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단서.

휘익.
촤악!

또 한차례 싸움이 끝났다. 검을 크게 휘둘러 피를 털어냈다.

아야메가 그렇게 가고 난 뒤, 수많은 싸움에 스스로 휘말려 검을 휘둘러대며 유이토라는 이름을 찾아 헤멨다.

그의 편을 들며 검을 디밀던 양이지사들을 베었고, 그를 옹호하며 부인하는 양이지사들을 베었고, 그의 행동을 정당화
하는 양이지사들을 베었다.

검에서는 피비린내가 끊이질 않는다.

피흘리며 악에 받쳐 덤벼들던 그들의 모습이 절규하던 가족의 얼굴과 겹쳐보였지만, 마음을 다잡으며 베어 넘긴 것도 수십번.

그럼에도 난, 아직 살아있다.

그렇게 위태롭게 살아온 날이 벌써 일 년이다.

복수인가?

잘 모르겠다.

그저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했다.

아야메가 돕겠다고 양의지사를 지원한 것도 답답했고, 정작 도움이 되고 싶었던 사람은 존재 자체를 모를 거란 사실도 답답했다.

유곽의 식구들이 떠오르는 날에는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아야메는 내게 자책하지 말라고 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전부 죽었다.

... 그저 나 혼자 살아있는 게 답답해 미칠 것 같은데, 그들이 멀쩡히 살아서 정의를 외치고 다니는 것도 미칠 것 같아서 머리가 터질 것 같다.

그래서... 답답함을 아야메를 죽게 만든 이들에게 풀었다. 아야메는 복수를 하지 말라고 했다. 아야메는 그렇게 원했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건 복수가 아니라, 그저 내가 화풀이 대상을 찾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후우......"

아무튼 이렇게 한바탕 죽이고도 소란스럽지 않은 걸 보면, 나중에 진선조가 왔을 듯 싶다. 양이지사를 처단하는 건 원래 그들의 몫이었으니까.

피와 시체가 즐비했던 곳도 며칠 뒤에 가 보면 깨끗해져있다.

고작 며칠. 최근에는 더 짧아졌다. 조심하지 않으면 조만간 꼬리를 잡힐 지도 모른다.

"아... 지저분 해졌어."

한바탕의 싸움에 녹초가 된 몸을 이끌며 손으로 옷과 얼굴을 닦으려다 멈칫했다. 손이 더러웠다.

빨간 피가 굳어가고 있었고, 피 특유의 철 비린내가 잔뜩 났다. 불 같은 건 낸 적이 없는데도 코 끝에서 매캐한 연기 냄새가 감도는 것 같아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런, 오늘 하루는 여관을 잡아서 씻어야겠다. 피가 덕지덕지 했다. 일단 검을 죽은 남자의 옷에 닦았다. 그리고 검집에 넣었다.

그리고 최대한 피가 튄 자국들을 지웠다. 혈향과 옷에 틘 피 자국은 어쩔 수 없었지만, 나머지는 봐줄만했다.

그렇게 대강 닦고 나서 최대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피하면서 어귀진 골목길로 들어갔다. 싸우고 나서 매번 왔던 곳이다.

등에 매었던 칼을 내렸다. 어깨 부근이 쎄한 게 옷을 살짝 내려보니 역시나.. 베였다.

"쯧..."

옷을 다시 올리고, 쓰래기통을 옆으로 밀었다. 그리고 허리를 조금 낮춰 벽을 두드렸다.

턱.. 턱.. 턱...... 텅.

한 곳만 다르게 텅 빈 소리가 났다. 눈으로 확인 하기 힘든 틈에 손톱을 살짝 끼워 넣어 슬슬 빼내자 벽의 일부분이 빠졌다. 마치 블럭을 빼낸듯, 깔끔했다.

벽 안은 텅 비어있다. 소도를 벽 방향으로 뉘였다. 벽 방향과 평행하도록. 벽과 수직으로 넣으면 벽의 두깨가 60센티가 되지 않는 이상 벽을 뚫게 될테니.

그렇게 마무리 짓고, 여관을 잡았다.

아야메의 돈은 아니었다. 그 이후로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아까 양이지사의 시체를 뒤진 돈이다. 처음에는 어쩐지 꺼려져서 뒤지지 않았지만, 굶어죽을 지경이 되자 눈에 보이는 것 없이 뒤졌다.

그래도 처음에는 거부감 때문에 하루 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지금은 처음에 비해 거의 느낌이 없었다.
약간 눈살을 찌푸리고 말 정도?

조금 무섭다. 이러다가 정말 아무 감정도 못 느끼게 되는 거 아냐?

"나도 참 악귀가 다 됐네. 애초에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을 위한답시고 벤 거잖아."

다시 떠오른 비참함과 답답함에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지금 이제와서 멈출 순 없다. 그를 잡기전까진 나 역시 포기할 순 없다.

지금까지 그래왔다. 치열하게 버티고 싸우고 죽여왔다.

나를 아는 사람도 없다. 내가 벤 이들은 양이지사들 중에서도 온건파가 아닌, 일반인들과 거의 교류가 없는 과격파 양이지사들인데다 현장에서 아무도 살려두지 않았으니, 소문을 전해줄 이도 없다.

아, 그렇다고 일반 양민을 학살한 적은 없다.
애초에 양이지사들인 만큼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만 골라다녔으니.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채로 얼마나 가려나..."

내 얼굴, 나이, 성격, 성별. 나에 대한 모든 것.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현장에는 즐비한 시체.

그래서 그런지 경찰도, 양이지사 측도 '사신' 이라고 불렀다. 양이지사를 죽이는 사신.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이가 소리 소문 없이 모두 죽이고 사라진다. 남겨진 단서도 증거도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다.

양이지사 측에서도, 경찰 측에서도 달가워하지 않는 듯 했다.

경찰... 진선조 측에서는 할 일을 대신해주니 좋아할 법도 하련만 딱히 그렇지도 않은가보다. 일반인이 할 일을 뺏어가 대신 하는 짓은 경찰을 기만하는 짓이라는가 보다. 어디선가 민중의 지팡이가 우롱당했다고 분노하는 일반 경찰도 있었다.

"... 민중의 지팡이는 개뿔."

그냥 싸우지 못해 안달난 거겠지. 진선조가 싸움에 미친 무장 경찰이란 건 양이지사측을 조금 누비고 다니다보면 심심찮게 귀에 들어온다.

경찰들은 사이코 패스, 양이지사는 막부 측 비밀인물로 생각한다만, 그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난 이미 미쳐서 죽었을 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들의 죽음과, 그들의 만행을 잊기에는 기억이 너무 또렸했다.

이건 어느 한 쪽이 죽지 않는 이상은 끝나지 않을 거다.



* * *



"죽어, 히지카타."

쾅!

"인마, 소고!! 죽을 뻔 했잖아! 어따대고 바주카포를 쏴?! 어딜봐도 적 같은 건 없잖아!!"

"쳇."

"쳇? 너 방금 쳇이랬지? 고개 돌리지마!"

"죄송해요, 히지카타씨. 멀리서 보니, 적인 줄 알았지 뭡니까."

"어딜봐서 적이냐?"

"그나저나, 히지카타씨. 이번에도 그 '사신'입니까?"

"아. 그런 것 같다.... 인마, 말 돌리지마!"

"살았으면 됐지, 뭘 또 쪼잔하게 따지고 그럽니까.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하루 이틀 내 목숨을 노리는게 네놈이니까 문제잖아!"

"아무튼 일하죠, 일."

진선조, 무장(武裝) 경찰. 반란분자를 즉결 처분하는 경찰. 귀신부장이라 불리우는 히지카타와 제 1부대 대장인 오키타 소고는 지금 진선조를 이끌고 현장에 나와있다.

"분명 반란분자와 살인사건을 주로 담당하는 게 우리 일이야. 근데 도대체 이놈의 사신이란 녀석은 우리 일거리를 뺏어가고 늘 꺼림직한 새 일거리를 주신단 말이지."

히지카타는 널부러져있는 양이지사 시체를 가볍게 툭 건드리며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물고는 불을 붙인다.

"뭐, 일거리를 완전히 없애는 것보다 나은 거 아닌가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내뱉는 소고의 말에 그가 인상을 찌푸린다.

"더불어서 칼부림을 한 지도 오래다. 우리가 무장 경찰이지, 시체 처리반이냐? 어쩌다보니 경찰이란 것 때문에 수습까지 맡고 있는 것 뿐이지. 이놈의 감식반들은 맨날 늦는다고."

"그렇긴 그렇네요. 그나저나 이전부터 걸리는 게 하나 있었는데 말인데요. 대수롭게 넘기기엔 좀 그렇네요."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이전에 말하기엔 확신이 안들었으니까요."

소고가 주저앉은 채 시체를 신경질내는 히지카타에게 보이며 말을 이었다.

"무슨 단서라도 찾았냐?"

"단서라기엔... 글쎄요. 이 시체, 검상 좀 봐요. 어때요?"

"글쎄다...... 좀.. 얕은가?"

"그리고?"

"게다가 검상의 위치도 일반 성인이 휘두른 것 보다 낮은 것 같은데......"

히지카타는 물고 있던 담배를 손에 들고 인상을 찌푸린 채 시체를 살피다 이내 경악한다.

"설마...!"

"예, 아무래도 '사신'의 정체는 왜소한 성인이거나, 어린 아이일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아니, 거의 어린 아이일 것 같네요. 검상의 깊이로 봐서는 힘이 딸려서 그런 것 같으니까요. 게다가 놈은 혼잡니다. 검상이 죄다 비슷하다 못해 거의 똑같은 검술 방식이니까요."

"... 하지만 단검을 쓴 경우도 있지 않나?"

"긴 검을 쓰는 사람들 중에서 단검을 쓴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을 처리하고 도망치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낮아지지 않을까요. 엄청난 실력을 가진 '괴물' 이 아닌 이상."

"말도 안되는 소리야. 고작 어린애가 망설임 없이 이 많은 사람들을 학살해왔다고?"

히지카타는 잘못 짚었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담배 꽁초를 발로 짓밟는다. 그에 소고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말을 부정한다.

"글쎄요. 히지카타씨도 어렸을 때, 소도 하나로 무뢰한을 도륙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거야... 그 땐, 아무생각 없이 죄책감이랑 분노에..."

"가능성은 있죠."

"임마, 네 말대로 어린애 위주로 조사를 한다 치자. 칼을 들고 설쳐대는 꼬맹이가 얼마나 있을 것 같냐?"

"이때까지 단서도 거의 없이 잡히지도 않은 거 보면, 꽤나 영리한 아이죠. 그런 애가 대낮 한복판에서 칼을 차고 다닐까요?"

소고는 쭈그리고 앉아 살피던 시체를 버리고 일어난다. 히지카타 역시 일어나 새 담배를 빼어문다.

"하긴... 그것도 그렇군. 후우... 그럼 이제부턴... 보호자가 없거나 떠돌아다니는 아이 위주로 수사하는건가?"

"일단은요. 가능성은 어디든 열어둬야 하니까, 그 외의 아이들도 수사해야겠죠. 아, 그리고... 양이지사 위주로.."

"이미 과격파 양이지사 위주로 수사하고 있다만, 떳다하면 죄다 끝나있지 않냐. 아무래도 혼자인 놈은 인원수가 많은 것보다 훨씬 빨리 자리를 뜰 수 있지."

"그래서 덫을 놓아볼까 해요. 이때까지의 행보를 봐선 어중간하게 위장한 건 걸려들지 않으니까, 미리 잡아놓은 양이지사들을 푸는 겁니다. 비밀리에. 위치 추적기라도 몰래 심어서. 밀착 감시 하자는 거죠."

"나쁘진 않은데... 웬일이냐, 만사 귀찮아 하는 녀석이 성실히 그런 생각을 다 하고."

"저도 시체 처리는 질리거든요. 게다가 녀석도 궁금하고요."

"그래... 잘하면 조만간 사신 쌍판대기 한 번 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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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5-22 03:05 | 조회 : 1,981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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