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장을 보고 돌아왔다.
굳이 내가 오래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그래도 선생님께선 요즘은 많이 봐주신다.
확실히 변하셨다. 예전의 선생님과는 많이...
"선생님, 저 왔어요."
안으로 들어가자 내가 장을 보기 전 부터 주시하고 있던 밑그림 그대로이다.
무슨 일이시지...? 심각하게 생각에 잠겨있는 듯해서 차마 그의 곁으로 다가갈 수 조차 없었다.
"이리와."
어색하게 부엌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그런 나를 어떻게 알았는지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그는 나를 불렀다.
그의 그런 애정어린 행동 하나하나가 날 흥분시킨다.
아직 그림이 완성되려면 멀었다는 사실이 날 숨막히게 만들었다.
"어떤 색."
머리를 가리키며 그가 묻는다.
밑그림만을 보면 한 여성을 그린 것 같다.
가녀린 듯 하면서도, 보는 사람을 푸근하게 해주는...엄마같은....
"...금발이요."
엄마라는 존재는 생각하기도 싫다.
난 그런 사람 몰라.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아무 색이나 대답했다. 최대한 그녀가 생각나지 않는 색으로.
"거짓말을 하는군."
아, 그는 어쩜 이렇게 나를 잘 알고있는 것일까.
황홀함과 동시에 두려움이 엄습한다. 거짓말을 했다고 나를 미워하면 어떡하지.
내게 눈길한 번 주지않은 선생님이었으나 그의 그런 숨결마저 사랑스럽다.
무슨 생각으로 내게 물어본 걸까. 전혀 생각이 나지 않다면 다른 그림을 손을 댔을 그인데..
"아무색이나..다 괜찮아요. 선생님 그림은."
그만 나도 내 그림을 그리려고 뒤돌아서려는 찰나, 차박, 그의 붓소리가 들렸다.
물감을 묻히는 그 찰박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어떤 색을 썼을까.
"왜요..?"
짙은 고동색과 녹색을 섞는다.
왜. 왜 그는 이 그림을 그리는 거야?
싫다. 당장이라도 그녀가 떠오를 것 같아.
그 지긋지긋한 녹색 빛깔의 머리색은 토기가 쏠릴 정도로 역겨웠다.
더 이상 보고 있기가 힘들어 뒤돌아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일부러 더 거칠게 연필을 쥐고 스케치를 해 나감에도 그는 역시나 미동도 않는다.
말캉거리던 연습실 안이 무던히도 삭막해져 버린다.
입 속에 모래알갱이가 돌아다니는 듯 하다.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기에 나는 그가 두렵다.
그 두려움 마저 사랑하는 것이 문제지만.
제 풀에 지쳐 잠이들 때 까지, 그는 그 그림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왜요, 선생님.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