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 CHAPTER 2 ] -( 2 )
Antagonistic Balance : 적대적 균형





여느 때와 다름없는 위키드 공작 대저택의 아침. 노란 햇볕과 선선한 바람 아래 이불 빨래를 말리며 시간을 보내던 하인들, 그리고 갑작스럽게 들려온 휫파람 소리. 그들은 낯선 휫파람 소리를 듣고 기다렸다는 듯이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소리의 주인은 다갈색 깃털을 가진 올빼미다. 하인들 위를 잠시 맴돌던 올빼미는 큰 눈을 껌뻑이며 저택 한 쪽 창가에 내려앉았다.



'똑 똑 똑...'



"대공,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들어와라."



펜을 돌리며 업무를 보던 대공은 비서관이 들어오자 살펴보던 서류뭉치를 밀어놓았다. 비서관은 고개를 숙여 그에게 깊은 경의를 표하고는 아뢰었다.



"오늘 아침, 몇몇 시종들이 갈색 올빼미를 보았다길래 즉시 잡아두었습니다."

"갈색 올빼미라.... 천사들의 전서구가 아닌가?"

"예. 발목에 쪽지가 묶여있었습니다. 하명하신다면 당장에 갖고오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대공은 손가락 위에서 굴리던 만년필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굵다란 황금 뼈대 위에 들소 가죽과 벨벳 천을 덮은 의자가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물러났다. 붉은 천 위에 금술이 달린 슬리퍼, 그에 짓이겨진 호피 러그가 대공의 발소리를 줄여 주었다. 분명 들릴 듯 말 듯 한 발소리였지만, 그 소리를 들은 비서관은 대공의 언짢은 기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를 자극하지 않는다. 알아서 몸을 사려야 했다. 비서관은 대공이 편히 걸어갈 수 있도록 몸을 비켜 섰다.



"내 직접 찾아가도록 하지. 천사놈들, 대체 무슨 낯짝으로 전서를 보낸 것인지 알아야 겠어."

"예."

"어디에 잡아두었지?"

"서쪽 탑 관측실에 남는 새장이 있어 넣어두었습니다."

"그렇군. 앞장서라."



관측실에 도착한 후는 더 가관이었다. 언짢음을 가슴 속에 꾹꾹 눌러담고 있던 대공의 인내심은 쪽지를 열자마자 포탄처럼 터져버렸다. 그의 낯은 분노로 달아올랐고, 쥐고 있던 쪽지는 볼품없이 구겨졌다.



"무슨 내용이 적혀있는지 여쭈어 보아도 되겠습...."



비서관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대공은 쪽지를 내팽겨치고는 관측실을 나갔다.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는 그에게선 검은 분노의 그림자가 돋아나고 있었다. 대공이 내리밟은 계단이 층마다 그 기운이 묻어 색이 새카맣게 변질됐다. 어둠이 그득한 대공의 힘을 밟고 가기 두려웠던 비서관은 계단 색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에 그가 쪽지로 눈길을 돌렸다. 바닥에 너덜너덜하게 달라붙은 쪽지 사이로 검은 무언가가 보였다.



"저게 뭐야...."



무심코 쪽지를 들어올렸던 그의 동공이 확장됐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 위로 미간이 구겨진다. 그것은 머리카락 뭉치였다. 색이 검은 것을 보아, 악마의 것이 분명한 머리카락.



"이건.... 데이먼드 도련님의...."



비서관은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야 대공의 갑작스런 분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머리카락을 감싼 쪽지에는 아무말도 적혀있지 않다. 하지만, 그 의도는 분명했다. 도발의 의미가 담긴 머리카락이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를 되찾은 지 이제야 거의 십 년이 되어가는 지금.



'천사들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200년 전쟁을 다시 일으키고 싶은 건가? 그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아니, 만만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이미 마계의 피해량은 훌쩍 뛰어넘었겠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어....'



비서관은 머리를 싸맨 채 주저앉았다. 어느덧 대공이 지나간 계단 위로 새카만 어둠의 기운이 걷히고 있었다. 회색빛이 돌아오는 대리석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 * * * *





저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정다감한 여성의 목소리가. 흐릿한 안개 너머로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빛 머리칼과 블루 사파이어를 박은 듯한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입고 있는 흰 나이트 가운은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나비의 날개처럼 펄럭인다. 그녀는 웨인의 어머니였다. 웨인은 입술을 뻐끔거리며 그녀를 향해 도와달라 외쳤다. 목소리는 무언가에 콱 막힌 듯 아무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는다. 일말의 신음소리 조차도. 웨인의 뺨에서 굵은 눈물 줄기가 흘렀다.



'웨인.....'



그녀가 붉은 입술을 벌리고 당장이라도 제 이름을 부를 것만 같았다. 그 온기 가득한 품을 열고 빈틈없이 껴안아 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것은 상상이었을 뿐, 그녀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는 이내 몸을 돌렸다.



'가, 가지 말아요! 제발!'



목이 터져라 외치지만 나오는 것은 색색거리는 숨소리 뿐이다. 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인가. 왜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는 거야. 웨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굳은 아랫입술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윤기나는 머리칼과 흰 가운의 천 자락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그녀가 사라진 그 자리에 끝없이 펼쳐진 안개가 변색되고 있었다. 새카만 어둠의 기운이 다시금 웨인 주변을 둘러싼다. 팔 다리를 타고 올라와, 독사처럼 옭아매고 날카로운 이를 세운다.



"헉, 헉, 흡, 흐읍..."



웨인은 가쁜 숨소리와 함께 잠에서 깼다. 벌써 이번이 세 번째다. 새벽에 처음 깬 후로 계속해서 악몽을 꾸고 깨어나길 반복하고 있었다. 이제는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더 이상 잠에 들고 싶지 않을 지경이었다.

어깨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무거웠다. 웨인이 짊어진 짐은, 실수인지 고의인지 모를 천사들의 잘못은, 웨인의 어깨를 거세게 짓누르고 있었다. 숨이 갑갑해지는 느낌에 웨인은 창문을 열었다. 먼지 쌓인 낡은 가구가 놓인 작은 방. 다행스럽게도 이런 곳에도 창문은 있었다. 비록 작은 편이긴 했지만, 그마저도 분에 넘친다.



"흡....."



웨인은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숨을 힘껏 들이마셨다. 폐에 차가운 공기가 차는 느낌이 나쁘지 않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머리는 식어갔다.



"조금 열이 나는 것 같은데...."



웨인은 제 이마에 손바닥을 대고는 중얼거렸다. 아까부터 오들오들 떨리는 몸은 아마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열이 나는 것이 분명한 와중에도 웨인은 창문을 닫지 않았다. 그것은 겁 많은 웨인에겐 아마 일종의 자해였을 지 모른다. 몸이 아플 때면 늘 따뜻한 방에서 휴식을 취하던, 그 행복했던 지난 날들을 잊기 위해. 웨인은 자신의 몸을 부러 더욱더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똑 똑...'



간결한 노크 소리에 웨인의 사고가 정지했다. 창문을 닫기도 전에 노크 소리의 주인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얼굴이 사색이 된 하인이 웨인을 향해 곤란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등장에 당황하기도 전, 웨인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박살이 난 줄만 알았던 심장은 곧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기세로 쿵쿵 뛴다. 익숙한 감정에 웨인은 몸서리를 쳤다. 그 감정의 이름은 두려움, 혹은 공포였다.

우물쭈물거리는 하인 뒤로 한 남자가 서 있다. 피비린내를 풍길 것만 같은 붉은 눈동자와 별 한 점 없는 밤하늘 같은 새카만 머리칼. 그의 거대한 몸 주변을 둘러싼 분노의 기운은 웨인 뿐만이 아니라 그 앞의 하인까지 바들바들 떨게 만들었다.



"나와라."



그의 낮게 내리깔은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방 안에 울렸다. 그가 움켜쥔 문 손잡이는 숯이 뭍은 것마냥 새카맣게 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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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1-15 23:50 | 조회 : 4,309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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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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