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만나기까지

그의 눈에는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이 보였다.
보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저주 받은 왕자』02 만나기까지





왕자는 갈색 가죽 자루를 들고는 10년 동안 지낸 자신의 거처를 둘러보았다. 10년이나 지냈음에도 있는 거라고는 다 주저앉은 딱딱한 침대와 조그만 옷장이 전부였다. 10년이란 세월이 지났음에도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 요새의 새로운 입주자가 생긴 점을 제외하면 말이다.

“죽일거야죽일거야죽일거야죽일거야죽일거야죽일거야죽일거야죽일거야죽일거야.”

왕자는 쇠를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목소리에 놀라 자루를 떨어트렸다. 10년간 들어온 고운 목소리가 이리 바뀌니 전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떨어진 자루를 다시 챙겨들었다. 그러고는 돌아가지 않는 뻣뻣한 목을 용기 내 겨우 움직였다.

그녀였다. 죽은 아리아드 공주.

‘행복해? 내 남자 빼앗아서 네 거 삼으니까? 행복하냐고...!!!!’

그녀는 그에게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지만 닿지도 못한 채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 친모의 반지가 아니였다면 곧바로 그녀에게 잠식당했을 터였다. 그녀는 제 분을 이기지 못한 채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다. 그 소리가 손을 막아도 새어 들어와 왕자의 머리를 울렸다.

‘네 몸...! 네 몸을 내놔!!! 네 몸을 나에게 주라고!! 당장!! 지금 내 말 무시하는 거야..!!!! 너 따위가...!! 너 따위 천박한 놈이 감히!! 왕국의 공주를...!!’

그녀가 왕자의 몸을 달라 소리를 지르자 흩어져 있던 다른 영혼들도 모여들어 그의 몸을 갈구했다. 영혼들은 그에게 몸을 줄 것을 요구하며 왕자를 감싸기 시작했다. 왕자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더니 곧 벽에 부딪혀 버렸다. 음침하지만 강렬한 울부짖음이 그의 몸을 감쌌다. 왕자의 눈이 공포로 물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모여드는 여러 사람의 짙은 원망이 그의 숨통을 조여 왔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스물스물 피어올랐다

그는 서둘러 요새를 빠져나왔다. 그 장소에 단 1초라도 더 있기 싫었다. 왕자 자신까지 피로 물들 것 같았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윽...”

완전히 요새에서 벗어나자 왕자는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소름끼치는 기운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자신의 색 빠진 흐린 금발을 쥐어뜯으며 올라온 기억을 밀어냈다.
몇 분이 지난 지도 모른 채 오래도록 앉아있던 왕자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뛰었다고 옷깃은 다 흐트러지고 헤진 신발의 끈조차 풀려져 있었다. 왕자는 자신의 우스운 꼴에 한숨을 쉬고는 다시 차림새를 다듬었다.

하늘을 보니 달이 꼭대기를 지나 이미 내려가고 있었다. 달이 하늘 꼭대기에 닿을 때 즈음 온다 했으니 이미 오래도록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왕자는 빠른 걸음으로 궁의 서쪽 문을 향해 걸어갔다. 요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 조금만 걸으면 금방 나올 거라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제국 마차로 향했다.



***



제온 대제국과 페르소스 왕국의 교류를 증표로 원래라면 공주가 황제와 혼인을 해야 했지만 공주가 사고로 죽는 바람에 혼인마저 치룰 수 없게 되었으니 새로운 사람을 보내라는 것이 제국의 뜻이었다.

거기서 더 깊이 들어가 황제는 첫째 왕자를 그 대상으로 지목했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첫째 왕자는 통칭 저주 받은 왕자로 왕비를 죽게 만들고 대흉년에, 공주까지 죽여 그야말로 왕국 모두의 적이었다. 왕은 노발대발하면 당연히 반대했지만 황제가 강경한 자세로 첫째를 요구했기에 딸의 복수를 눈물로 삼키며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 또한 딸을 사랑했으니 분명 그를 그냥 두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며 자신을 위로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자신이 직접 그를 죽이지 못 한 것이었다.



***



덜컹덜컹-

마차가 별로 좋은 것이 아니었는지 돌부리 하나에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왕자는 이 마차에 대해 만족스러워 했다. 마부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혼자만 이 안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처음부터 마부는 자신과 눈을 마주치기 꺼려했다. 흔한 일이었기에 왕자는 상처 받지 않았지만 만약 가는 길 동안 마부를 쳐다보고 있어야 했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고역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문제는 있었으니 연약하디 연약한 그의 몸이 오랜 마차 여행을 견디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우욱...”

벌써 여섯 번째였다. 이제 마부는 자신의 눈을 피하기는커녕 대놓고 못 마땅 해하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출발 당시 2시간 정도는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지만 그 후부터는 토기가 몰려와 그의 속을 어지럽혔다.

“쯧, 안 그래도 시간 없는데 거지같이...”

이제는 왕자가 그냥 편해졌나 보다. 마부는 왕자에게도 들릴 큰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경을 쳤겠지만, 왕자는 그럴 힘조차 없는 권력 없는 왕자였다. 그는 왕실 정원의 잡초보다 못 한 존재였기 때문에, 그보다도 왕자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었기에 왕자는 마부의 말에 대꾸조차 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다음에는 조금 더 버텨보겠습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이 계속 반복되자 왕자는 마부에게서 종이봉투를 몇 장 얻었다. 최후의 수단이었다. 왕자는 말 그대로 거지같은 자신의 몸을 원망하며 종이봉투를 천천히 폈다. 이 마차로 종일 달리면 궁까지는 적어도 한 달이란 시간이 걸릴 텐데 자신이 이 모양이니 하루 예정이던 거리의 반도 가지 못했다. 아무래도 두 달은 이 끔찍한 생활을 계속 해야 할 듯싶었다. 왕자는 자신의 긴 머리를 높게 묶었다. 보는 사람도 없으니 괜찮을 듯싶었다.


마부는 제비뽑기에서 진 자신의 손과 딱 생긴 것처럼 연약한 왕자를 욕했다. 저주 받은 왕자라 더러운 거 옴 붙을까 걱정했는데 걸려도 제대로 걸린 듯 했다. 진도도 안 나갈뿐더러 저 더러운 꼴을 계속 보려니 짜증이 올라왔다. 안 그래도 마음에 안들 던 왕자가 더욱 더 싫어졌다. 그 긴 금발 사이로 보이는 흐릿한 초록빛의 눈이 기억에서 잊히지 않았다. 그 더러운 눈이 자신을 쳐다 봤었다. 그는 저주 받은 왕자와 눈을 마주치면 죽는다는 소문을 떠올리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



“왕자를 데려오라 시킨 마차가 한 달하고도 벌써 스무날이 흘렀는데 왜 돌아올 생각이 없을까. 오다 습격을 당해 죽기라도 한 것이냐?”

온몸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목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대신들은 몸을 흠칫 떨었다. 공주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린 후 황제의 기분은 계속 저조한 상태였다. 평소 온화할 때는 꽃이 만개한 듯 온화하고, 무서울 때는 한 겨울 사람 하나 벌거벗겨 죽일 것 같은 사람이 본인들의 주군이었다. 하지만 그 소식 이후 황궁은 아직은 선선한 날씨임에도 강추위를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서늘해지는 공기를 감지하며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왜 모두 답이 없는가? 혹시 그 잘난 주둥이들이 막히기기 라도 한 것 이냐.”

황제가 비웃음을 흘리며 그들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제국의 대공작인 세인은 곤란한 표정으로 움찔 거리는 이들을 쳐다보았다. 요 근래 황제의 기분이 별로다 싶더니 결국 이 지경까지 오고 말았다. 그는 보다 못 해 황제의 오랜 친우이자 신하로서 그에게 말을 건넸다.

“폐하도 아시다시피 보낸 마차의 성능이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을 뿐더러 그 왕자의 몸이 워낙 약한지라 속도가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마법사를 보내 데려오게 하는 건 어떠신지요.”

세인이 자신의 친우를 향해 썩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딱 봐도 ‘네가 제대로 처신 안 해서 이 모양 이 꼴 난 건데 왜 애꿎은 사람 괴롭히냐, 한심아.’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애초에 마법사를 부르라는 것부터가 비꼬는 말이었다. 마법사는 전 세계적으로도 매우 소수의 인원이었으며 제대로 된 황실 마법사라고는 왕실 대마법사인 시르온 밖에 없었다. 그 시르온마저 제외 시킨다면 마력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이는 황제뿐이었다. 곧 꼬우면 네가 가라는 거다.


오랜 친우의 말에 황제는 잠시간 미간을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꼴이 안 좋게 보이긴 했나 보다. 평소 과묵해 웬만하면 공적인 장소에서 말을 잘 꺼내지 않는 그가 이럴 정도면 말이다. 황제는 미동도 않은 채 가만히 앉아 무엇을 생각하는 듯 있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대신들에게 손짓하여 해산하라는 표시를 남겼다.

그에 대신들은 오늘도 결국 무사히 넘겨가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소리 없이들 물러났다. 이제 제국 소회장에는 황제와 세인을 더불어 전쟁 시절 그와 같이 시간을 보냈던 호위기사만이 남아 있었다.

“아돌프, 네가 그녀를 사랑했던 마음도 알고 지금 그 기분이 얼마나 참담할지 난 상상조차 할 수 없어. 하지만 일에도 순서가 있는 법이야. 네 감정으로 해야 할 일을 그르치지는 마.”

날카로운 셰인의 말에 건장한 체격의 아르휠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지, 내가 잠시 평정을 잃었던 것 같아.”

그가 흘러내린 그의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숨을 내뱉었다. 아돌프 본인도 그들의 생각에 동의했다.
화가 났다. 미치도록. 하지만 그 화를 풀 대상은 자신의 불쌍한 신하들이 아니었다.

자신의 사랑하는 연인을 죽인 그 개자식. 그녀를 얻기 위해 피로 계단을 쌓은 그에게 이보다 절망스러운 소식은 없었다.

그 오라비과 과연 어떤 인간일지 참으로도 운 없는 녀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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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3-17 22:36 | 조회 : 944 목록
작가의 말

나도 글 잘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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