

게다가 바보라고?

"그럼 너는 네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사실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자랑할만한게 신용이야. 몰랐지?"

사실 이것 밖에 자랑할만한게 없는게 흠이지만! 아무튼 나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다혜는 야박하게도 진심이 담긴 말투로 진지하게 반응했다.

"응, 완전히."
"와, 참 할 말 없게 만드는 반응이네!"

으허윽.. 내 정품인증 받은 개복치 멘탈이 고통스러워 하고 있어..
다혜는 내 반응이 즐거운듯 엷게 웃으며 손을 허리에 둔체로 허리를 살짝 구부렸다. 그러다가도 다혜는 또 다시 허리를 펴고는 갑자기 한숨을 푹쉬더니 내 뒤로 돌아가 나를 카페 입구쪽으로 밀기 시작했다.

"하아.. 정말이지! 자, 더 이상 할 말 없지? 이제부터 누나가 있는 힘껏~ 상담해줄태니까 들어가자 들어가~"
"으아! 야! 잠깐 누나라니 너..!!"
"안들리거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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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카페에 들어온 다혜와 나는 창가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평소 카페가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간단하게 아이스티를 주문했지만, 학교친구들과 밥먹듯이 카페에 드나드는 다혜는 마치 물만난 물고기처럼 이런 저런 외우기도 힘들것 같은 메뉴들을 메뉴판도 안보고 주문하기 시작했다.
나름 어느정도 각오는 하고왔다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음.. 초코악마브라우니하고 트리플초코퐁듀, 치즈케이크초코스모어, 치즈스프브레드, 스플레순치즈에.."
"야, 그만.."
"아, 잠깐만 있어봐! 그리고 캬라멜마끼아또는 레귤러로 주세요. 자 끝~ 이제 말해."

다혜는 뭔가 큰 고비를 넘긴듯한 상퀘한 표정으로 내게 말해왔지만, 때는 이미 되돌리기엔 늦은 뒤였다. 그리고 결국 남은 건 줄넘기를 해도 좋을 듯한 길이의 영수증을 받고는 아연실색하며 무릎을 꿇어버린 불쌍한 한 명의 남자 고등학생였다.
하아.. 이번 달은 학교급식 이외에는 공기만 먹고 살아야겠군.. 이 얼마나 가혹한 인생이란 말이냐..

"괜찮아, 이미 늦었으니까.."
"그래? 싱겁긴.. 아무튼 넌 옛날부터 할 말 있는 것 같아서 물어보면 꼭 그렇게 내뺀단 말이야?"

..내가 할 말을 하기도 전에 네가 일을 끝내놓으니까 그렇지 이 녀석아! 라고 말하고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아야했다. 이제부터 2시간.. 그렇게 시간이 많지 않다. 이 상담을 2시간 안에 끝마치지 못하면 앞으로 2시간 후에 내게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에이~ 다 이유가 있는거야 이유가. 자 이제 잡담은 그만하고.."

그렇게 본론으로 돌아가 상담을 진행하고자 하는 나의 바람은 철저하게 무시한체 다혜는 내 말을 중간에 끊고는 다시 질문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너 말야. 어제 왜 갑자기 약속시간을 바꾸자고 한거야? 물론 그 때도 물어보기는 했지만.. 네가 성실하게 대답을 안했잖아?"
"아, 그거.."

다혜의 질문에 포함된 어제의 이야기는 시간을 거슬러 전날의 우리집으로 이어진다..

.
.
.


"뭐, 약속시간을 바꿔?"
"응,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말야.."

그 날 떠오른 방법, 그러니까 다혜와 미나와의 약속시간이 겹쳐서 완전 난감했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다름아닌 '다혜와 미나 둘 중 한명의 약속시간을 더 앞당기거나 미뤄서, 상담도하고 미나도 만난다.'라는 것이였다. 이 방법같은 경우 둘 중 한명이 약속시간을 바꿔준다는 가정하에 이뤄지는 것이였기 때문에 전화조차 받을지 의문인 미나에게 전화를 거는 것보다, 게다가 전화를 받는다해도 허락해줄지도 모르는 그녀에게 전화를 하는 것보다, 그나마 얘기를 들어주고 바꿔줄 가능성이 있는 사람. 즉, '다혜'에게 전화해서 약속시간을 조정하는 것이 더 안전하고 성공 가능성있는 루트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 결과 나는 다혜에게 전화를 해 오후 2시로 만나기로 했던 시간을 12시로 앞당겼던 것이다.

"사정? 무슨 일인데?"
"그거야 뭐.. 일단 내일 차근차근 얘기하자. 아무튼 괜찮을까? 12시 정도에, 장소는 변경없음으로."
"괜찮기는 하지만.. 현직 솔로에 친구도 별로 없는 네가 갑자기 사정이 생겼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솔로는 맞지만.. 이래봐도 나 친구 꽤 있다고?! 무슨 근거야 내가 친구가 별로 없다니!"
"자, 그럼 대오말고 누구있는데?"

크윽.. 송다혜.. 내 인생에 몇 없는 약점을 공격하다니, 비겁하다!

"어..? 하, 하하하! 왜 그러세요 정말~ 아무튼 내일 12시? 괜찮은거지?"

다혜는 잠시 뭔가 생가하는 듯 조용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시원하게 대답해왔다.

"응, 알았어. 참고로 점심 안먹고 갈거니까. 더 각오해둬?"
"좀 봐줘라.."
"헤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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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테이블에 양손을 얹고 조용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결심한듯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본체로 진지하게 말했다.

"사실, 그게 진짜 오늘 내가 상담을 부탁 할 주제야."
"뭐, 뭔데.. 갑자기 진지해지기나하고! 그냥 학교에서 미나 만나면 어떻게해야 하는지 몰라서 상담요청한거 아니였어?"

다혜는 당황한듯 몸을 약간 뒤로 뺐다.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얘기를 계속했다.

"아, 그거라면.. 이미 만났고."
"이미 만났다고?"
"응, 사물함에서.."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녀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물어왔다.

"하아.. 그럼 일단 얘기하기 전에 사과부터 해둘께.. 정말 미안.. 그러니까 부탁이야. 기분 나쁘더라도 끝까지 들어줘."

그리고 나는 얘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폭풍우처럼 지나버린 어제의 일에 대해서.. 과거에 미나와 사귀는 사이가 되기전에 그녀와 함께했던 추억이라고 하기도 부끄러운 이야기에 대해서.. 그리고 미나와 내가 헤어짐으로써 구설수에 오른 '주종관계'에 대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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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이야기는 한 시간을 훌쩍 넘어버렸고, 결국 제대로된 상담을 하지도 못한체 끝날 위기에 처해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전부 말해버린 나는 결국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는 이야기.. 말해보니 알았지만 이 이야기는 정말이지 소설 같은 이야기였다. 그녀와 같이 있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주종관계를 맺다니.. 정말이지 중세시대의 로맨스도 분명 이 정도까진 아니였을 것이다. 나는 불안해하면서도 슬며시 고개를 들어 다혜의 표정을 살폈다. 다혜의 표정은 딱봐도 기분이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한참전에 테이블에 놓여진 음식들과 음료는 양이 전혀 줄지 않았다.

"...."
"...."

당연하다. 보통 이런 이야기를 듣고 좋아하거나 공감해줄 사람은 없다. 나는 단지 그녀가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줬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얘기를 하면서 몇번이나 전부 다 거짓말이라면서 이 이야기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싶었지만, 나는 믿고싶었다. 다혜라는 인간을 한 번 믿어보고 싶었다. 겨우 3년 남짓 된 친구사이라지만 그냥 단지 믿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나에게라도 친구로 남아줄 만한 녀석인지 알고싶었던 것이다.

.
.
.

그렇게 몇 분 동안에 침묵이 흐르고 난 뒤.. 갑자기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3년이라는 세월은 이런 문제를 공유하기엔 너무나 짧았던 것일까?아니면 아무리 같이 보넨 세월이 오래된들 역시 이런 문제는 타인에게 상담할 문제가 아닌 것일까? 나는 나 자신에게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 그렇게 남에게 피해주기 싫어하던 녀석이 가장 친하다고 생각한 친구에게 상처나 주고, 떠나보네는 꼴이라니 참 볼만하다.. 자신이 벌인 일을 남에게 의지해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양심도 없지..

"..나 역시 꼴사납지? 아무리 상담이라곤 해도 이런 얘기나 늘어놓고.."
"...."
"..걱정하지마. 이제부터 내 쪽에선 연락.."
"아, 잠깐 뭐라는거야 이 바보는?"
"응?"

무슨 일인지 어안이벙벙해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봤더니, 다혜의 얼굴에선 방금 전의 어두운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장난끼 가득한 다혜의 얼굴만이 내 눈 앞에 있었다. 그렇게 당황해서 멍해진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춰버렸고, 갑자기 그녀의 손이 내 손을 잡아 끌어 이끌린 몸이 카페 밖까지 나오기까지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렇게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그녀에게 계속 끌려가면서도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너, 나 싫어하게 된거 아니였어? 이, 이건.. 도대체.. 아니, 그보다 지금 어디가는거야?!"
"..첫번째 질문은 마치 내가 널 좋아하기라도 했던것처럼 들리는데. 너 바보야? 애시당초 나한테는 너 같은 놈 싫어하고 뭐고도 없네요~ 베에~"

다혜는 그렇게 나를 끌고가면서도 뒤를 보고 메롱하고 혀를 내밀었다. 으으.. 정말이지 이 녀석은..

"그, 그럼 그건 그렇다치고 지금 어디가는 건데?"
"어디긴.. 너 진짜 바보구나?"
"말 안하면 모른다고 이런건.."
"하아.. 정말이지 바보는 어쩔 수가 없네요~"

그렇게 그녀는 나를 끌고가는 것을 멈추고 뒤로 돌아 내 앞에 똑바로 섰다. 그렇게 그녀 특유의 자신만만한 표정이 내 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치 내게 머리 속에 똑똑히 각인시키라는 듯 이마를 검지손가락으로 누르며 말했다. 그리고..

"보라매 공원인게 당연하잖아? 상담은 지금부터 시작이야."


[8화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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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04-04 22:41 | 조회 : 1,044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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