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버리지 않습니다.

나는 너무 나약하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긴토키가 죽는 게 두렵다. 사라지는 게 두렵다. 단순히 살인마가 되어버리는 게 두렵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는 무력해지는, 한 없이 작아만지는 게 두렵다.

온 세상이 두려운 것 투성이다.

검을 들었다. 베고 또 베며 피투성이가 되어 사람을 죽였다.

나는 조금이라도 강해졌나?

가족을 지키지 못했고, 복수도 이루지 못했고, 긴토키를 지키지 못했고, 나 자신조차 지키지 못했다.

나는 아직 나약하다.

나는 결국 뭘 했던 거지?



* * *



"... 나."

온 몸이 노곤하다. 움직이기도 귀찮은데 누군가가 자꾸 부르고 있다.

"... 어나, 일어나라니까?!"

찰싹.

이젠 얼굴까지 찰싹 때려댄다. 아... 정말. 내가 일어나기만 해봐라. 누군지 몰라도 확실히...

"일어나라니까, 삼촌?"

"삼촌? 누구냐, 너."

"이젠 조카 얼굴도 몰라보네... 잠 깨!"

나는 다시한번 내 얼굴을 때리려는 꼬맹이의 팔을 막고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아, 뭐야. 너냐?"

"무슨 아침... 아니지, 낮 한 시까지 자고 그래? 엄마가 삼촌 좀 깨우래서 내가 친히 옆집에서까지 왔잖아."

"아... 맞아. 너 옆집에 살았지, 참."

그러자 이 조카놈이 내 등허리를 철썩 쳐댄다.

"이제와서 무슨 소리래?"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만 해도 분명 귀엽게 앵기는 조카놈이었는데, 어쩌다 이런 애늙은이로 변해버렸을까... 역시 애니탓이야. 그놈의 애니 덕에 애 한명 잘못 배렸어."

"아, 뭔소리래! 은혼 추천해줬을 때는 자기도 재미있게 봤으면서?... 아야!"

나는 조카의 머리를 때렸다. 어렸을 때는 가슴께에 닿을까 말까한 키였는데, 중학교 마지막 학년인 녀석은 지금 내 어께 어림까지 와있어서 꿀밤을 때리기도 버겁다.

"다 네놈 탓이다, 임마. 내가 너 때문에 은혼 꿈까지 꿔야 되겠냐?"

"오오! 꿈도 꿨어? 뭔 내용이었는데, 응?"

"... 몰라."

"시선 피하는 거 보니, 기억하고 있구만. 뭔데, 뭔데?"

"너 때문에... 죽어서 그 놈 아들로 태어났다, 임마."

"그 놈... 혹시 긴토키?"

"그래. 그... 긴... 뭐였더라... 아무튼 그 허여멀건 녀석의 아들로."

"진짜? 나도 태어나 보고 싶다."

"그러게, 네녀석이 태어나서 한 번 그 세상에서 굴려졌어야 했는데... 근데 나, 그럼 그 때 죽은 건가?"

생각해보니, 어린 긴토키를 만나고... 그러다 산적에게 두들겨 맞고, 긴토키 앞에서 쓰러졌었는데... 결국 죽은 건가? 그럼 이때까지 이 실감났던 그 상황들이 모두 꿈이었던건가?

문득, 고개를 들어 조카를 바라봤다.

그런데... 조카가 희미하다. 조카의 얼굴이... 그냥...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얼굴도, 이름도, 목소리도..

"조카야?"

[삼촌... 죽었잖아. 자살해서 죽었잖아. 이미 없는 사람이잖아.]

그랬지, 난 자살했다. 여기서 난 없다. 이미 죽은 사람.

이게 꿈이라면 저 녀석이 한 말, 내가 스스로에게 하는 걸까, 자각몽?

조카의 얼굴이 지우개로 지운듯 뿌옇다. 그럼에도 그 희미한 잔상에서 물이 흐른다. 물이 내 손에 닿는다. 조카가 내 손을 잡는다.

...... 따뜻하다.

[미리 얘기하고 간다고 했잖아. 말 없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잖아. 곁에 있겠다고 했잖아.]

"... 그랬지, 참. 긴토키."

[말 하고 가.]

"응, 미안. 지금... 가."


... 안녕. 희미해져가는 내 기억들.


* * *


눈이 부시다.

마치 몸을 일으키는 것이 내 의지로 움직이는 게 아닌 실 달린 인형처럼 휘청휘청 삐걱 거리는 느낌이랄까...

무겁고, 어지럽다.

왠지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확실히... 그 때 진선조 애송이가 그랬다. 예의를 밥 말아 먹은 녀석 같으니.

"긴토키는... 무사하겠지. 아무래도 긴토키가 나 쓰러졌을 때 불러댄 것 같은데... 아님 내가 그런 꿈을 꿀 리가 없지."

똑바르게 일어서는 건 너무 어지러워서 옆으로 구르듯 일어났다.

그런데 일어섰는데도 왠지 불안하게 휘청거린다.
몸이 말을 안 듣는 게 이런 뜻이군.

"그나저나... 대체 내 소도는 어딜 간 거야. 긴토키는 또 어딜간 거고. 내 옆에 있었던 거 아냐?"

방 안을 한 참 두리번거리다 내가 누워있던 자리의 머리맡을 보니 소도가 놓여있었다.

"등잔 및이 어둡다더니..."

나는 검을 주우려 몸을 숙였다.
순간, 머리가 핑 돌면서 몸이 크게 휘청했다.

간신히 꼴사납게 엎어지는 걸 방지한 나는 검을 발 끝으로 차올려 잡았다.

"몸 상태가 말이 아니야... 도대체 피를 얼마나 흘렸기에 저번에 이마랑 배가 뚫렸을 만큼이나 어지러운거지? 그 때보다 더 어지러운 거 같은데..."

그 때 얻은 상처는 지금도 흉터가 남아있었다.

이마를 가로지르는 흉터는 앞머리를 내려 가렸고, 배에 있는 흉터는 옷으로 가렸지만 말이다.

그러고보니 상처에는 지혈이 이미 되어 있었고 치료도 깔끔하게 끝난 상태였다.

드르륵.

한참 상처를 살피고 있는데, 순간 미닫이 문이 벌컥 열렸다.

나는 허둥거리며 옷을 대충 여미고 상대를 바라본 순간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

"다, 당신은..."

놀란 나머지 또 머리가 핑 돌았다.
뒷걸음치며 아까처럼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는데 그만 발이 겹쳤다.
뒤로 넘어지려는 순간 그가 내 허리를 손으로 바쳤다.

"... 저런, 조심해야죠."

이 상황이 만약 평범한 남녀였다면 두근거렸을지도 모르겠다만, 난 조금 다른 의미로 심장이 벌렁거렸다.

일단 뒤로 엎어져서 머리가 깨졌을지도 모를, 생명의 위기를 느꼈던 것과, 정신을 잃기 전 경계했던 남자가 내 허리를 받치고 있다는 점에서.

아무래도 피를 많이 흘려 자칫 위험했던 상황에서 이 남자가 날 치료하고 구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결국... 데리고 온 겁니까... 뭐, 이제와서 버티는 건 불가능 할 듯 한 것 같네요. 이미 여기 오고도 살아 있으니까. 긴상은 어디있습니까? 제 옆에 있는 줄 알았더니 없군요."

"아, 긴토키는 저기 있습니다. 저기, 나무 위에 누워있네요. 아까까지 옆에서 같이 간호를 해줬답니다."

"... 긴상이 간호라... 전혀 상상되지 않는 장면인데 말이죠."

내 앞에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바로 앞에서 보는그의 미소는 정말 선해보였고, 그 미소가 나에게는 결코 닿을 것 같지 않았다.

사람은 커녕 벌레 한 마리 죽여보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 나와는 정말 다른 세계의 사람.

내가 그의 옆에 있으면 새하얀 그의 미소가 나처럼 새까맣게 물들 것 같았다.

아마 난 다시 순백으로 돌아갈 순 없을 거다.
굳이 알게 쉽게 비유하자면... 이성에 눈떠버린 소년이 순진했던 아이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당신은... 저희를 데려와서 무엇을 하려는 겁니까?"

"... 글쎄요. 뭔가를 하려다기 보단... 다만 전쟁터에 아이들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었달까... 저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 당신의 이름은?"

"요시다 쇼요 입니다. 당신의 이름은?"

"사... 아니, 카오루. 성은 없습니다."

"긴토키는 성이 있다고 했는데 말이죠. 꽤 닮아서 형제라고 생각했더니 아닌가 보군요."

"뭐... 그렇게 됩니다."

형제가 아니라 아버지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를 지키는 걸 보면 분명 아무 관계가 없는 건 아닐텐데... 혹시 분가와 본가의 관계입니까?"

"... 뭐, 그렇다고 해두죠."

"뭔가 더 복잡해 보이는데, 얘기해주시지 않겠죠?"

"잘 아시는군요. 아무튼... 아이들을 가르치고 계신다고 했습니까?"

나는 더 캐물을까 불안해 화제를 돌렸다.

"네.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서당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얘기는... 긴상 역시 제자로 삼겠다는 얘긴가요?"

"뭐, 지금 당장의 얘기는 아니지만, 제게서 배우고 싶어한다면 제자로 삼겠죠."

"... 제가 가로막았지만, 긴상은 당신을 따라가려했죠. 그것만으로도 아마 긴상은 당신에게 배울생각이 있어서 그런 행동을 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긴상이 당신의 제자로 들어간다면... 저 역시 당신의 제자로 들어가겠습니다. 그 때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저 역시. 그런데... 상처를 치료하다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만... 배와 이마에 있는 상처 어찌된 건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무심코 이마를 쓸었다.

그러다 순간 장난기가 돌았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마주댔다. 그리고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에게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전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도망치고 있죠. 나랏일 하는 이들에게요. 당신이 하는 서당일이 위험해질 지도 모르는데... 여전히 제자로 들일 생각은 변함 없는 겁니까?"

사실, 과거로 돌아왔으니 날 잡는 이들은 없다. 당연히 나로 인해 서당이 위험해질 일도 없다.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저렇게 선한 얼굴로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이가 악을 마주했을 때 어떤 표정을 내비칠지.

하지만 그는 내 생각대로 해주질 않았다.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을 뿐.

"당신은 어떻게 하길 원하나요?"

"... 뭐?"

"속죄라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들을 따라가고 싶은 건가요?"

내가 하고 싶은 것. 간단해보이지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한 때 우스갯소리로 말했던 우주 여행도, 내 마음이 편하고자 했던 복수도 이곳에선 할 수도 없거니와 이제와선 진짜 하고 싶었던 건지 의문이든다.

정말 간절하게 바랬는데 내가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니 모순이지만, 웃기게도 그랬다.

"그냥... 긴토키 옆에 있고 싶습니다."

그를 지키고 싶은 게 아니다. 나는 나약하다. 내가 근본적으로 원한 건...

"옆에서 같이 웃고 떠들고 그냥 평범하게, 긴토키 옆에서... 그렇게."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같이 있어도 됩니다. 긴토키도 그걸 바라고 있으니까요. 서로 같이 있기를 바라는데, 떨어지게 된다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나요?"

"긴상 옆에 있기엔 전 너무 나약해서 자꾸만 추한 모습만 보여주게 됩니다. 그를 지키는 것도 어쩌면 나를 위해서인 건지도 모르죠."

그는 의외라는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마치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인간은... 생각하는 것 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한대로, 나약하다고 할수있죠. 나약하기에, 서로에게 기대며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죠. 카오루도 긴토키에게 조금 더 기대보는 건 어떨까요? 내색하진 않았지만, 하루종일 당신의 간병을 해주고 있었습니다."

나약하다. 그의 말이 울컥할 만큼 와닿았다. 인간은 생각보다 나약하다는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울려왔다.

"제가 무섭진 않습니까? 어쩌면 당신이 아끼는 서당이 망할지도 모르는데."

난 멀리 떨어진 채 체념한 얼굴로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런 나에게 그가 다가와 말없이 끌어안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

나는 당황스러워 그의 품 안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렸다.

"버리지 않습니다."

"......!"

"저는 제자들을 지키지 못할 정도로 약하지 않고, 제가 거둔 아이들을 다시 내칠 정도로 전 그리 야박하지도 않습니다. 당신이 스스로 나가지 않는 이상은 제가 당신을 내쫓을 일도, 버릴 일도 없습니다."

예상과 다른 그의 진심 어린 말에 버둥거리던 걸 멈추고 그를 올려다봤다.

"전 아이가 아닙니다."

그러자 그가 웃음을 터뜨린다.
아니... 진짠데......

"후후... 네, 네."

"... 거짓말이 아닙니다만."

"알겠습니다."

내 머리까지 쓰다듬는 그의 손을 내칠려다가 왠지 그러면 안될 것 같은 느낌에 그냥 손을 내렸다.

가뜩이나 조카 꿈을 꿔서 내 나이가 확실하게 느껴지는 데도 다시 어려진 기분이 들어서 그런지 얼굴이 뜨거워진다.

... 긴토키가 여길 보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다.

4
이번 화 신고 2017-08-03 03:02 | 조회 : 1,835 목록
작가의 말
나른한 고양이

수정본이 전부 날라가서 좀 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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