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덫에 걸리다.(上)

나는 천천히 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바로 내 앞에 있는 이를 베었다. 그렇게 눈 깜짝 할 새에 한 명을 베었다. 지금만큼은 나도 이들과 똑같다.

내 복수, 내 목적을 위해서 남을 배고 있다는거니까.

불안하고, 무섭다. 잘못된 방식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만둘 생각은 전혀 없다.

내가 만약 모든 업을 지고 지옥에 가게 되더라도, 복수만큼은 그만둘 생각이 없다. 어차피 처음 사람을 베었을 때부터 천국에 갈 거란 생각은 안 했다.

아니, 어쩌면 이전처럼 또 환생을 할 지도 모르지. 끝없이 끝없이 환생을 반복해서... 정신이 미쳐 무너질 때까지. 내가 나라는 존재를 잊을 때까지.

촤악-

나는 크게 칼을 휘둘러 방금 벤 사람의 피를 털었다.
그게 마치 일련의 동작처럼, 눈 깜짝할 새였다. 주위에 있는 이들은 뻣뻣하게 굳었다. 창백해져 있다가 누군가 한 마디를 했다.

"사, 사신... 사신이다아! 사신이야!"

이 말 한 마디에 정신이 번뜩 들었는 지 모두 칼을 그러쥐었다.

"어차피 여기 있는 사람들을 살려 줄 가능성은 없다. 모두 덤벼! 그 편이 살 가능성이 높다. 어린애라고 방심하지마!"

방심하지 말라고 해도 방심할 사람은 없어보인다. 그래도 다행이다.차라리 겁먹은 상대를 베는 것보다 덤벼드는 상대를 베어넘기는 게 마음은 편하다.

나는 계속해서 덤벼드는 이들을 베어 넘겼다.
베고, 베고 또 베고.

그저 움직임이 없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베었다. 그러다 주위가 조금 조용해졌을 때, 멍했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부분 시체가 되어 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지금 나와 칼을 맞대고 있는 녀석 외에 전부.

칼을 맞대고 있는 녀석도 눈에 두려움이 가득하다.

그러고 보니까, 녀석은 맨 처음에 미행을 했던 녀석이다. 나는 가면을 머리 위로 슬쩍 올렸다. 그러자 녀석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진다. 그리고 칼을 떨구더니 주저 앉는다.

"너, 너는...!"

"운도 좋아, 아저씨. 이렇게 혼자 살아남고. 그 기분 내가 자알 알지... 그래서 동지로서 한 가지 물어보는데, 거짓말 하지 말고 곱게 대답해주는 게 좋을 거야. 또 몰라? 내가 불쌍해서라도 살려줄지."

"무, 무슨...소릴... 거, 거짓ㅁ"

"... 글쎄. 처음부터 목적은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아저씨의 윗사람, 다카하시 유이토. 그 사람 어딨어?"

"모, 몰라."

"몰라?"

표정을 굳히며 묻자 다급해진 놈의 말이 빨라진다.

"지, 진짜 몰라. 도중에 경찰에게 잡히고, 탈출했다. 그래서 그사람의 행방은 지금 알 수 없어."

"그렇구나... 아까처럼의 말투는 더이상 필요 없겠군요."

내가 갑자기 존대를 하며 무뚝뚝한 모습을 보이자 녀석이 당황했다.

"사실대로 말해줬으니 살려줄거지? 나, 난 아직 해야할 일이 많다고? 그래! 그 사람도 찾아야 하고... 또 자식들도 있어."

"당신이 절 이곳으로 이끌고 온 덕에 그쪽 동료들이 전부 죽었습니다. 죄책감은 없습니까?"

"모, 몰라! 죽은 녀석 따위 알게 뭐야! 산 사람은 사는 거지."

놈의 말에 나는 비웃음을 머금으며 주저 앉은 그에게 다가가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역시 당신과 저는 동류가 아니네요. 한 가지만 물어보죠. 처자식이 있다하셨습니까? 진짜입니까?"

"그, 그래. 딱 너만한 아이야. 아직은 아빠가 있어야지... 그렇지? 엄마가 있지만, 아빠가 없어서는 곤란하지."

"전 아빠가 없어서 곤란했던 적은 없습니다만. 그래, 그런 처자식이 있는 아버지란 작자가 1년 전 일을 할 수 있었습니까?"

"1년? 1년전? 몰라! 그 때 일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걸 다 기억해야해?"

그는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절규했다. 나는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조소했다.

역겨워. 절규해야 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나야.

" 유곽을 불태우고, 모두를 살해했습니다. 저는 전부 보고 있었죠."

"몰라! 고작 불태운 걸 어떻게 기억해! 건물이 한 두갠 줄 알아?!"

나는 울컥함을 느끼며 녀석의 턱을 붙잡아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자세히 보시죠. 기억해야 할 겁니다. 제가 거기의 생존자니까. 그때 양이지사들도 반 정도 베었는데, 그래도 기억 안납니까?"

"힉...!"

놈은 날 알아보더니 겁을 먹고 뒷걸음질쳤다.

"사, 살려줄꺼지? 응? 그때 일은 나도 뇌우치고 있어. 잠시 기억이 나지 않았을 뿐이야."

"... 제 얼굴을 봤으니 살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참 추하군요, 목숨을 구걸하다니. 목숨을 버리라는 것은 아니지만... 추한 것은 어쩔 수 없군요.
이 모든건 당신 업이자 죄를 받는 것 뿐입니다."

"웃기지마! 누, 누가 죄를 주고 없애? 너, 너는 이 많은 자들을 학살하고 죄가 없다 하는거냐?"

"상관없습니다. 저도 지옥으로 떨어져드리겠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다시 안봤으면 좋겠습니다만. 이만, 고통없이 보내드리죠. 당신에겐 과분한 처사이자 행운이죠."

나는 살려달라 뒷걸음치는 이의 목을 베었다. 깔끔하게.

"하아..."

몸은 베었지만, 목을 베어보는 건 처음이다. 그것도 전의를 잃고 살려달라 비는 이를.

생소한 느낌에 손이 떨린다. 그래, 솔직히 베는 순간 조금 무서웠다. 내가 그렇게 망설임 없이 쉽게 베어버렸다는 게.

콰앙!

정문이 부셔졌다. 정문을 등지고 있었던 나는 재빨리 가면을 내리고 후드를 썼다.

누구지? 들킨건가? 누구에게?

1년간 이랬던 적은 없다. 한 번도 들킨 적이 없었는데.

덜덜 떨리는 몸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전선조다! 움직이지 말고 투항하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앙?"

나는 슬슬 뒤를 돌아봤다. 히지카타랑 소고가 소리를 지른 녀석 뒤로 천천히 걸어온다.

둘은 뭔가 또 티격태격 하고있다.

"헤에~ 히지카타씨 사신 잡았네요~"

"시끄러! 네놈, 아까 나까지 죽일 셈이였지?!"

"그럴리가요. 양이지사가 있는 정문을 향해 쐈잖아요. 어라, 근데 양이지사가 한 명도 없네요."

"뭐야... 설마 했는데, 진짜 꼬맹이인거냐."

"이제 저녀석을 붙잡아 가면을 벗기고, 정체를 확인하면 되겠죠?"

"그래. 근데 네놈이 하는 거냐. 대원들 안시키고?"

"보세요. 시체들. 대원들도 저 꼴로 만드시려고요?"

"... 적당히 해서 사로잡아라. 상대는 꼬맹에다 아무래도 취조가 필요할 것 같으니."

"가능하면요. 근데 히지카타씨 가만히 보고계시려고요?"

"네놈이 친 덫이라면 네가 수습해라."

"쳇."

히지카타가 정문에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하나 빼물었다. 그와 동시에 소고가 칼을 빼들고 달려든다.

곤란하다. 난 이들에게 아무 감정 없다. 조금 귀찮으면 귀찮은 정도랄까.
난 민간인이 아닌 과격파 양이지사만 쓸면서 내 자신과 타협했다.

근데 경찰이 날 목격했다.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목격됐다. 그래도 가면이 있어서 다행이다만, 그래도 들켰다. 잡히는 건 시간문제다.

아니, 그 이전에 경찰들을 죽여야할 지 말아야할 지에 놓였다.
아니아니, 그 결정을 하기 전에 내가 빠져나갈 수 있을까. 출구는 정문 하나다.

도망간다 치더라도 어떻게든 마주칠 수밖에 없다.
나는 살짝 떨고 있는 손을 진정시키고 마음을 다잡는다.
이들은 죽이지 않을 거라 다짐하자 조금 진정이 된다.

나는 칼을 빼고 달려드는 소고에 검을 들어 맞댔다.
칼과 칼을 맞대는 쇳소리가 울려퍼진다.

그리고 내가 뒤로 밀려났다. 나는 완전히 밀리기 전, 옆으로 슬쩍 피해 칼을 거뒀다. 옆으로 피하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반토막이다.

이 애송이, 날 죽일 셈이구만... 역시 정면은 무리다. 순수한 힘으로 겨루면 아이인 내가 밀린다. 소고는 헛칼질을 하면서도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는다.

"슬슬 진심으로 하는 건 어때, 사.신."

"... 어떻게 바로 쫓아왔습니까? 덫이라는 건 절 유인했다는 겁니까?"

나는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원래 목소리를 감췄다. 그러자 약간 탁하면서도 낮은 쇳소리가 났다.

"글쎄~ 그걸 일일이 알려드릴 이유가 있을까, 사신."

"아뇨, 없습니다. 뭐, 굳이 덫이라해도 전혀 짐작이 안가는 건 아니니까. 내가 쫓던 이, 경찰에게 잡힐까 전전긍긍했으니까요. 실제로 경찰에 잡혔다 풀려났다고도 했고. 일부로 놓아준 것이겠죠? 절 잡으려고 말입니다. 근데 용케 걸려들 걸 아셨네요."

"네놈은 과격파 양이지사만 싹쓸이 하니까. 뭐, 덕분에 편하긴 했다만, 우린 시체 처리반이 아니라서 말이야, 몇 번이나 물을 먹었는지."

"호오... 그런걸 알려주셔도 되는 겁니까? 다음 번에 더 잡기 힘들어질 텐데?"

"다음을 줄 생각 없는데?"

칼을 맞대면서도 순간순간 말을 했다. 아슬아슬했다. 최대한 그와 칼을 맞대지 않고 되도록 피하며 반격했다.

"어이, 소고. 애를 상대로 너무 힘빼는데?"

"시끄러, 히지카타."

"너, 지금 반말했냐. 죽고싶지?!"

그러면서 히지카타와도 싸우느라 바쁘다.
나는 순간 순간 틈을 노렸지만 죄다 막혔다. 거기다 치명상은 피하며 노리니 더욱 힘들었다.

"젠장!"

"헤에, 설마 지친거야, 꼬마 사신님~?"

"여길 싹쓸이 하고 나니까 좀 힘들군요. 그쪽이 근무태만을 하니 제가 싹쓸이를 하는 거 아닙니까. 좀 제대로 하시죠. 공무원씨."

도발을 해서 흥분하게 하려 했더니, 열은 받는다. 근데 더 침착해졌다. 오히려 역효과를 내버렸다. 이제 소고는 거의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다가온다.

왠지 저쪽이 더 사신같다. 저 썩은 살인미소.
짙은 살기를 뿌리며 다가온다.

"자아, 그럼 제대로 일하죠. 살인마 처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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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6-04 12:55 | 조회 : 1,879 목록
작가의 말
나른한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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