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 CHAPTER 1 ] -( 3 )
Black Blood in Veins : 혈관 속엔 검은 피





먹이를 물어뜯을 듯한 눈빛을 한 새카만 퓨마를 앞두고 감히 대적할만한 사슴이 있을까. 포식자의 날카로운 눈빛과 여유로운 미소는 먹잇감으로 하여금 공포의 나락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안타깝게도, 웨인이 딱 그 상황이었다.



"지금 악마인 내게 천사들의 규율에 따라 정해진 도덕성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이냐?"

"흐윽....."

"이래서는 고귀한 모습으로 늘 현명하며 지혜로운 결정만 내린다는 천사도 별것 없구나. 머리 굴리는 꼴을 보면 답이 나오지."

"사, 살려주세요.... 흡, 흐윽...."

"고귀하다더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노릇이군."



후들거리는 웨인의 다리는 결국 공포의 무게를 버티지 못했다. '털썩-' 하며 웨인의 엉덩이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경련하는 눈동자, 역할을 잃은 다리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왼쪽 뺨을 감싼 두 손. 그 모습을 바라본 대공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폭력으로 압제할 필요도 없다. 정신력이 얼마나 나약한지, 저 조그마한 천사는 입 밖으로 내뱉은 몇 마디에도 사지를 벌벌 떨고 있었다. 아마 손찌검 한번 당해본 적 없을 것이다. 천계에서는 그래도 지체 높은 귀족 가문의 자제였던 아이다. 수족을 대신할 시종들을 곁에 두고, 구정물 한방울조차 묻히지 않은 손은 굳은살 없이 멀끔하겠지. 그래서인가, 얻어맞은 아이의 표정은 꽤 볼만했다. 자신이 맞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빛, 믿기지 않는다는 눈동자. 그것이 건방지며 방자하기 짝이 없다.

대공은 웨인의 뺨을 내려쳤던 자신의 손바닥을 힐끔 보았다. 움직이는 손가락은 멀쩡했다. 왜인지 모를 저릿한 느낌의 원인은 손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대공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흐윽, 흑..."

"천사들 사이에서 유년기를 보냈으니, 그럴만도 해. 자신들이 하늘의 축복을 받은 고귀한 존재라고 그렇게 인식해 왔겠지. 내가 미처 생각치 못했구나."



대공은 이제와서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웨인의 젖은 눈동자가 대공의 것과 문득 마주했다. 시선이 닿자마자 파드득 떨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그는 아직도 정신을 옥죄는 공포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 네가 바닥을 디디고 선 이 곳은 더 이상 네 편이 가득한 천계가 아니란다. 내 땅에 발을 들였으면, 당연히 우리의 법을 따라야지."

"그, 그게.... 흑, 무슨..."

"아직 이해를 못한 것 같구나. 내가 몸소 알려주도록 하지. 마계에서 너의 위치는 어떠한지, 또 네가 구차하게나마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으.... 흐, 흐흑, 흡.... 사, 살려주...."

"무릎을 꿇어라."

"흐읍....."

"두말하게 하지 마. 어서 무릎을 꿇어."



그가 웨인의 드러난 흰 다리를 발로 툭툭 찼다. 금술이 달린 슬리퍼는 북슬한 털이 달린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했는데 차인 다리는 생각 이상으로 쓰라렸다. 동물 가죽은 무슨, 채찍으로 맞은 것만 같았다. 웨인은 겨우 멍한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떨리는 시선으로 위를 올려다 보았지만 촛불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 그의 얼굴은 흐릿하기만 했다. 번뜩이는 붉은 안광만이 어렴풋이 보였다.



"남자의 것을 입으로 받아낸 적이 있나."

"......"



대공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웨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웨인은 미약하게나마 대공의 입에서 나올 그의 다음 말을 경계하고 있었다.



"처음인게 당연한 건가."



대공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영문을 모르는 웨인만 두려움에 휩싸였다. 무슨 일이 닥칠지 몰라 신경은 불안감으로 뒤집어졌다.

도망, 도망가야 한다. 본능이 갑작스럽게 웨인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본능은 그가 웨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위험한 남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비웃는 듯한 입꼬리 위의 새빨간 눈동자가 웨인을 똑바로 직시했다. 포식자의 눈동자, 입가에 피칠을 한 맹수의 눈동자. 대공이 풍기던 냄새는 더 이상 어둡고 질척한 수준이 아니었다. 소름끼치는 움직임으로 살갗을 타고 기어올라가 콧속을 파고드는 듯한 느낌. 목을 틀어쥔 채 귓속에 숨어들어 사악한 단어를 속삭이는 귀신의 갈라진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웨인은 몸서리를 치며 몸을 뒤로 뺐다. 꿇었던 무릎이 들리며 바닥에서 떨어졌다. 흩트러진 자세가 대공의 신경을 긁었는지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윽, 으으.... 싫어.... 싫..."

"닥치고 이리로 와."



엉덩이를 뒤로 내빼며 뒷걸음질 치는 웨인의 모습에 대공은 험악스럽게 말을 짓씹었다. 허나, 과격한 욕설이 오히려 웨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공포가 점령한 몸은 더 이상 웨인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대공이 더한 압박을 가할 수록 본능은 웨인에게 숨 넘어갈 듯 외치고 있었다. 피하라고, 당장에 도망치라고,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하....."



대공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저 겁을 먹게 하여 순순히 제 말을 따르게 할 요량으로 마력 파장을 조금 보인 것 뿐이었다. 아무리 성인식 전의 어린 천사라도 그깟 소량의 파동에 상해를 입었을 리 없다. 하지만, 약간의 두려움과 경외심이 비칠 줄만 알았던 얼굴은 귀신이라도 본듯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웨인은 그대로 나자빠진 몸을 뒤집어 기어갔다. 휘느른한 가녀린 다리는 힘을 잃어, 손이 주도하는 대로 질질 끌려가는 수준이었다. 그 꼴은 차마 도망가는 거라고 할 수도 없었다. 대공은 눈을 굴리며 혀를 찼다.



"미련한 것."



대공이 마력 파장을 잠재우자, 발작하듯 앞으로 나아가던 웨인의 몸이 멈췄다. 간신히 몸을 지탱하던 팔뚝에 힘이 빠지며 웨인의 몸이 스러졌다.



"헉.... 허억... 흑, 끄윽...."



할딱거리는 숨을 잠재우려던 찰나에, 웨인의 머리채가 잡혔다. 땀에 젖은 은빛 머리칼을 손에 쥔 대공이 입을 열었다.



"도망은 이게 끝이야?"

"헉, 허흑...."

"허무하군. 더 보여줄 것은 없는건가."

"아악-!"



대공의 손짓에 따라 웨인의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에게 붙잡힌 채 웨인은 침대가 있는 곳으로 다시 질질 끌려갔다. 웨인은 소리를 지르며 악을 쓰다가도, 소용은 없고 제 목만 아플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는지 그저 숨을 죽이고 눈물만 주룩주룩 쏟아냈다. 웨인의 입가에선 비명이 되지 못한 새된 신음소리가 미약하게 흘러나왔다.



"아.... 아흐으...."



대공은 웨인을 들어 침대 위로 내팽겨쳤다. 그를 다시 침대에 눕히기까지 이리 많은 시간이 걸릴 줄은 몰랐다. 반항하며 도망쳤던 이가 웨인이 아니였다면 이미 머리통이 터지고 난 후였을 것이다.



'머리를 박살내다니, 그럴 수는 없지.'

'그리 쉽게 죽여서는 안돼.'



대공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침대 위로 엎어진 웨인의 상체를 휙 돌렸다.



"허....."



다시 한번 뒤통수를 후드려 맞는 느낌에 대공의 입에서는 허망한 신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조그마한 몸으로 발악하며 자신을 거부하던 건방진 천사는 눈을 까뒤집고 누워있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는 당장이라도 꺼질 듯 위태롭다. 몸은 얕게 경련하는 듯 하더니, 이내 꿈쩍도 하지 않는다. 기절한 몸뚱이를 앞에 둔 대공의 입에서는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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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0-26 00:22 | 조회 : 4,986 목록
작가의 말
새벽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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