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일상의 여유로움.

벌써 9살이 다 되어간다.
요새는 사부랑 대련하는게 통 재미가 없다. 언제가나 하는 시간이 벌써 2년이 훌쩍 지나니 어쩐지 반복되는 검도 수업이 익숙해지니 재미가 없어진 것이다.

사부는 스폰지가 물을 흡수하는 것 처럼 금방금방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내 실력에 처음에는 기뻐하며 눈을 반짝이며 가르쳤지만 이제는 기가 좀 질린 듯, 이후로는 내가 먼저 대련을 청하지 않으면 딱히 먼저 청하지 않았다.

뭐, 딱히 더 이상 하고 싶지도 않았다. 배울 것은 대부분 배웠다.
기초적인 검도 자세부터 시작해 도장만의 검술까지. 머리가 어린애가 아니다보니, 한 번 배운 건 웬만하면 잊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지금은 실력이 녹슬지 않도록 기초적인 부분과 대련만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어린애다보니 완력에선 성인을 이길 수가 없었고, 사부는 밀린다 싶으면 억지로 완력으로 이겨버리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그나저나 여긴 일본의 에도 시대치고 우리 동네는 꽤나 평화롭고 여유로웠다. 하루의 일상이 내일로 반복된다.

거기에 난 벌써 일본인이 다 된것 같다. 처음엔 자존심 상한다고 차라리 일본 옷이 아닌 우주인, 그러니까 천인들처럼 서양복을 입겠다고 때를 썼는데, 지금 내 복장은 검은색 목풀라 위로 새하얀 키모노를 입었다.

그래, 인정한다. 이쁘긴 이뻤다. 특히 아야메가 직접 수를 놓은 하늘색 실로 눈모양 결정, 얼음 결정의 소매 끝과 옷자락 끝이.

그리고 아야메는 이 유곽의 최고 기녀가 되었다. 아마 어지간한 갑부가 아니면 몸은커녕 얼굴 한 번 보기 힘들 정도다.

그게 가장 맘에 든다. 아무래도 새로운 아버지가 생기거나 열 살에 또 새로운 동생이 생기는 건, 사양이니까. 무엇보다도 내 또래일 아저씨한테 아버지라고 부르는 거, 왠지 소름 돋거든.

아무튼 이 일상이, 너무나 평화로워 지루하기까지 한 일상이 나는 꽤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가끔씩 더해지는 소소한 일상까지. 이를테면,

"흰둥아! 도장으로 와라, 대련이다아!"

"어차피 질거면서 왜 자꾸 덤비는데..."

"시, 시끄러! 오늘 만큼은 이겨서 유리한테 프로포즈 할거니까!"

"... 요컨데, 네 사랑을 위한 밑배경이 되라는 거냐."

"당연하지!"

"그런다고 좋아할련지는 모르겠지만, 기꺼이. 앞장서라."

하얀 괴물에서 밀가루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흰둥이라는 별명으로 진화했다.
아무튼, 이렇게 나한테 죽자고 달려드는 놈이 내 소소한 재밌거리다.

얼마 전에 알게되었는데, 녀석의 패거리 중, 유리라는 여자아이를 세키가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웃긴 사실은 유리는 얼마전 나에게 고백했고, 당연히 난 거절했다. 왜냐? 굴곡 없고, 젖살도 안 빠진 어린아이 취향이 아니라서 말이다. 나는 로리콘이 아니니까!

그래, 내 안에 아저씨있다.

그래서 아무튼, 세키란 녀석은 유리 앞에서 계속 대련을 신청하면서 유리의 관심을 돌리려는 거다.

거 참. 본의 아니게 삼각관계가 되버렸다.
솔직히 어찌되든 상관없는데 세키 녀석이 먼저 싸움을 걸어도 나한테 이긴 적이 한 번도 없으니, 유리는 날 더 좋아하고, 세키에 대한 이미지는 더 나빠졌다.

뭐, 그렇다고 져 줄생각은 없다만.

"크! 분하다. 조금만 더 했어도 이겼을텐데!"

"아니, 그건 무리. 아직 사부도 못 이기면서. 기준을 좀, 아주 많이 낮춰보는 건 어때?"

"시끄러! 유, 유리야. 그래도 오빠 멋있었지?"

"카오루 오빠! 멋져요! 저랑 사귀면 안되요?"

"싫은데."

"유, 유리야~"

"유리, 넌 세키 좋아하지 않아? 나보다 덩치도 크잖아."

"아니요? 전혀요! 전 카오루 오빠만 좋아요. 어른스럽고... 네? 그러니까 사귀면 안돼요?"

실제로 어른이지만.
어쟀든, 이렇게 확인 사살까지 시켜주면 늙은이의 얼굴이 꽤나 볼 만하다는거다.
하지만 그마저도 질린다 싶으면 돌아선다.

"야! 어디가!"

"집.. 유곽에. 나 간다!"

"야! 흰둥이! 당장 안와?! 야!"

이렇게 버럭버럭 소리지르는 늙은이를 뒤로하고 집으로 간다.

오늘은 손님이 꽤 많은 듯 했으니, 오늘 집안일과 잡일, 허드렛일까지 전부 내가 해야할 듯 하다.

거기다 요새는 검술 실력이 부쩍 늘고 몸이 단단해져, 주정 부리는 밉상 손님들은 내가 나서서 처리하고 있다.

내가 처리하는 걸 아야메는 딱히 반가워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하긴, 다칠까 걱정 안 되는 부모가 어디있겠냐만은, 아야메는 내 실력을 잘 모른다. 아직 사부를 넘어섰는지도 잘 모른다.

나도 딱히 얘기 할 맘은 없다. 아야메에게 아직은 내가 투정 부릴 아이라고 해두는 게 내 마음도, 아야메에게도 편하다.

"카오루 잠 자니? 아직 잠 안 자면, 이 주정뱅이 좀 방 안에다 처박아 주련?"

"아, 하루코 이모. 곧 갈게요."

나는 방 안에 들어가 주정부리는 손님의 뒤로가 겨드랑이에 손을 껴 들어올렸다. 손님이 심하게 거부하며 버둥거린다.

"네 놈은 또 뭐야?! 네 까짓게 감히 날 들어? 당장 안 내려놔? 내려놓라고!"

"이 여관에서 밉상 손님 처리하는 놈입니다."

"네 놈은 또 뭐야?! 네 까짓게 감히 날 드는 거냐?!"

"......"

아, 무한 반복의 주정이구만. 귀 아프네... 기절시킬까? 숨을 순간 헉하게 만드는 곳이... 뒷목이랑... 배지?

퍽.

뒷목은 좀 무서우니 복부를 때렸다.
......근데 기절을 안한다. 어라?

"큭! 네놈이 감히 날 때려?!"

퍽.

퍽.

퍽.

"죄송합니다.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죄송합니.."

아, 아니... 이게 아닌데... 하라는 기절은 안하고, 아저씨가 쓸데없이 공손해졌다. 아무래도 내가 꼬맹이라 힘이 부족한가 보다.

좋아, 이번엔 죽일 만큼 강하게-

퍽!

남자가 축 늘어진다.
이거... 죽은 건 아니겠지?

코에 손을 대보니 숨은 쉰다.
다행이다, 안 죽었어.

나는 남자를 짊어지고 방을 나서, 남자의 숙소로 데려갔다.
기절시킨 건 처음이다만, 안 시켰을 때 발버둥치던 남자들보다 축 늘어진게 무겁긴 해도 의외로 옮기긴 쉬웠다.

앞으론 다 기절시켜버릴까?

남자의 숙소에 도착하자 깔아논 이불에 휘딱 던져 놓고 나올려다가 내가 나름 인정있는 사람임을 자각하고 이불까지 덮어주고 토닥토닥거려주고 나왔다.

아, 남자의 귓속에다 친절히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물론 기억하는 지는 모르겠다만, 꿈결에 듣는 이도 있다고 하니까.

"아저씨, 배에 멍들었잖아... 그거, 아저씨가 그런거다? 막 술먹고 취해서 이리저리 부딪혔어. 말리느라 꽤 힘들었으니 곱게 나가라? 치료비 달라하기만 해봐... 전치 4주비 내주고 전치 4주 만들어줄거야. 그럼 잘 자!"

다시 한번 남자의 배를 토닥여준다. 남자는 악몽을 꾸는지 인상을 찌푸린 채 끙끙거리며 연신 신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난 방을 나왔다.
마당에서 검을 휘둘렀다. 답답했다. 나만 다르다는게. 그걸 나밖에 알 수 없다는 게. 어디가서 하소연 할 수도 없기에 마구 검을 휘둘렀다.

잡념으로 시작해 든 검은 곧 잡념이 사라지고, 오로지 검에만 열중했다. 그래서 검이 좋았다.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몸만, 그저 몸만 움직이면 된다.

"후우... 아... 다시 씻어야겠다. 물 다시 받아달라 그래야겠네.. 결국 오늘도 새벽이 다되서 자겠네."

뜨거운 물을 가득 받은 탕에 발부터 천천히 집어넣으며 몸을 완전히 입수시켰다. 몸이 노곤해졌다.

"하아아..."

욕실 위로 자그마한 창문이 있었는데, 달을 볼 수 있어 좋다. 여기에도 똑같이 떠 있는 달을 보고 있으면, 예전 생이 생각난다.

"전생의 내 몸은 죽었으려나... 조카야, 많이 슬프냐?"

당연한거지만 대답은 없다.
어이쿠, 이 버르장머리 없는 조카놈 예전엔 말대꾸를 막 하더니 지금은 아예 무시네.

아... 나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잘한다.
탕에서 일어선다.
빨리 자야지.. 내일 또 일할려면.
9살 인생 참 바쁘다, 바빠.

7
이번 화 신고 2017-05-14 15:10 | 조회 : 2,205 목록
작가의 말
나른한 고양이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