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순풍보다는 강풍으로


보통 예체능 계열로 뛰어든 친구들은 야자를 하지않는다. 야자를 할 시간에 학원 하나라도 더 가서 기술을 배우고 실력을 키우는데 집중해야 되기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예체능 계열이니 야자보다는 학원을 가야하는게 맞지만 놀랍게도 나는 열시가 되어가는 늦은 밤까지 학교에 앉아 발성 이론책을 보고있었다.

하루 24시간, 절반 이상을 학교에서 보내는 건 정말, 매우, 아주 힘든일이다. 가끔 진짜 피곤할때는 야자고 뭐고 때려치우고 싶은데 그럴 수 없었다.

성실하게 학교다니기. 어머니와 했던 약속중 하나였다.

수 많은 약속을 하고 대화를 나웠던 것 같은데 서로 눈물을 흘리느라 정신없어 기억나는게 몇개 되지 않았다.

그래서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건 최대한으로 지키고 싶었다.

지긋지긋한 야자가 끝이나면 곧장 보컬 학원으로 달려가 한시간 반에서 많게는 두시간동안 발성이론과 창법을 배우고 익힌다.

학원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열두시가 넘어있고 여울이나 아버지와 마주할 시간이 적었다.

가족들과 사이좋게 지내라는 약속도 있었는데 그건 잘 하고 있는지 감이 서지않았다.

좋은 형이 되려 노력은 하고 있는데 여울이는 꽤나 개인적인 놈이었고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척척 해내고 가끔 밤 늦게 들어오고...


쓰읍... 언제 한번 진짜 혼내야되는데.


평일에는 여울이와 마주하는 시간이 적다보니 여울이가 잘못을 해도 단호히 꾸짓지 못하고 간단하게 경고만 하고 넘어가기 일수였다.

저번에는 나보다 늦게 들어온적도 있으니... 이놈의 자식을 콱 그냥.

야자가 끝나기 오분 전이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멍때리고 있었다.



"고요한, 오늘도 학원?"



책상에 턱을 괴고 멍하니 칠판만 보고 있는데 최현우가 말을 걸어왔다.



"엉."



여전히 시선을 칠판에 둔채 간단히 대답했다. 뭔가 칠판에 블랙홀이라도 있는건가 눈을 땔 수가 없네.



"...너 괜찮냐? 피곤해 보이는데?"



"엉... 괜찮아. 그냥 좀 멍한것 뿐."



"...조금이 아닌데?"



점점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피곤한데 진짜 괜찮다.



"왜, 걱정되냐?"



장난스레 웃으며 되문자 최현우 눈이 가늘어 지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쯧."



"...? 야, 그거 무슨 뜻이냐? 쯧? 그게 왜 나와?"



"됐고. 무리나 하지마."



"에. 무리 안하고 있는데."



최현우가 보기엔 그렇지 않은지 녀석은 떫은 얼굴을 하고서 가방을 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아서 해. 대신 뭐든 말하고 싶은거 있으면 꼭 말하고."



뭔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또 내 얼굴은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던 걸까? 연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최현우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내가 얼굴로 뭐라고 말하고 있냐? 힘들대?



"뭘봐? 종쳤는데 안 일어나냐?"



기대했던 것과 다른 말을 하며 꼽주는 최현우를 보며 미소를 지어보았다. 그래, 최현우가 그럼 그렇지.



"나는 너보다 시현 형을 좋아해."



"뭐래 미친놈이."



응, 그러니까 시현 형은 너처럼 츤데레가 아니라 정말 다정한 사람이니까 이렇게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뭐라하지는 않았겠지!!

뭐가 불만인지 연신 뾰족한 눈을 하고있는 최현우를 따라 일어났다. 어휴, 오늘은 뭔가 따질 기력도 없네.

개학한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는지 앞날이 캄캄하네.

앞서걷는 최현우를 따라 뒷문으로 나갔다. 어두컴컴한 여름의 밤은 후덥한 바람을 몰고왔다.



"아. 언제 추워지냐."



더운것과 추운것 중에 굳이 선택하라면 추운쪽을 선호한다. 더운 바람은 참을 수 없어도 차가운 바람은 견딜 수 있다.

후끈하게 몰아치는 더운 바람이 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으윽... 더위라도 먹은건가?



"고요한."



무뚝뚝하고 낮은 목소리가 느닷없이 들려왔다. 누군지 알것 같은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예상한 의외의 인물이 서있었다.



"우효준?"



"잠시 얘기 좀 하자."



"...어... 뭐, 그래."



앞서 나간 최현우에게 먼저 가라는 말을 하려 몸을 돌리자 언제부터였는지 가만히 서있는 최현우와 눈이 마주쳤다.

하나둘씩 꺼진 불빛때문일까 어쩐지 말을 걸기 어렵다는 느낌이 들정도로 최현우의 얼굴은 어두워보였다.



"최현우, 나 잠시 얘기 좀 하다 갈게. 먼저 가."



"...그래."



왠지 혼자 보내면 안되는 사람을 혼자 보내는 기분이랄까? 오늘따라 유독 혼자 걷는 최현우가 쓸쓸하게 보였다.

어... 요즘 유지원 생각하느라 최현우를 신경 못쓰고 있는건 맞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니 주변을 돌아보는게 느려지고 있었다. 여울이도 최현우도 누구도 재촉하지 않는데 혼자 조급해하기도 했다.



"정신차려야 하는데..."



일단은 눈앞에 있는 것들부터 정리하자는 마음으로 문에 기대 서서 기다리고 있는 우효준 앞에 섰다.

유려해보이는 유지원과 반대로 우효준의 인상은 굉장히 사납고 단단했다. 몇번 마주하긴했지만 이렇게 단 둘이 있는건 처음이라 조금 어색했다.



"이거 때문인가?"



"응? 뭐가?"



나만 어색한지 우효준은 다른 곳을 쳐다보며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우효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막 복도를 돌아 서는 최현우가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일단 널 돕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도와주려고."



...뭘 돕는데? 얘는 또 갑자기 와서는 딴소리래?



"아까부터 뭔소리야?"



"고요한, 잘 들어둬. 유지원이 위협적인 행동을 한다싶으면 그대로 도망쳐. 네 성격 알아서 더 하는 말이야. 정면으로 마주하지 말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



"...그게 무슨 말이야? 뭘 도망쳐? 유지원이 뭐 한대?''''



"한다기보다 할 것 같아서 하는 소리야."



"그러니까 뭘?"



"그건 아직 모르지. 어쨌거나 내 말 새겨들어. 이전에 고생한걸 생각해서라도. 그럼."



제 할 말만 하고 미련없이 가버리는 우효준을 멍하니 쳐다봤다.

시부야의 총잡이처럼 비장하게 걸어가는 우효준을 부르기도 뭐하고 불러서 무슨 말인지 물어보기에는 시간이 늦어지고 있었다.

유지원 친구라서인가 우효준도 이상한 녀석이었다.

이전에 고생한걸 생각해서라도 유지원에게서 도망치라는 말 같은데, 왜? 걔 요즘 잠잠하던데.

딱히 위협적이게 굴거나 귀찮게 굴지 않았다. 오히려 전과 180도 달라져서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대해서 얼마나 부담스럽고 간질거리는데...



"미쳤네 고요한. 뭔 생각을 하는거야."



오늘치 유지원 생각은 이쯤하고 실없이 서있던 몸을 움직였다.

이상하긴 하지만 일단 우효준은 유지원의 얼마 되지 않는 최측근이다. 뭘 경고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잊기에는 뭔가 찝찝해 기억해두기로 했다.

도망치는게 뭐 별거라고.



"...이게 뭐..?"



라고 방금 막 우효준이 한 말을 유념하자고 생각하며 학교를 나오자마자 기가막힌 광경과 마주하게됐다.

드라마에서 자주 봤던 검은색 고급 세단 옆으로 그림같이 유지원이 서있다.



"왔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채 자연스레 왔냐는 인사를 건내는 유지원의 모습과 무수한 무언가와 겹쳐보여 잠깐 눈앞이 아찔했다.

그러니까 뭔가 이런 상황은 그 순정만화에서 봤던, 드라마에서 봤던, 영화나 소설에서 자주 나왔던 돈 많은 남주가 하던 그 클리세...?



"뭐, 뭐하냐?"



설마 타라는 말을 할까 싶어 두어걸음 뒤로 물러나자 유지원이 더욱 입꼬리를 당겨 화사한 미소를 짓더니 차 문을 열었다.



"타."



"싫어."



"..."



"..."



너무 빠른 거절이었을까 유지원의 번쩍거리는 미소가 잠시 움찔거렸다.



"학원 가야하잖아. 태워줄게."



다시금 활짝 웃으며 타라는 손짓까지 하는 유지원을 보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한걸음 더 뒤로 물어났다. 죽어도 싫어. 이건 너무 오글거리잖아.



"걸어가도 충분하니까 사양할게."



"요한아... 나는 억지로 태우기 싫었어."



왜 과거형으로 말하는데? 라는 의문에 답은 곧 두걸음만에 거리를 좁혀 온 유지원에게 잡히고서야 알게되었다.



"자, 잠깐! 야, 싫어! 이게 뭐야! X나 오글거리게!!"



"응,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아니!! 사람이 말을 하면 좀, 윽."



어떻게든 타지 않으려는 발버둥은 유지원에게 질질끌려가 차에 밀어넣어지고서야 멈출 수 있었다.

밖에서 봐도 고급스러운 차의 내부역시 닿으면 흠집날까 무서울정도로 깔끔하고 반짝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상황파악을 하기전에 우효준이 했던 말이 머리속에서 경보처럼 울려댔다.

'도망쳐.'

도망치자!

유지원이 타기전에 반대편 문으로 내리려 차 손잡이를 당겼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 이게 왜 안 열려?



"출발해주세요."



탁, 하고 닫히는 차 문소리가 등뒤에서 나자 스릴러 공포영화속에 던져진 주인공이 된것 같았다.

어디선가 바이올린 갈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고 등 뒤로 어마무시한 존재감을 내뿜은 유지원때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그러니까, 우효준이 조심하라는건 이런건가...?



"유, 유지원. 갑자기 왜 이런 짓, 아니, 왜 이러는거야?"



그래도 기사님도 있으니 유지원이 무슨 짓을 하지는 못하리라 생각하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물었다.



"잠시라도 둘만 있으려고."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얼굴이 들고 있기 부끄러운 정도로 직설적인 것이었다.
진짜! 저 놈은 어떻게 한치 부끄러움도 없이 당당할 수 있냐고!

기사님 눈치라고는 조금도 보고있지 않는 유지원 대신해 백미러로 기사님의 눈치를 살폈다.

기사님은 유지원이 뭐라고 하는지 듣지 못한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서 앞만 보고 운전을 하셨다.

다 들으셨겠지? 들으시고도 모르는 척 하는거겠지?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뿐이다. 최대한 유지원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오지 않게 녀석의 장단에 맞춰주는 것.

하아- 내려서 보자, 진짜.

2
이번 화 신고 2020-08-12 03:36 | 조회 : 1,251 목록
작가의 말
gena

밀어 붙여 지원아.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