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가장 큰 실수.

이른 새벽, 벌떡 일어났다.

자기 전에 일어나야 된다고 세뇌를 했더니, 알람 같은 게 없어도 일어나야겠다는 시간에 일어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사람은 없으면 없는데로 익숙해지며 살아가는구나. 아직 몸이 새벽에 적응하지 못해 피곤해도, 깨긴 깼다. 이 정도면 알람에 적응한 인간이 참 많이 발전했다 싶다.

아무튼 어차피 아침도 못 먹겠다, 아까부터 불안해서 일어난 김에 한 시라도 빨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져왔던 여벌 옷으로 갈아 입고, 관상용이라는 검과 여관비로 거의 모든 돈을 소비한 홀쭉한 돈 주머니를 천 보따리에 넣어 어께와 허리에 대각선으로 묶는다. 그렇게 만든 천 주머니 위로 방금 넣은 검 자루가 삐죽 솟았다.

이렇게 간단하게 3분 만에 짐이 다 싸졌다. 내 전재산이다. 어쩐지 아홉살 인생의 허무함이 느껴지는 짐이다.

마을을 가로 질러 가면서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은 주민들과 인사를 나눴다. 꽤나 아쉬운 눈치였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먹을 걸 바리바리 싸준다. 덕분에 아침은 이걸로 해결이 됐다.

아이들 중에서는 내 외모, 흰머리와 붉은 기가 도는 검은 눈에 피하던 아이가 많았으나, 이틀만에 친해져 배웅하는 아이도 있었고, 더러는 떠난다는 말 한마디에 울음 터뜨리는 어린애도 있었다.

달래주고 싶었지만 갈 길이 멀어 어색하게 웃어주고, 손을 잡아주는 걸로 대신했다.
거기까지 애들을 봐주고, 조금 빠른 걸음으로 마을을 빠져나왔다.

다음 마을로 향하는데, 산길로 향하는 것과 산길을 멀리 돌아 가는 길이 있었다.

올 때는 길로 돌아왔는데, 지금은 몇시간이라도 단축해서 빨리 돌아가기 위해 조금 험한 산길을 택했다. 아야메가 걱정할까봐도 있지만, 어쩐지 불안했다.

큰 길로만 다니라던 아야메의 말은 애써 잊었다. 시골에 큰 길 따위가 어딨어?

"... 언제부터 내가 감성적인 아들이 된거지...... 보통 집을 나오면 이렇게 불안한가? 이야, 난 절대 가출은 못 하겠네."

괜히 혼잣말을 하면서도 걸음은 늦춰지지 않고 조금 더 빨라졌다.

계속 이렇게 걸으면 금방 지치겠지만, 빨리라도 걷지 않으면 불안한데 유일하게 할 수 있는거라곤 걷는 것 밖에 없다.

이러다가 어쩌면 도중에 쓰러질지도. 마라톤 선수가 아니라서, 페이스를 조절하는 방법 같은 건 잘 모른다.

걷고 또 걷고, 그렇게 산길이 끝나고 다시 마을이 나타났다.

이 마을만 넘기고 조금 더 걷다보면 우리 마을이다. 계속 걷고 또 걷고, 가뜩이나 산길을 넘어왔는데 쉬지도 않자, 조우리를 신었던 발은 흙투성이에 갈라지고 피가났다.

거기다 한 술 더떠 신발의 끈이 떨어졌다.

그리고 철푸덕 넘어졌다.
...진짜 아야메의 웃는 얼굴을 보기 전까진 안심이 안 될 것 같다.

"쯧, 이래서 조우리가 안좋아. 차라리 한국의 짚신이 나을 것 같은데."

나는 끈이 떨어진 조우리를 벗어, 두 손에 들고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래도 아까 산 길 이후로는 그렇게 험한 길은 없었다. 물론 산길에 비교적 험하지 않다는 거지, 비포장 흙길은 돌맹이들이 가득했다.

"그 돌들이 바닷가의 조약돌처럼 둥글둥글하면 얼마나 좋겠냐니만은."

발바닥이 어째 자꾸 따갑다 싶어서 봤더니 돌이 박혀있었다. 성질같아선 뽀개버리고 싶지만 그냥 던져버리는 걸로 화풀이 아닌 화풀이를 했다.

두번째 마을을 지났다. 서있기만해도 발이 따끔거린다. 그래도 아까보단 익숙해져, 감각이 좀 무뎌진 기분이든다. 그래서 쉬지않고 걸었다.

그렇게 계속 걷고 또 걸으니, 마을 입구가 보였다. 이제부턴 달렸다. 여기서부터 달리면 숨차서 쓰러지지는 않겠지.

그러다 잠깐 멈칫한 사이, 바람이 내 몸을 휘감는다. 그렇게 바람을 맞다가 일순, 매캐한 냄새를 맡았다.

뭔가 불에 타는 냄새다... 나무... 아니지, 나뭇잎이라도 태우나? 연기가...... 근데 어쩐지 쓰고 비릿한 향이 난다.

"이게 뭔 냄새야? 유곽 쪽 같은데, 설마 하루코 이모, 나뭇잎 태운답시고 엄한 거 태우는 건 아니겠지?"

유난히 덜렁대는 하루코의 상황을 모면하려는 듯한 미소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 유곽 쪽 맞네. 하루코 이모, 대체 무슨 일을 벌인건데 이런 매캐한 냄새가 나는 거야?"

조금 더 빨리 달렸다. 아니, 내가 달릴 수 있는 최고 속도로 달렸다. 숨이 막히고 입에서 단내가 났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내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왠지 불안한 느낌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차라리 정말 이모가 사고를 친 거라면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금세 유곽이 보였다.

"......!"

잠시 멈칫했다. 입이 벌려지고 눈이 커진다. 경악스러웠다. 돌로 뒤통수를 후려쳐진 기분이었다. 내가 알던 곳이 맞나 싶었다.

"뭐야, 이게... 갑자기 왜... 내가 잠깐 딴 곳 에 갔었다고... 고작 이틀만에... 이게 무슨..."

아직도 진행되고 있었다. 유곽이 군데 군데 불타고 있었고, 유곽 안에선 싸움... 아니, 학살.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길거리 무뢰배인가? 도둑? 강도?... 검을 차고 있잖아... 경찰? 아니, 제복같은 것도, 진선조로 보이는 이들도 없어. 감췄을 가능성도 있지만... 무장하지 않은 이들을 학살하진 못해. 양이지사? 몰라... 일단은,구해야...... 어떻게?"

나는 재빨리 짐을 풀고 내려놓았다. 그리고 관상용이라던 검을 잡았다. 분명 실전도 가능하다 했다.
검을 빼들었다.

스릉.

시끄러운 와중에 쇠울림이 나직이 울린다. 무슨 사정은 모르겠다만, 저쪽은 학살을 한다. 봐줄 이유가 없다.

아는 얼굴을 가진 사람, 이모같은... 가족같은 사람들이 시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있다. 스러진 꽃같이... 그 알록달록한 옷들이 반쯤 벗겨진 걸 보니, 죽어서도 더러운 짓을 당했나보다.

여긴 유곽이라고도 불리는 홍등가. 몸만 파는 시창가 따위가 아니다. 기생이지만 몸값이 높아, 어지간한 사람은 얼굴도 볼 수 없고, 예술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여인이다.

이런 취급을 받을 여인들이 아니란 말이다!

서걱.

살이 베이는 소리... 내 뒤를 덥치려던 사내를 망설임 없이 횡으로 그었다. 사내는 신음 한 번 내지 못하고 몸이 반쯤 두동강 났다.

"하루코! 유키코! 레이코! 아무도 없어?! 대답해! 신음소리라도 내란말야! 미츠키! 미유키! 세츠카! 대답해!"

서걱,
서걱,
서걱.

계속해서 베어넘기며 이모들을 목이 터져라 불렀다. 그러면서 시체들을 살폈다. 미세한 움직임이나, 숨을 쉬는 기색이 조금이라도 보일 것 같은 사람들을 찾아헤맸다.

하지만 벌써 시체 중에는 이미 화상 때문에 얼굴이 심하게 훼손돼, 알아보기 힘든 이들이 많았다.

"아, 아무도 없는 거야? 다들 당한거야...? 그럴 리가 없는데..."

적들을 계속해서 베었다. 베고, 베고, 또 베고. 검에는 벌써 피가 가득했다.

칼이 무뎌질텐데...

나는 칼을 휙 휘둘러 피를 털어냈다. 그러고 또 베는 걸 반복했다.

"왜, 왜, 왜에! 어째서, 어째서, 다들 죽인거야. 왜! 이들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앞이 잘 보이질 않아 거칠게 눈매를 쓸었다.

"왜, 왜, 왜에! 하필 내가 없을 때, 다들 죽은거냐고! 왜 내게 아무런 설명도 안하고! 무슨 일이 있었기에...! 누가, 누가... 대답 좀 해..."

대답할 이가 있을 리 없다. 말할 순간도 주지 않고 베어 넘겼으니까. 그런데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군."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봤다. 동시에 곧바로 몸을 돌려 더 다가오면 베어버리겠다는 각오로 온 몸을 긴장시켰다.

여차하면 튀어나갈 기세로.

"몰랐나? 소문으로 들리자면 흰 머리의 꼬맹이가 이 유곽을 수호했다고 들었는데, 헛소문은 아니었어. 그렇다곤 해도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한 때 동경했던 예전과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말이야!"

"날 알아? 난 본 적 없어, 네 놈 따위."

"호오, 모른 척하는 건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것보다, 그와는 다시 만났나?"

"그...?"

"사카타, 긴토키."

놈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어쩐지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저 놈은 그 백야차와 관계가 있는... 양이지사. 설마 그것과 관련해서 이런 짓을?

"백야차... 아버지라면 태어나서 본 적도 없어! 설마, 백야차에 관련해서 그런거라면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어!!"

놈의 얼굴이 미묘해지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린다.

"풉, 푸하하하하! 아버지? 아버지라...... 일이 미묘하게 돌아가는군.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이걸 어떻게 봐야하는 거지?"

도대체 백야차와 나의 관계를 어떻게 알고 있고, 어떤 식으로 알고 있는 거지?

"너, 뭐야. 뭐하는 녀석이야."

"추가로 말버릇도 나빠졌군."

"네놈들이 예의 운운하지마. 누구냐고 물었어. 대답 없으면 그냥 벨 거야. 도대체 아무 이유도 없이 이들을 죽인 이유가..."

"아아, 모르는 건가? 우린 양이지사다. 죽인 이유가 뭐냐고? 잘 들어라 꼬맹아, 바로 얼마전까지 이 유곽의 지원금을 썼었지."

머리가 멍해졌다. 지원금을 썼다고? 양의지사가, 유곽의 지원금을?

내통, 그래... 아야메가 내통을 했어, 양의지사와. 고작 지원하는 정도지만... 하지만 진선조도 아니고,

"왜......?"

내 '왜' 한마디에 사내는 곧바로 알아들었다.

"내통한 걸 알고 있었나? 모를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말야, 조만간 걸릴 것 같은 분위기라서. 잡히지 않게 꼬리를 좀... 자른거지."

"꼬리를... 잘라? 그러고도 경찰의... 진선조의 처벌이.."

말하다 입술을 악물었다. 말을 잘못했다. 양이지사에게 경찰은 별 소용 없다.

애초에 막부와 싸우는 녀석들이다. 정부에 반기를 든 나라의 반역자. 싸움이 터져도 진선조에게 잡혀가도 그들에겐 보복이 되는 게 아닌, 그저 일상 아닌 일상이었다.

게다가 경찰의 힘으로도 모두 잡을 수 없다. 그렇기에 골칫덩이라 하겠지. 골치아프고 잡기도 힘든 골칫덩이.
그런데,

"난, 사무라이, 양이지사를 그리 나쁘게 보지 않았어. 외세의 침략을 막고, 나라를 지켰고, 막부를 대신해 천인과 싸우고, 지금도 뜻을 굽히지 않고 활동하니까. 경찰이든 양이지사든 나라를 지키자는 마음은 똑같은 줄 알았으니까. 근데 지금 뭐하는거야? 너희는 뭘 위해 누구랑 싸우는 거지?"

놈은 으쓱하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당연히 백성을 위해 막부와 천인을 상대로 싸우지. 뭐, 평화로워진 지금, 그 의미는 거의 무색해졌다만."

"여기 사람들은 백성이 아냐?!"

"맞지."

"그럼 왜!"

"큰 걸 위해 작은 걸 희생이라 하면 알아듣나?"

"몰라! 큰 걸 위해 작은 것 부터 지켜야 하는 거 아냐?! 네 편이었다면 끝까지 지켰어야지! 꼬리를 잘라? 그러고도 너희 체제가 유지될 것 같아?"

"틀린 건 아니다만, 우리는 이렇게 유지되어 왔다. 그나저나.. 이거이거, 꼬리를 자르러 왔다가 몸통을 잃게 생겼네."

사내가 반쯤 줄은 무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튼... 볼 일은 끝났다. 돌아간다!"

"누구 맘대로!"

"여기 정리 안 하나, 기생집... 꼬맹이?"

녀석이 비꼰다.

"네녀석들을 먼저 정리한다."

"역시. 당신이란 사람은!"

사내가 웃으며 유곽을 빠르게 벗어났고, 나머지 이들도 따라 나간다. 나 역시 곧바로 쫓아가려 했으나 포기했다. 분하지만 그의 말대로 여기 정리가 우선이다. 만에 하나, 산 사람이 있다면... 돌봐야한다.

쓰러져 울 여유도 없다. 아직 아야메는 찾지 못했다. 설마 얼굴이 훼손된 시체는 아니겠지. 아닐 거야.

울컥한 마음을 억눌렀다. 계속 움직였다. 앉으면, 울 것 같았고, 울면 다시 못 일어날 것만 같았다. 내 실수였다. 이깟 검이 뭐라고.

조금 더 일찍 돌아왔더라면, 그랬더라면... 아니, 아예 심부름을 가지 않았더라면...
자책해 봤자 무슨 소용이야. 이제와서...

"하아아아."

억지로 참고 입을 열자 울음기 섞인 한숨이 튀어나온다. 가슴이 답답하다. 전보다 더 답답해졌다. 숨도 못 쉴 정도로 가슴을 짓눌렀다. 아니, 아프다. 찢겨질 듯 아프다.

"하아, 하아..."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 앉았다.

"아야메... 죽은 거 아니지? 어린 자식 남겨두고 먼저 죽는 법이 어딨어. 아야메, 어머니... 어, 엄마."

중얼중얼거리다, 정신이 번쩍 든 것처럼 갑자기 소리질렀다.

"엄마... 어딨어, 어딨어요?! 대답 좀... 대답 좀 해봐요!나, 나는 여기 있는데. 나는 여기 그대로... 있는데."

거리감이 느껴져도, 독립을 바랬어도, 이런 식의 헤어지는 건 원하지 않았다. 이건, 이런 건 바라지 않았어.

눈앞이 자꾸만 흐려진다.

"카오루."

몸이 굳었다. 바로 앞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귀를 의심하면서도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익숙한 옷, 얼굴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야메... 살아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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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5-18 00:42 | 조회 : 2,197 목록
작가의 말
나른한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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