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잔잔한 일상

계속 손을 잡고있는게 어색해서 손을 놓으려하자 유지원이 더욱 손을 움켜잡았다.

아프진 않지만 저렇게 빤히 쳐다보면 심장에 안좋은데...



"뭐, 왜?"



"친해지는건 좋은데 우리 친구 못해. 알지?"



"치, 친구부터 시작하자고. 뭐가 그렇게 급한데..."



이미 서로 좋아하는거 다 티내고, 알고있는 상황에서 이런말 하는게 웃기다는거 알지만 그래도 천천히 가고싶다.

최현우와 가족말고 누군가를 이렇게 신경쓰게 오랜만이기도하고, 유지원을 좋아한다는 말을 입밖으로 꺼낼만큼 용기가 있는 단계도 아니었다. 아직.

내 대답이 불만족스러운지 눈을 가늘게 뜨고 빤히 쳐다보는 유지원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손을 당겼다.



"천천히 하자고."



"시간 없다며."



시간. 전에 전명준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는지 유지원은 집요하게 대답을 요구했다.

맞아. 시간은 많지 않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까지 이제 일년 사개월, 스무살이 되어서도 유지원과의 관계가 이어질거란 보장은 없었다.

애초에 내가 그린 미래에 유지원이라는 존재는 없었으니까. 그래도...



"너한테 시간 낼거니까 걱정하지마 임마."



이렇게 어색함을 무릅쓰고 손을 내밀만큼 신경쓰이는 사람이라고 너. 라는 말은 차마 못하고 애두른 말만 내뱉었다.

그러니까 이제 좀 놔 줄래? 손에서 땀날것 같아.

얼른 손을 놓아 줬으면 싶어서 잡힌 손을 꼼지락거리자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이런 기분 처음인데. 네가 시간을 내준다는게 왜 이렇게 기쁘지?"



어떠한 속셈없이 환하게 웃고잇는 유지원의 얼굴이 예뻐서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몽땅다 잊어버렸다.



"너... 아니다. 어쨌든 이제 놔! 덥다고."



하마터면 너 그렇게 예쁘게 웃을 줄도 아는구나? 라는 어느 순정만화에 나오는 대사를 뱉을뻔 해서인지 조금 거칠게 유지원의 손을 떨쳐냈다.

유지원의 웃는 얼굴때문인지 아니면 오글거리는 생각때문인지 심장이 정신없이 쿵쿵거렸다.

하아. X바, 진짜 시끄럽다 고요한. 이름값 좀 해.



"그럼, 다음 쉬는 시간에 또 보자, 고요한."



연신 웃는 얼굴을 하고서 인사를 건내는 유지원이 어색하기도 하고 다음 시간에 또 보자는 말이 왜 이렇게 기분 좋은지 어이가 없고 허탈해 웃어버렸다.



"하, 하하. 그래. 또 와라. 네 말대로 계속 보자고."



그래, 일단 나도 어디까지 할 수 있다 한번 해보자. 이 감정이 정말 괜찮은지. 두고보자.

또 보자는 말에 계속 보자고 대답했더니 유지원이 또 웃었다. 성격만 아니었으면 진짜 동화속에서 튀어나온 왕자같은 외모인데...

시끄럽게 울리는 심장소리를 무시하고 손인사를 보내는 유지원에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저녀석 얼굴이 좋은건가... 왜 자꾸 웃는 얼굴에 설레냐.



"후우- 겁나 덥네."



8월 끝자락인데 아직 무더위는 가시질 않았다.



-



개학식이 시작되고 이틀이 지나갔다. 여러가지로 큰일도 많았고 신경쓰이는 일도 많았다, 라고 과거형으로 말하면 참 좋을텐데 모든 것이 현재진행형이었다.

학생회를 때려치우겠다고 전명준과 유지원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선생님들께 알린것이 아니라 무효력이었다.

정신없는 개학실날 갑자기 학생회임원들이 찾아왔을때 한번 놀라고 앞줄에 서야된다는 말을 들었을때는 기분 최악이었다.

없는 행패 있는 행패 다 부렸던 것 같은데 이렇게 아무일 없던것이 되어버린게 기묘하고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개학식 첫날이 지나가고 유지원과는 뭔가 평범하게 친해지는 쪽으로 흘러갔다.

쉬는시간마다 그녀석이 찾아오고 밥먹으러 같이 가고, 가끔 밤에 문자하고.

통화는 아직 어색했다. 유지원도 말이 없는 편이고 나도 편하지 않으면 입을 닫는 스타일이라 통화는 잘 하지 않았다.

지난 1학기가 유난이었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굉장히 평범하고 순탄한 하루하루가 흘러가고있었다.



"야, 쟤 또 왔어."



멍하니 천장 어딘가에 시선을 두고 지난 며칠을 돌이켜 보고있는데 최현우가 뒷문을 가르켜 과거회상을 끝내게 만들었다.



"...설마, 또?"



요즘 정말 평범하다. 김진환도 유지원도 유지원 사단도 가만히 있으니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의외의 사람이 요즘들어 귀찮게 굴고있는 것만 빼면.

귀찮은 마음에 삐딱하게 고개만 돌려 뒷문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처음과 다르게 꽤나 예의를 차리고 있는 전명준이 서있었다.

여전히 삐딱한 눈빛이었지만 전보다는 많이 누그러져있었다.



"쟤가 요새 왜저럴까? 사춘기인가?"



슬하에 아둘을 둔 엄마의 대사를 중얼거리자 최현우가 미친놈보는 듯한 눈으로 코웃음을 쳤다.

아니... 우리 여울이도 저렇게 귀찮게 굴지 않으니까 하는 말이지.



"고요한, 내가 1학기때부터 생각했는데. 너 마가 낀것 같아."



"마?"



"어, 남자가 들러붙는 마."




"응, 나도 생각해 봤는데. 너도 마가 낀것 같아. 말 마. 그딴 말 마, 임마!"



"오, 라임보소? 고등랩에 한번 나가보는게 어때?"



키득거리며 농담을 던지는 최현우에게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까지 전명준을 저렇게 세워둘수는 없는 노릇이니.

전명준이 찾아오기 시작한건 정확히 개학식 다음날 부터였다.

처음에는 그날 학생회 파티얘기로 할말이 있어서 그러는건가 싶었는데 막상 만나면 별 시덥지 않은 말을 해댔다.



"모, 몸은 괜찮은거죠?"



이런거.



"저번부터 계속 괜찮은데."



처음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던 것과 정반대로 문앞에서 기다리고, 말을 조심해서 하려했다. 갑자기 왜이러는걸까?



"하, 학생회 회의는 왜 안나오는거에요?"



진짜 왜 이럴까?



"전명준, 너 나 싫어하지?"



"..."



대답하지 않는걸보면 싫어하는건 맞는데... 아, 아니면 말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고마워하는건가? 그때 그 커터칼.



"그렇군. 싫어하는데 고맙기도하고.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찾아오는데 입밖으로 안나오는거지?"



"...그런거 아닌데요."



전명준이 키가 여울이와 비슷해서인지 자꾸 여울이가 겹쳐 보였다. 여울이 머리색은 갈색이고 전명준보다 가는 눈이라 닮은건 아닌데 하는 행동이 많이 비슷했다.

시비거는 용기만있는거, 이렇게 제 감정 솔직하게 말 못하는것도 그렇고.

계속 보니까 우리 여울이 같아서 정이라도 생긴건지 귀여워 보이고..

전명준을 통해 여울이를 생각해서인지 가벼운 웃음이 났다.



"그럼 내가 먼저 사과할게."



"네?"



"그때, 그... 체육관에서 너 때린거 미안했다. 여러가지로 좀 복잡하고, 꿈자리도 뒤숭숭해서 컨디션이 많이 안 좋았었어. 그러다보니까... 미안해."



처음 누군가의 뺨을 때린거기도 했고, 나보다 어린 사람을 때린거라 더 신경쓰여 생각을 했었다. 왜 그렇게까지 흥분을 했나에 대해.

결론은 그날 나의 컨디션이 엉망이라 욱한것이다, 였다.

신수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유지원은 부담스럽고 게다가 꿈은 그랬으니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때리는건 좀 더 참았어야했었다.



"...그렇게 사과하면 내가 뭐가 되냐고."



"응?"



충격적인 것을 들은 사람마냥 안그래도 큰눈을 더 크게 뜨고있던 전명준은 별안간 고개를 숙이고는 알아 들을 수 없게 중얼거렸다.



"뭐라고 했는지 못들었,"



"...내일, 내일 올게요. 내일 점심시간 좀 내줘요."



갑자기 힘없는 목소리를 내는 전명준이 이상했다. 항상 이를 드러내며 덤빌기세만 봐서 그런지 힘빠진 전명준은 지나치게 가여워보였다.

이거 뭐 주인 잃은 개도 아니고 엄청 처량해 보이네.



"대답요."



"응?"



"대답 안하시냐구요."



슬쩍 고개를 드는 전명준의 눈빛은 여전히 이글거리고 있었다. 하하, 하나만해라 이 녀석아. 헷갈리잖아.



"못 내줄건 없지. 그래, 내일 얘기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네."



전명준에게 사과를 할까말까 고민하고 있던 차에 속시원하게 해서 인지 전명준이 무슨 말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괜찮을 것 같았는데 전명준 성격에 학교 뒤뜰로 불러 따지려는게 아닐까 하는 의심아닌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다시 싸우자고 불러내는건 아니겠지.



"...아니지?"



"네?"



안가고 서있던 전명준이 뭔 소리를 하냐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아니다. 미안, 좀 앞서갔어. 내일보자."



전명준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보이고 반으로 돌아왔다. 책상앞에 앉자마자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음, 타이머구나.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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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07-17 03:16 | 조회 : 1,189 목록
작가의 말
gena

그... 다들 안녕하셨는지요? 헤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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