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이 선생님이 맞을까...?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투정이고 나발이고 지금은 저 사람이
나를 위해 빌고있다는 것 밖에 생각나질 않는다.
문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떨리는 목소리가
그의 것이 맞을까?
내게 떠나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나를 붙잡는 저 사람이 내 선생님이 맞을까?
문을 박차고 나가 그 얼굴을 확인했다.
내사랑,
나 때문에 울고 있는,
내 하나뿐인 사랑.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내게 사랑한다 말하지 않아도
그 손끝에서부터 사랑이 고함치고 있는 사람.
"선생님...."
방에서 나오자마자 그와 눈이 마주친다.
그는 언제나올지도 모르는데도 방 문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에게 한 발자국 발을 떼자 뒷걸음질 친다.
선생님이 뒷걸음질 치는 모습은 난생 처음본다.
그런데...
"...울어요?"
눈물 한 방울 없었지만 그는 울고 있었다.
사무치는 슬픔이 그의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울부짖음이 여기까지 들려온다.
나 때문에 운다, 저 사람이.
평생 눈물 한 번 안흘린 사람이
나 하나때문에 저리도 슬퍼한다.
내가 떠날까봐.
"나 어디 안가요."
더 가까이 그에게 다가갔다.
이제는 뒷걸음질 치지 않는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코앞에 다가서자 그의 불규칙한 호흡이 느껴진다.
가쁜 숨을 가다듬고 그가 천천히 입을 뗀다.
"나한텐... 네가 예술이니까."
"......."
"예술이 없으면 더이상 난 아무것도 남지않아."
그가 나를 꽉 끌어 안았다.
애정이 담긴 포옹이라기 보다는,
어딘가 결핍되어 있는 사람의 마지막 몸부림 같았다.
"그러니까 다신 그런 말 하지마라...."
"선생님..."
가만히 손을 올려 그의 머리를 쓰다듬없다.
푸석한 머릿결이 그날따라 유독 처량해보였다.
거칠게 자라난 수염은 평소보다 더 관리가 안되어있었고,
그의 목소리 역시 형편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날의 선생님은 내가 본 그 어떤 모습들 중
가장 감동적이었다.
"네가 없는 예술은 생각해 본 적도 없어."
그 말이 나를 울린다.
나는 결국 주저 앉아서 얼굴을 부여잡았다.
왜 그렇게까지 생각해,
왜 그렇게 불안해 해.
"그런 뜻 아닌 거 알잖아요....."
괜히 화를 냈다.
소리를 지르며 왜 혼자 그렇게 상상하냐고 울부짖으며 화풀이를 했다.
그래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그에게 큰 소리를 낸 적이 있었나.
아마 놀랄 법도 한데 미동도 없다.
"알면서도 불안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는 나와 눈높이를 맞춘다.
헤어나올 수 없는 눈동자에 빠지기 싫었다.
그럼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난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으니까.
애써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시선은 올곧이 나를 향해.
"언제나 불안했다."
"......"
"네가 나를 떠날까봐."
"내가.....!"
내가 그렇게 믿음을 주질 못했나.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나.
나는 불과 며칠전까지만 해도
내가 그렇게 생각했으면서 우습게도 그에게 화내고 있었다.
우리는 왜이렇게 항상 불안해 해야할까.
불완전한 안전장치를 한 상태로 외줄타기를 한다.
조금이라도 누구 하나가 등을 돌리면 그대로 나는 추락해버릴 듯 휘청거린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안정적으로 줄을 탈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의 확실한 그 태도.
나밖에 없다는 그 태도.
그리고 나의 복종.
그것때문에 우리는 안정될 수 있었다.
이제야 알았다.
우리의 사랑이 평평한 길이 아니라 사실은 외줄 위 였다는 것을.
그래서?
그래서 나는 그 위험함을 감수하지 않고 도망칠 것인가?
아니.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예술 뿐인데..."
"......"
"네가 없으면 아무것도 안돼."
잘도 이런말을 한다.
나는 조금 부끄러워질 것 같은데, 그는 진심으로 내게 말한다.
내가 없으면 자기 자신도 없다고.
"왜... 왜그렇게 생각해요."
"......."
"자꾸 내가 떠날거라느니, 그런거 왜 생각하는데!!!"
오늘따라 자꾸 흥분하는 날 그는 말리지 않는다.
큰소리는 커녕 그의 앞에선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조심스럽던 나였는데
완전히 폭발하듯이 쏟아냈다.
"난...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단 말이에요."
울면 안돼.
왜 내가 울어.
울고 싶은 사람은 선생님일텐데.
"나는 당신이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아....."
벌거벗고 길거리에 내려앉아도 괜찮아.
당신이란 존재 자체만 내 옆에 있어주면.
"내가 안돼."
그가 단호하게 말한다.
"감히 너를 안을 수가 없어."
"....왜 자꾸 그렇게 생각하는 데요."
"너를 포기할 수 없으니까."
예술을 포기한다는 것,
그의 모든 것을 놓아버린다는 것.
결국 우리는 그 안에서 엮인 채 벗어날 수가 없다.
예술이 없다면 결국 우리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아.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그대는 차마 나를 바라볼 수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