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본론을 까먹고 침묵을 유지하는 방법 feat. 데자크

혼란스럽다.

그래, 그들의 심정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어휘는 없을 것이다. 루카르엠은 이 마계에서 가장 연장자였다. 오래 산 그로써 보고 들어왔던 모든 민망한 것들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만큼 당황스러울까. 의문을 모르겠다는 그의 표정에 데르온은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는 꽤나 도덕적인 성품을 지닌 마족으로, 루카르엠이라는 작자가 제 애를 밴 여성 마족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는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설령 모성애가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데르온은 가끔씩 저를 몹시 곤란하게 한단 말이죠. 사실 저도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모릅니다. 당사자에게 이야기나 들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루카르엠은 생긋 웃으며 자신의 부스스한 흑발을 정리했다. 곧 그는 정원용 앞치마를 벗어 고이 개켜두고는, 데르온과 데자크를 양쪽에 둔 채로 공간이동을 시전했다. 그의 마법 실력에 평소라면 찬사를 내뱉었을 데자크나 데르온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때가 좋지 못했다. 어떻게 해서든 제대로 된 설명을 들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겨우 납득할 정도인데, 지금 어찌 태연스레 행동할까.



"여기네요. 역시, 리테의 성은 언제 보아도 참 세련된 듯 합니다."



경쾌한 어조로 루카르엠이 말하자 데자크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는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런 그의 떨떠름한 동의에 루카르엠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주인의 허락을 맡는 절차도 싹싹 무시하고서 그녀의 침소로 곧장 향했다.

벌컥

실로 예의없는 행동이다. 수면 상태의 상대를 일부러 깨우려 하다니. 갑자기 새어들어온 불빛에 놀란 리테가 평소보다 더욱 경계심을 보이며 신경을 곤두세우고서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은, 당당한 자태로 그녀의 방에 침입한 공작들이었다. 그에 그녀는 피식 실소하며 나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뭡니까, 루카... 자크도 왠일이예요... 허락도 받지 않고 무단으로 침입하다니... 새삼 놀랍지도 않네요."



이미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그녀다. 적이 아니라는 것만이 그녀를 안심시키는 중이었다. 이왕 잠이 완전히 깨버린 거, 그녀는 숄을 여미고 기다시피 하여 간신히 탁자앞에 앉았다. 탁자에는 둘둘 말린 양피지가 놓여있었는데, 그녀는 익숙하게 양피지를 바르게 펴 놓고 잉크를 찍은 깃펜으로 양피지의 하단을 마무리짓듯 서명했다.



"마침 잘 왔어요. 이걸, 전해줬음 했는데."



루카르엠은 예상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오묘한 눈으로 리테르비를 응시했다. 그의 시선을 받아내며, 리테르비는 마력으로 양피지를 데르온의 앞까지 운반했다. 데르온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양피지에 손을 대려했으나, 강력한 마력이 곧 그를 방해했다. 압도적일 정도로 위험한 마력이 넘실대며 양피지를 통째로 삼켰다.

화르륵

밝은 빛을 내며 타오른 양피지는 검은재를 남기고 공중에서 그대로 사라져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얼굴을 찌푸린 리테르비는 개입한 마력을 찾다가, 그것이 전혀 의외의 인물, 루카르엠에게서 비롯된 것을 알아보고서 표정을 살짝 굳혔다.



"... 뭐예요. 의도적으로 방해한 거 아닌가요, 루카? 마력운용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하다뇨. 당신이 마음만 먹었더라면 마력흔적을 마왕도 알아채지 못할 텐데."


"예. 일부러 한 것, 맞습니다."



리테르비는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루카르엠을 쏘아봤다.



"취지가 뭐지요?"



루카르엠은 늘 그렇듯 장난스럽고 짜증나는 표정으로 웃었다. 그의 비아냥거리는 말투, 일일히 시험해대는 행동들, 묘한 계획이 숨겨져있을법한 행위들은 늘 리테르비와 마족들을 경계하게 했다.



"글쎄요, 나는 사실 이번 일을 리테가 꼬옥 좀 맡아줬음 해서 말예요."



조금 놀란 듯, 짙은 적색의 동공은 지진이 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루카르엠은 본디 상대의 선택을 존중하여, 그의 결정대로 따르며 괴롭히는 쪽을 즐겼다. 그가 이렇게 반대를 하며 노골적인 방해를 하는 것은 처음이라는 소리이다.

이건 또 무슨 시험일까. 일종의 함정인 건가?

의미심장한 태도에 놀란 것은 리테르비 뿐만이 아닌, 데자크도 마찬가지였다. 의도적으로 공작 자리에서 물러나려 한 리테르비의 태도나, 낯설 정도로 반대하는 루카르엠의 태도. 둘 다 그에게는 너무나도 생소한 것이었다. 그래서 리테르비는 데자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라면 도와줄 것이라, 그리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미처 간과하지 못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



데자크는, 루카르엠의 사람이었다.
방안에는 고요한 침묵만이 나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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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10-02 23:03 | 조회 : 1,783 목록
작가의 말
씨시 매그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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