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 CHAPTER 1 ] -( 2 )
Black Blood in Veins : 혈관 속엔 검은 피





지상에서 20층 아래의 지하감옥은 어찌나 어두웠는지 모른다. 어디서 흐르는 지도 모를 물이 '똑- 똑-' 규칙성 없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음습하고 싸늘한 기운은 어깨를 움츠리게 했다. 웨인은 양쪽 무릎을 그러안고는 몸을 작은 덩어리로 웅크렸다. 차가운 금속 바닥에 맞닿는 발바닥은 땀에 젖어 축축했다. 감옥 복도 끝에서 나는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콜록, 콜록..."



아까 발악을 하며 비명을 지른 탓에 목구멍은 껄끄러웠다. 침을 삼켜도 나아지기는 커녕 칼칼한 불편함을 더해줄 뿐이었다. 웨인은 조용히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아직 지하의 퀴퀴한 냄새가 배지 않은 옷에서는 엊저녁에 마셨던 캐모마일 찻물의 향기가 났다. 그리움과 서글픔에 멎은 줄만 알았던 눈물이 다시금 맺혔다. 그렁그렁하니 툭 건드리면 폭포처럼 와르르 쏟아질 것이 분명했다.

마계의 지하감옥은 천계의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컴컴한 것은 물론이며 음산하고 눅눅했다. 벽에는 죄를 저지른 자의 갱생과 신앙심의 부활을 위한 십자가 하나 붙어있지 않았다. 아니, 붙어있었더라도 어둠 속에서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웨인은 고립된 암흑 속에서 조심스레 두 손을 모았다. 넘치는 것을 막지 못한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웨인의 지하감옥에서의 첫 번째 밤이 지나갔다. 웨인이 감옥에서 나온 것은 다음날 저녁이었다. 이틀만에 보는 석양은, 그 빛은 또 어찌나 밝고 아름다웠던지, 두 눈을 뜨고도 눈물이 앞을 가려 제대로 바라볼 수도 없었다.





* * * * *





지하감옥에서 웨인을 꺼내준 검은 로브의 남자들이 웨인을 데려간 곳은 욕실이었다. 그들은 다리에 힘이 풀린 웨인을 번쩍 안아올려 목욕간의 욕조 가장자리에 앉혔다. 워낙에 말랐지만, 전날 먹은 것이 없어 솜털처럼 가벼운 몸이었기에 웨인을 들어올렸던 남자는 조금 놀란 듯한 눈치를 보였다.

레몬밤 향이 나는 뜨거운 물 속에서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마친 웨인은 미리 준비된 타월로 몸을 닦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신이 반쯤 나가있었는지도 모른다. 목욕을 하고 시중을 받으며 그저 내내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내 시녀들이 한 쪽에서 내오는 흰 옷을 본 순간, 웨인은 몸을 흠칫 떨며 뒷걸음질을 쳤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던 이유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분명히 어제 아침에 다했을 운명이 왜 굳이 저를 지금까지 꾸역꾸역 숨쉬게 만드는 지를.



'진짜로 천사를 안으시겠다 하셨어? 내가 살다살다 별일을 다보겠네... 어떻게 천사와...'

'어제 그것을 살려두실 때부터 이상하다고 느끼기는 했어. 데이비드 도련님의 목숨을 앗아간 간사한 종족의 자식을 살려준데다 침실에까지 들이시겠다니.'

'그러니까...'

'대공께서 다 생각이 있으신게지. 우린 그저 우리 할 일만 하자고.'



아까 목욕 시중을 받던 중, 시녀들이 소곤소곤 떠들던 이야기가 기억났다. 시중을 받을 적엔 정신이 온전치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내뱉은 단어는 정리되지 않은 채로 머릿속을 지나갔었다. 하지만, 제정신이 돌아온 지금 곱씹은 그들의 대화는 뒤통수를 강타하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대공'

'그의 침실로 들어간다.'



이제야 머리에 입력된 정보는 시끄러운 위험 경보를 울렸고, 웨인의 사고는 정지했다.





* * * *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시녀들이 가지고 온 흰 옷을 입은 채로 거울 앞에 서 있는 상태였다. 웨인은 거울 앞의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물 콧물 먼지 범벅이었던 얼굴은 씻겨내려가고, 흰 피부는 뽀송하며, 은빛 머리칼은 윤기있게 찰랑거린다. 빛을 담은 호수같던 푸른 눈동자만이 초점을 잃고 어두침침하다. 옷은 하의가 없는 하늘하늘한 원피스 차림이었다. 여기 저기에 리본을 매기 위한 끈이 잔뜩 달려, 마치 무감각한 인형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으으...."

"곧 대공께서 오실 것입니다."



웨인이 도통 적응이 되질 않는 자신의 모습에 겁을 먹고 입술을 짓씹는 동안, 주름살 가득한 늙은 시녀장이 말을 꺼냈다. 주위에 있던 시녀들은 넓은 방 안에 향을 피우고, 은촛대 위의 초에 불을 붙이며 이상야릇한 분위기를 조성시켰다.



"엊그제 대공의 밤을 모셨던 아이는 다음날 아침 양 손목이 잘린 채로 실려갔습니다. 다듬지 않은 날카로운 손톱으로 대공의 등에 생채기를 냈기 때문이지요."

"....."

"또, 어젯밤 대공을 모셨던 여인은 앞니 두 개가 뽑힌 채로 침실 밖으로 내쫓겼습니다. 대공의 양물을 물고 감히 이를 세웠기 때문이었습니다."

"흐으....."



시녀장이 감정없는 표정으로 내뱉는 말은 일종의 경고이자 충고였다. 물론 성적인 경험에 무지한 웨인은 그것이 경고라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사시나무 떨듯 전율하는 제 몸을 감싸안은 웨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시녀장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대공께선 반항을 싫어하십니다."

"흐윽......"

"해줄 말은 이것밖에 없군요. 뭐, 귀담아 들을 정신도 없는 것 같고..."



시녀장의 싸늘한 말투에 웨인의 몸이 더욱 떨렸다. 분명 향을 피우고 난로를 때운 방안이 추울리는 만무했지만, 공포 그 자체로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시녀장이 짙은 회색빛 천으로 만들어진 휘장을 걷었다. 휘장 사이로는 검붉은 시트와 같은 색의 담요가 덮인 침대가 드러난다. 피를 흘려도 티가 나지 않을 것만 같은 핏빛의 침구. 웨인은 꺼림직한 느낌을 떨치지 못한 채 시녀장의 지시에 따라 침대 위로 올라갔다. 침대 곁에는 깊은 악마의 냄새가 가득 묻어있었다. 마계에서 가장 강한 능력을 가진 악마의 침대이기 때문이었을까, 본능을 자극하는 위험하고 질척거리는 향이 콧속을 파고들었다. 아마, 향에 어울리는 색을 고르라 하면, 웨인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검을 색을 택했을 것이다. 빛이라고는 눈 치켜뜨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캄캄한 색깔을.



"대공께서 침실로 드십니다."



시녀장이 웨인도 들릴 정도로 목소리 톤을 올려 말했다. 웨인은 괜히 가슴 부근이 파인 옷자락을 추슬렀다. 손 끝은 차가워지는 것만 같았다.



'저벅- 저벅- 저벅-'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고 대공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빗어넘긴 새카만 머리칼에, 슬리퍼와 붉은 가운 차림이었다. 그가 신은 것은 맹수의 털로 덮인 슬리퍼가 분명했지만,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는 마치 구두의 굽같이 느껴졌다. 웨인은 그 발소리를 들을 때마다 오한에 몸을 시종 떨어댔다.



"향을 피웠나?"

"예. 혹시 몰라서..."



시녀장이 고개를 푹 숙이며 답한다.



"쓸데 없는 짓을 했군."



대공은 탁자에 놓인 은주전자를 들고는 그대로 향로에 물을 부었다. '푸시식-' 하는 소리와 함께 향의 불빛과 연기가 꺼져들어갔다. 방안을 가득 채우던 연기가 점차 걷히자, 아른거렸던 정신이 돌아오는 듯 했다. 숨을 터질 듯 조이던 답답한 공기의 압력이 힘을 잃고 사그라든다. 튀어나올 듯 팔딱팔딱 뛰던 심장도 조금은 잦아들었다.



"물러가라."

"예."



시녀장이 나가고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순식간에 싸늘한 정적이 맴돌았다. 대공이 침대 가까이로 다가왔다. 방금 전과는 달리 슬리퍼를 신은 걸음에서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웨인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등에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천계의 휘트리 가문 자제라고 했던가."



웨인은 입을 열어 그렇다고 대답하려다가 말았다. 긴장에 성대가 굳어서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쉰소리가 혹이라도 그의 신경에 거슬릴까 두려웠다. 입을 열어 대답하는 대신, 웨인은 제 머리를 여러차례 끄덕였다.



"네가 해야 할 역할은 잘 알고 있겠지."



웨인이 움찔거리며 몸을 사렸다. 흰 옷자락을 움켜쥔 손바닥은 땀에 젖어 축축했다.



"벗어라."

"......."



대공의 음성은 지하 바닥을 내리칠 듯이 낮고 깊었다. 그저 목소리였을 뿐인데, 당장이라도 웨인의 옷을 벗기고, 살갖을 벌려, 뼛속 깊이 파고들어갈 것만 같았다. 웨인은 최대한 눈을 피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그.... 저, 저..."



목소리는 떨려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몸은 주체를 할 수 없었다. 당장 굳어가는 뇌의 명령을 따라주는 기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온몸에 족쇄가 채워진 벙어리가 된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 어떤 것을 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것을 알기에 웨인은 제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뭐냐. 말을 해."

"저, 저는.... 저는 여자가 아니, 아닙니다...."



주체를 못하고 떨리는 성대가 무거운 말을 내뱉었다. 목구멍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알고 있다.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웨인은 이제까지 그가 자신을 여자아이로 착각하고 있는 줄만 알았다. 제 성별을 솔직하게 밝히면 자신을 속였다며, 또는 불쾌하게 만들었다며 화를 내거나 폭력을 휘두를 것이 걱정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다. 웨인은 입을 열어 답하려다가 수도없이 주저하고 망설였다. 머뭇거리는 입은 정확한 말을 내뱉지 못한 채로 뻐끔거리기만 했다. 착각이 아니다. 그럼 그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멍청한 것."

"아....."

"나를 인질로 넘어온 놈의 성별도 모르는 반편이로 보는 것이냐?"

"그, 그럼 대체 왜....."



대공의 한쪽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가 여실히 대답을 해줄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대공은 웨인더러 계속 말해보라는 둥 고개를 까딱였다. 웨인은 속으로 그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성별을 솔직히 말했는데도 그는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웨인은 제가 설득만 잘 한다면 그가 귀담아 들어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어제 아침 지하에서 제 목숨을 한 번 살려줬던 은인이 아니었던가.



"저는... 저는 남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 대공의 밤.... 을 모실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지만, 죄송합..."

"왜지?"

".... 예?"

"왜 모실 수 없다는 거냐."




웨인의 사고는 다시 한 번 정지했다가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아아, 천계 신학교에 있을 적에 들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악마들의 비역질' 이라고 했던가.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키기 위한 숭고한 행위를 육체적 쾌락의 행위로 바꿔버린 악마의 사고방식도 어린 천사들을 놀라게했지만, 그들을 경악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비역질'이었다. 여자와 동성의 여자의 사랑, 남자와 동성의 남자의 사랑. 천계에서는 꿈도 못 꿀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하지만 마계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했었다. 왜 그걸 떠올리지 못했던 것인가, 웨인은 새하얗게 비어가는 머리를 뒤흔들었다.



"그, 그건 아, 안됩니다...."

"..... 계속해봐."

"비, 비역질 이니까....."



웨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입 안이 바싹 말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와..... 같은 성별의 남자가 과, 관계...를 가지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짜악-'



웨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살이 떨리는 둔탁한 소리가 긴장 가득한 분위기를 깼다. 웨인은 제 고개가 오른쪽으로 한껏 돌아갔음을 느꼈다. 다리는 몸을 지탱하기 버거워하며 후들거렸다. 쓰러지지 않은 것이 용했다. 고통은 뒤늦게 찾아왔다. 왼쪽 뺨에 살갖이 찢어질 듯한 욱신거림이 느껴졌다. 놀란 심장은 팔딱거리며 뛰었다. 아니, 덜컹거렸다는 표현이 더 맞을 지도 모르겠다.



"아.... 아흑..."

"계속해봐."

"윽.... 흐윽..... 으으...."

"계속하라니까?"



웨인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크게 한대 얻어맞고도 아직 상황 판단을 마치지 못했는지, 눈동자는 심하게 떨며 방황한다. 방황하는 눈동자가 대공의 것과 마주쳤다. 웨인은 그가 격노한 줄만 알았다. 하지만 마주친 것은 분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눈동자. 그의 눈동자는 마치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이 관전하고 있었다.



"흐으....."



그의 붉은 눈동자에서 핏빛 안광이 번뜩였다. 오금을 저릿하게 만드는 그의 눈은 웨인을 가소롭다는 듯이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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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10-16 03:42 | 조회 : 5,008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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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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