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덫에 걸리다.(下)

소고가 천천히 다가온다.
꼭 사냥감의 숨통을 조이는 것처럼.

그에 반해 난 내 몸 하나 움직이기도 힘들다. 아마 아까 양의지사들을 쓸어내는데, 거의 힘을 다 쓴 것 같다.

지쳤다는 걸 의식하자마자 몸 군데군데가 욱씬거린다.

흘끗 살펴보니, 가볍게 베인 상처들로 가득하다.
어깨... 팔... 세 군데. 아니, 네 군데인가...

소고와 싸울 땐 거의 맞대질 않았으니, 이 상처들 역시 아까 양이지사 때문인 것 같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아까 그 양이지사를 쫓지 않았어도 난 이미 우주에 가 있었을텐데.

비틀린 웃음이 나온다.

쫓아서 얻은 것보다 잃고 있는 게 더 많다. 유이토라는 이의 정보도 얻질 못하고, 정체를 들키게 생겼다. 경찰에게 잡히게 생겼다.

엉망이야... 완전 엉망진창이야.

몸을 움직이기 힘든 와중에도 소고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 이렇게 된 바에야 어떻게든 살아남아주마.
기회는 한 번. 방심하기 딱 좋은 순간에.
어디 한 번 와봐. 속전 속결로 끝내자.

세 걸음,
두 걸음,
... 한 걸음.

나는 순간적으로 엉거주춤하게 반쯤 앉아있던 자세에서 튕기듯 쏘아져나갔다.

동시에 소고의 목을 노리며 검을 그었다.
검이 목 부근에서 깔끔하게 선을 긋는다.

... 그리고 당연하게도 소고의 검에 막혔다.

당연하다. 애초에 막을 걸 알고 목을 노린거니까. 하지만 잠깐이라도 당황은 했겠지.

소고가 얼굴을 찌푸리며 검을 쳐냈다.
순간, 나는 소고가 검을 쳐낸 그 반동으로 옆으로 빠져나왔다.

히지카타가 난관이었지만 그에게 직접적으로 살기를 뿌리지 않자, 그가 검을 빼내지 못하고 어?! 하는 순간의 그를 지나갔다.

검을 든 상대 중 살기를 뿌리지 않고 돌진만 하는 적은 거의없었을거다.

그렇게 해서 소고와 히지카타가 지킨 폐공장은 빠져나왔지만, 금방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대원들과 대치하게 생겼다.

이들은 소고나 히지카타와 달리 죽을 지도 모른다는 만큼의 위기감은 느낄 수 없었지만, 몸이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닌 이상 힘든 건 똑같았다.

그래도 상대하는 건 훨씬 나았다.
칼등만으로도 헤쳐나갈 수 있었다.

근데... 난 어디로 가야되지?

여관? 금방 잡힌다.
길거리? 나 좀 잡아가 달라는 짓.
골목길? 그러다 잡히기 전에 약해진 모습으론 깡패에게 털릴 거다.
그나마 괜찮은 선택지인 사람들이 많은 큰 길거리는 여기서 꽤 멀다. 폐공장 자체가 인적이 드문 곳이니까.

이젠... 모르겠다. 어떻게든 잡히지 않는 곳으로. 어디든 몸을 숨킬 만한 곳이 어디가 있을까.
아직까진 죽이지 않고 상대를 했지만, 이것 역시 언제까지 가능할까.

이들은 진선조다. 독하기로 소문난 진선조. 살아있는 한은 어떻게든 노릴 이들이다.

슬슬 버거워진다. 숨도 점점 거칠어져서 금방이라도 끊길 듯이 위태롭다.

생각 좀 해보자. 설마 생각까지 어린아이로 역행한 건 아니겠지.

지금도 최대한 힘 닿는 대로 기절들을 시키고 있지만 아직도 반 이상이 남았다.

일단 이들을 다 기절시키는 건 내가 생각해도 무리다. 일단 기절시킬 수 있는 만큼만 기절시키고 길을 뚫는 걸 우선으로 해서 도망쳐야겠다.

그래도 경찰차에 잡힐 테니 임시방편이지만, 방법이 이 이상 없다. 지금 지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이다.

일단은 그렇게 도망치고 나서...

푹.

살을 뚫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아랫배에 차가운 물체가 삐죽 나왔다.

"아... 아아......"

"딴 생각 하면 안되지, 꼬마 사신님."

아... 그래. 딴 생각을 했다는 걸 확실히도 알려주네, 이 버르장머리 없는 꼬맹이가.

고딩 주제에 마흔 살 아저씨한테 칼빵이라니, 이거 정신적 충격이... 내 배에 칼이 삐죽 나와 있는 이 순간이 왜이리 현실감이 없는지... 이거 혹시 환각인가.

아픈건 또 드럽게 아프네. 환각은 아니야.

아... 긴토키가 생각났다. 일단은 생물학적으로 아버지인 녀석, 나보다 어린 아버지. 처음 봤음에도 어디선가 본 듯한 그리움.

나... 거기로 돌아가도 되려나... 설마... 귀찮다고 내쫓진 않겠지? 일단은 아버지인데 말야. 뭐, 그래봤자 하루 본 게 다이긴 하다만.

그래도, 걱정해 주려나...

"나... 돌아가야... 하는데... 나, 가야... 되는데.."

엎드린 상태에서 손만 뻗으며 기어간다. 이 얼마나 꼴사나운 모습이려나...

아, 눈 앞이 뿌얘진다. 뭔가 웅얼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나 설마 이대로 죽는 건가. 또다시 환생? 아니면 끝?
어찌되든 그 자식은 죽이고 가고 싶었는데...
천천히 의식을 놓았다.


* * *


아이를 상대로 진심을 다해 칼을 휘둘렀다. 적당히 하려했으나, 예상한 대로 적당히 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히지카타는 물론이고 대원들 반 이상이... 죽진 않고 농락을 당했다.

사신을 잡으려고 답지않게 온 힘을 다했다.
덫을 놓는 것도 철저히 조사를 했다.

이때까지 놈의 행보로 보아, 거의 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과격파 양이지사들을 학살했다.

덕분에 대신 일을 해준 격이다만, 왠지 성미에 안 맞았다.
출동만 하면 시체처리 역할이니 칼을 휘둘를 기회가 적어졌다.

히지카타는 안 그런척 하면서도 조급해하면서 대원들을 갈궜다.
콘도상은 지시를 내렸지만 헛수고로 돌아갔다.
그래서 직접 스스로 나섰다.

잡혀 온 과격파 양이지사들 중 한 명에게 몰래 위치추적 칩을 심고 일부러 감시를 약화시켜 쉽게 탈출 할 수 있게 했다.

한 번에 걸릴 거란 생각은 안했다만,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전부터 노리고 있던 놈인지, 미끼를 덥썩 물었다.

그 뒤, 위치를 추적해가면서 양이지사와 그를 미행하고 있는 사신을 쫓았다.
추적까진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양이지사와 사신 둘 다 사로잡으면 된다. 그렇기에 평소보다 서둘렀다.

그런데 계획이 조금 엇나가버렸다.

양이지사는 사로잡을 수 없었다.
모두 몰살 당했다. '사신' 한 명으로 인해.
게다가 어림짐작으로 10살 정도 되보이는 체구였다.

"하, 하하..."

웃음이 나올 정도로 말도 안되는 상황었다. 시체를 처리할 때마다 몇 번이고 예상하고, 예측했지만, 실제로 보니 어이가 없었다.

예전 소도 하나로 무뢰배들을 처리했다는 히지카타보다 더 한 거 아닌가.

녀석도 10살에, 달랑 소도 하나였다. 같은 건 그거 두 개뿐.

말도 안되는 현장이었다.
대충 눈에 보이는 시체만 세봐도 몇십 구. 거기다 여기까지 도착한 시간은 한 시간을 넘길까말까 한 시간이었다.

녀석은 턱 없는 해골 가면으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망토로 옷이 보이지 않게 감쌌다.

피를 튀기지 않게 위한 용도인가... 머리도 영악할 정도로 좋은 놈이다.

나는 천천히 그녀석에게 다가갔다. 저 만한 녀석은 대원들에게 맡겼다가는 오히려 피해만 감수해야한다.

녀석은 움찔하며 소도를 들어올렸다.
그런 녀석을 쳐다보며 처음부터 전력으로 갔다. 살기 띈 미소를 지으며.

녀석은 이미 양이지사의 일로 지친 듯 했다.

덕분에 거의 몰아붙였다싶은 순간, 나는 당황하며 검으로 막아섰다. 몰아붙여지는 와중에 녀석이 갑자기 덤벼들어 목을 노렸다.

아마 온 힘을 다해 마지막 공격을 한 거라 판단하고 나가 떨어질 정도로 세게 쳐냈다.

하지만 녀석은 오히려 반동으로 옆으로 새어나가 도망쳤다. 헛웃음이 나왔다. 끝까지 방심할 수 없는 상대다.

변칙적인 공격을 막고 공격하고 주고받고, 거기다 체급차로 인해 벌어지는 힘을 파악하고 거의 칼을 받지 않고, 특유의 작은 몸짓과 유연함으로 유유히 공격을 흘려냈다.

사신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건 약 1년 전.
녀석은 1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실전경험을 늘린거다.

... 정말 탐나는 인재다. 어린애, 아니 적이 아니라면 진선조에 넣고 싶을 정도로.

거기다, 히지카타에게 못 이길거라 예상하고 살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덕분에 히지카타는 칼을 뽑지 못했고 녀석은 히지카타를 지나쳤다.

히지카타는 거의 본능적으로 칼을 뽑는다. 본능적으로 살기를 느끼며 반사적으로 칼을 뽑는 사내.

알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상황에선 살기를 내뿜지 않은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이미 대원들에게 포위당했다. 얼마나 버틸 진 모르지만, 지친상태에선 많이 버티지 못 할거라 생각했으나, 끝까지 내 생각을 틀리게 만들었다.

무려 반 이상의 대원들을 기절시키며 꾸준히 퇴로를 만들어나갔다.

결국, 내가 다시 나서야만했다.

녀석이 딴 생각을 해서 뒤가 비었을 때, 칼을 찔렀다.
내장을 피해서 찔렀다만, 씁쓸했다.

싸움에 비겁한 일이 어디있겠냐만은, 이런 어린애를 술수를 써야만 겨우 죽이지 않고 사로잡는 상대라 인정해버린 것 같아, 씁쓸했다.

녀석은 마지막 순간 어딘가를 가야한다며 엎드려 손을 뻗었지만, 의식을 잃었다.

나는 약간 두근거림을 느끼며 천천히 손을 뻗어 가면을 벗겼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새하얀 머리칼.
살짝 굳은 표정으로 머리칼을 만졌다.

해결사 형씨?

"... 아니, 며칠 전 그 꼬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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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6-05 19:54 | 조회 : 1,888 목록
작가의 말
나른한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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