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또각거리는 발소리.
보지 않은 게 거의 10년인데, 나는 발소리 하나만으로도 그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림을 포장한 종이가 바스락 거릴만큼 꽉 움켜쥐었다.
얼굴을 보지 않았음에도 토기가 쏠린다.


"주영아...."
"친한 척 마시죠."


싸늘하게 대꾸하자 아무말 앉고 내 앞자리에 앉는다.
여전히 초록빛을 머금은 그 윤기나는 머리카락은 짧아져있다.
어깨를 아슬하게 내려오는 그 머리가 풍성하게 내 앞을 가렸다면 아마 더 화가 났을 지도 모른다.

물기를 머금은 눈은 날 바라보지만 그것은 텅 비어있다.
어쩌면 내가 그녀에게 그것을 잃어버려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고.
우리가 평범한 모자는 아니잖아요?



"용건이 뭐에요."
"잘..지냈니?"
"내가 찾아오지 말랬잖아."
"엄마가...많이 미안해."
"난 애초에 태어나질 말았어야 했는데, 그렇지?"
"선생님도...너 많이 걱정하셨어."


뒤엉켜 엇나가고 있던 대화의 끝에 선생님이 들린다.
감히 누구마음대로 당신입에 선생님을 올려.
화가 치밀어 올라 당장이라도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그래도 피는 피라는 것인지,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부른 이유가 뭐냐니까."


애써 침착하며 낮게 목소리를 깔자 그제서야 그녀가 움찔한다.
이제와서 죄책감에 나를 찾았다는 것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것임을 본인도 잘 알것이다.

도저히 듣고싶진 않았지만, 선생님을 위해서라도 나온 자리이니만큼 시간은 떼우고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아, 빨리 들어가서 선생님이 이 그림 끝내신 기념으로 날 안아주셔야 하는데.
그 부드럽고 달콤한 피부를 다시 맛봐야 하는 것인데.
거친 수염을 손으로 매만지면서 다른 손으론 부드럽고 또 부드러운 그의 피부와 그곳을 쓰다듬겠지,

그리고 그는 여전히 나를 깊은 눈으로 쳐다보며 내 안을 가득 채우겠지.


순간적으로 황홀한 그 상상에 빠져 그녀가 무어라 말하는 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뭐라고요? 하자, 그녀는 가히 충격적인 말을 내뱉는다.


"나...너희 아빠랑 다시 같이 살아."
"하,"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뻔하지 또 먼저 알아내고 아버지를 찾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런 사람을 받아줬을 것이고.
이러든 저러든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앞으로 둘이서 백년해로 하면 되는거지.


"그래서요?"
"주영아..."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딱 잘라 말했지만 그녀는 자기 두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말을 늘어놓는다.
자기가 그 떈 우울증 때문에 말이 아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한 없이 후회된다, 나도 많이 힘들었다....

쓸 데없는 말들 뿐.
예술도 아닌 그 말들을 내가 언제까지 들어주어야 하지?


"주영아...우리..같이 살자."



미친건가? 제정신이야?

더이상 못 들어줄 것 같아서 벌떡 일어났다.
들어 줄 가치도 없는 얘기를 하려고 나를 불러냈어!
분노가 핏속에서 솟구쳐나올 것만 같다. 온몸이 뜨거워진다.
사람에게 이토록 분노할 수 있다는 것을 이 때 처음 깨달았다.


그림을 던지듯이 그녀에게 주고 카페를 당장 뛰어나왔다.
뒤에서 나를 소리쳐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그대로 작업실로 뛰어들어왔다.

만나지 말았어야 해.
저 년이 우리 선생님을 홀린거야. 그 텅 빈 에매랄드 색의 눈동자는 존재하지 않아.

내 세상은 이제 오직 선생님 뿐이다.

생을 마감하는 순간, 나는 선생님의 그림 위에 흩뿌려질 것이야.
난 그렇게 오로지 그만을 쳐다보며 살 것이다.
저런 여잔 더 이상 만나지 않을 거야!



"일찍 왔네."


선생님이 웬일로 내가 온 소리를 듣고 현관까지 나오셨다.
알게모르게 날 많이 걱정하셨던 모양이다.
당장 달려가 선생님 품에 안겼다. 나를 다시 지옥으로 끌고가려고 했어요. 나를 목졸라 죽이려고 했어요!

품안에 나를 가둔 선생님은 나의 소우주.
그 안에 나는 블랙홀에 빨려들어가 산산히 찢겨져도 좋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왜...왜 날 만나게 했어요?"
"가족이니까."
"그런 거 난 없어요."
"있어. 없느니만 못할 뿐이지."


그는 날 데리고 쇼파로 데려갔다.
부엌에서 한창 부스럭대던 그는 차를 끓여와 내게 주었다.
차마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온지 아세요?"
"대충."
"내가 갔으면 어떡하시려구요?!"


그는 왜 나를 그런 사람에게 보낸거야. 도대체 왜.
내가 마음이 흔들려서 그 여자랑 살겠다고 나갔으면 당신은 어떡하려고!!


"아니까."


그의 간단한 그 대답에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도저히 그를 이겨낼 수가 없다.
비오는 그날, 달려들어간 그의 작업실처럼.

나를 평생 옭아매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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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3-10 10:30 | 조회 : 1,738 목록
작가의 말
천재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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