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 CHAPTER 2 ] -( 3 )
Antagonistic Balance : 적대적 균형





웨인은 낭창낭창 흐트러지는 다리에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털썩- 하며 몸이 내려앉은 곳은 와인색 러그가 깔린 침실. 대공 아몬의 침실이었다. 도돌이표처럼 돌아왔다. 저를 악몽이라는 이름의 구덩이 속에 빠뜨리고, 나오지 못하게끔 짓눌렀던 이곳으로.



"어제까지만 해도 널 죽일 생각은 없었다."



웨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목울대가 두어 번 움직였지만, 목구멍의 꺼끌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공의 동굴같은 목소리가 다시금 웨인의 전신을 훑는다. 검은 기운과 정면으로 마주하니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살의. 그것은 '살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처음엔 너를 가장 고통스럽게, 천천히 죽여 줄 방법을 고민하느라 네 숨길을 터주었고..."

"....."

"나중엔 어쩌면, 어쩌면 너를 조금은 불쌍하게 여겼는 지도 모르겠군."

"사, 살려.... 살려주세요, 히끅..."

"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제발, 제발...."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은 됐고, 그냥 당장 깔끔하게 죽이기로 결정했다. 너를 죽이고, 네 시종놈까지 없애버린다면 훗날 네놈들이 끼칠 우환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대공이 말하는 '시종놈'이란 단어에 웨인의 눈동자가 번쩍 뜨였다. 그는 테이룬을 말하고 있었다. 자신의 보호자 역할을 수행하며 늘 헌신했던 그를 생각하니 웨인은 가슴이 얹힌 듯 먹먹해짐을 느꼈다. 두 눈에 가득 고였던 눈물은 기어이 뺨을 타고 흐르고야 말았다. 두려움과 죄책감이 한데 뒤엉킨 응어리가 가슴 속을 매웠다. 하지만, 웨인은 나약했다. 무력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반편이처럼 계속 울기만 하는군.



대공이 웨인에게 다가와 그의 가느다란 목을 틀어쥐었다. 한 손에 잡히는 가늘디가는 목숨에 대공은 잠깐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손에 힘을 가했고, 웨인을 들어올렸다. 힘 없는 몸뚱아리가 너무나도 가볍게 들린다. 웨인이 미약한 반항을 해보았자 대공에겐 벌레가 건드리는 수준도 되지 않는다.



"크흐..... 컥, 끅..... 으으..."



웨인이 있는 힘껏 몸을 바동거렸다. 제 목을 틀어쥔 손을 손톱으로 박박 긁어도 대공의 손은 조금도 상처입지 않은 채 멀쩡했다. 그건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아흑......끅, 끄으..."



대공의 손이 웨인의 눈물로 젖어갈 무렵, 웨인의 숨은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잔뜩 울어 벌게진 눈가와 콧등, 상기된 뺨과 절박한 손짓, 입에서 간헐적으로 내뱉는 숨, 찌푸린 미간, 그리고 미처 잠그지 못한 수도꼭지처럼 쉴 새 없이 떨구는 눈물 방울들.



"아."



아차. 그 고통에 잠긴 얼굴을 감상하느라 잠시 한눈을 팔았다. 웨인이 마지막 반항으로 몸을 세차게 뒤흔든 것이다. 웨인의 눈물로 흠뻑 젖은 대공의 손이 틀어쥐고 있던 목에서 미끄러졌다. 웨인은 바닥으로 떨어지자마자 제 목을 부여잡고 가쁘게 숨을 들이키며 고통스러운 기침을 내뱉었다.



"콜록, 콜록..... 흐읍, 끄흑, 콜록...."

"....."

"콜록, 흡, 흐, 흐으으......"

"이래보았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죽음을 가만히 받아들이는 게 더 나을 거다."



잔혹한 목소리가 웨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는 전혀 웨인을 봐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웨인은 주춤거리다 몸을 천천히 뒤로 내뺐다.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달아나고 싶었지만 다리에 도통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도망가봤자 소용없다고 했어."



웨인은 그가 내뿜은 검은 기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소름끼치는 기시감, 뱀과도 같은 몸짓, 그리고 그것과 마주했을 때 무력해지는 제 몸뚱아리.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이 죽음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테이룬을 구할 수 있지?

아아, 제발 어떻게...

궁지에 몰린 몸뚱아리는 굳었지만 웨인의 머리는 그와는 별개로 빠르게 굴러갔다. 대공이 제 바로 앞까지 도달했을 때, 웨인은 땀을 뻘뻘 흘리며 버텼다. 그의 말이 맞다. 도망가봤자 소용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웨인은 그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동시에 제 목숨을 지켜낼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포기한 건가."

"......"

"그래. 그게 편할거다."



저를 얕잡아 보는 대공의 웃음소리가 피식- 하며 귓가를 스쳤다. 작은 신음소리와 함께 웨인은 몸을 틀었다. 문득 기억났기 때문이다. 대공의 침실에 처음 발을 들였던 날, 그가 했던 말이.



'벗어라.'



당장이라도 그의 굵직한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웨인은 고개를 숙이곤 제 어깨에 둘러진 끈을 풀었다. 붉은 러그 위로 옷끈이 흘러내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짓으로 단추를 하나 하나 풀며, 웨인은 힐끔 힐끔 그의 눈치를 보았다. 차마 위를 올려다볼 수는 없었지만 그의 발끝은 볼 수 있었다. 대공은 다가오던 것을 멈춘 상태였다.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기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예상할 수 없다. 하지만, 옷을 벗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멈췄다간 그가 당장이라도 다시 제 목숨줄을 쥐고 흔들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조잡한 옷이 바닥 위로 흘러내리며 웨인의 흰 살결이 드러났다. 웨인은 머뭇거렸다. 대공은 아직도 가만히 서 있을 뿐이다. 마치 기회를 주는 것처럼. 웨인은 캄캄한 이 암흑 속에서 빛이 나오는 작은 틈새를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주저없이 바지까지 벗었다. 고간을 감싼 제 속옷에 손을 댈 때는 손이 잠시 진동을 일으켰지만, 결국은 그도 벗어버렸다. 이 모든 것은 테이룬을 지키기 위함이다. 자기 세뇌를 하며 웨인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 다음엔, 무엇을 해야 하나. 그가 무슨 말을 했더라.



'두 말하게 하지 마. 어서 무릎을 꿇어.'



생각났다. 그는 저더러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했었다. 망설일 틈도 없이 웨인은 그 앞으로 기어가 무릎을 꿇었다. 그 과정에서 잠시 머리가 띵- 하고 울리며 몸이 휘청거렸지만,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다. 바닥을 가까스로 짚은 손이 움칠거렸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가 다음에 무슨 명령을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웨인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자 방에는 무거운 정적이 깔렸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웨인은 이제서야 두려움을 무릅쓰고 떨리는 고개를 들었다. 내리깔은 눈을 천천히 들어올리려다가 문득 시선을 멈춘다. 대공의 다리 사이에 시선을 두니, 무언가 생각날 것만 같았다. 아니, 생각났다. 공포에 질린 상태였는 데도 방금 전의 일처럼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남자의 것을 입으로 받아낸 적이 있나."

'처음인게 당연한 건가.'



그게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자신의 입이 그 '남자의 것'이라는 걸 받아내야 한다는 소리이다. 그리고, 아마도 '남자의 것'이 뜻하는 것은 남성의 성기가 분명하겠지.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받아내라는 뜻은 무엇인가. 도통 이해가 되질 않는다. 어떻게, 무엇을 받으라는 말이지?



"뭘 멀뚱히 있는 거냐."

"아..... 그게..."

"나름 패기있게 옷을 벗나 싶더니만 결국은 이 모양이군. 됐어. 그런 어설픈 마음가짐으로는 나를 설득하지 못해."

"으아......"

"네 놀음에 장단 맞춰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웨인은 다급하게 울먹였다. 아까 목을 심하게 졸려서 그런지 갈라진 신음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숨은 턱턱 막히는 느낌이다. 뭐라도 해야 한다. 뭐라도.

웨인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대공의 고간에 얼굴을 파묻었다. 칙칙한 어둠의 기운 너머로 야릇한 체향이 느껴진다. 웨인은 다급하게 그 위에 입술을 부볐다. 다시 터져버린 눈물보로 대공의 바지가 젖어갔다.



"후....."



대공의 손이 제 머리를 밀어내자, 웨인은 몸서리를 치면서도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매달렸다. 제발, 제발 하고 입을 뻐끔거리며 그의 다리를 부여잡는다. 대공은 내리 한숨을 쉬다가 메탈 버클을 푼다. 악어가죽으로 만들어진 그의 벨트가 느슨해졌다. 웨인은 대공의 움직임 하나 하나에 반응하며 움찔대면서도 그가 자신을 더 이상 밀어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안도했다. 그의 벨트 사이로 검은 속곳이 드러났다. 웨인은 아주 잠깐 동안만 뭉그적거리다 조심스레 그 사이로 입술을 집어넣었다.



"벌려."

"?"

"입을 벌려야지."



그는 입을 벌리라 명했다. 당혹스럽긴 했지만 이제와서 거부할 용기따윈 남아있지 않다. 몇 년치의 용기를 오늘 다 끌어 모아 써버린 것만 같았다. 심장 곁에 용기를 담아두는 상자가 존재한다면, 아마 웨인의 것은 지금쯤 텅텅 비어있을 것이 분명하다.

웨인은 군말 없이 그의 명령에 따랐다. 조심스레 열리는 붉은 입술 사이로 말랑한 혀가 잔뜩 긴장한 채 굳어있는 것이 보인다.

9
이번 화 신고 2019-11-16 20:04 | 조회 : 3,943 목록
작가의 말
새벽네시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