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 (完)

어두운 방안에서 휘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고 있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망할!!!


딱딱한 기계음에 휘는 휴대폰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지난 2년, 휘는 계속해서 설에게 연락했다.

지금까지 전화를 걸었던 번호는 조금 전 처럼 없는 번호라는 이야기가 나온다거나, 받아도 이미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버린 번호였다.

그렇게, 설에게 연락을 하면 할 수록 휘의 상태는 점점 심각해졌다.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고, 온종일 방에만 틀어박혀있다가, 매니저의 손에 끌려 나오기라도 하면 항상 다른 사람을 설과 착각해 피해만 주었다.

집에만 있을 때면 이렇게 온종일 연락을 하거나, 혼자 울거나 중얼거리는 것이 꼭 미친사람 같았다.

휘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설이 쓴 일기를 전부 읽었다.

좀 더 잘해줄걸, 있을 때 잘할걸.

설의 마음같은건 전혀 신경쓰지 않은 내가 좋아한다고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쾅쾅쾅


문열어!!!


매니저의 목소리였다.

얼마 전, 휘는 매니저와 언성을 높였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휘에게 그래도 일은 해야하지 않겠냐며, 정신차리라고, 이러다 죽어버릴 것 같다고 말하는 매니저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왜 해어지라고 했냐고, 그 말만 안했으면 일이 이렇게 까지 되지는 않았을거라고 소리쳤었다.


문 열라니까!!


휘는 무시했다.


찾았다고!! 설이!!

뭐?


찾았다고? 어떻게?

휘는 쓰레기장같은 집을 파해치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안에서 진동하는 썩은 내에 매니저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지금 중요한 것 휘의 상태였다.


어떻게, 어떻게 찾았어? 아, 아니, 지금, 지금 어디있는데?

이거 좀 보고, 일단 들어가자.


매니저는 휘에게 탭을 건내주고는 휘와 함께 그의 집안으로 들어갔다.

탭에는 뉴스가 있었다.

<인기 여배우 시안의 열애설, 상대는 일반인?> 이라는 제목의 뉴스였다.

밑으로 내려가 보니 사진이 있었고, 그곳에는 시안과 익숙한 남자가 함께 웃고 있었다.


이건... 설이잖아... 왜..

일단 열애설 터졌으니, 오늘 회사로 불려올거야. 같은 소속사니까 회사로 가 보자. 만나서 좀 물어보자.

... 뭘?

뭘 물어보긴, 설이 지금 어디있는지나, 아니면 만날 수 있는지...

이젠 설인 나 안좋아 할거야..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2년 내내 설에게 매달려 일을 하나도 못한 주제에.

매니저는 잔뜩 똥씹은 표정으로 휘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금 설이 널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오해를 풀어란 말이야.

오해..?

그래 임마.


오해라고... 그런 핑계를 대며 만나달라고 하면 만나줄까.


너 만나고 싶어 했잖아. 지금 아니면 언제 기회가 올 지 모른다고.

......



오랜만에 만난 시안은 2년 전 보다 더 예뻐져 있었다.

물론 돈의 힘이겠지만, 휘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어머, 휘 선배님 아니세요? 잘 지내셨나요?


능글거리는 그녀의 웃음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휘는 예전부터 시안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저런 태도부터 은근히 돌려까서 속을 다 뒤집어 놓는 거에 한 두번 당해본 게 아니었다.


너... 열애설 났던데.

아, 맞아요! 설마 그거 물어보러 오신거에요?

......

귀엽죠? 이름은 설이라고 하는데, 처음 만났을 때 꼭 주인 잃은 강아지 같아서 몇번 머리 쓰다듬어 주고 맛있는거 많이 먹여줬더니 금방 잘 따르더라구요.

...... 언제, 언제 만났는데..?

네? 흠... 2년 전쯤에요.

.......

왜요?

.. 혹시.. 연락 할 수 있을까...

설이랑요? 왜요? 무슨 사인데요?

전부터 알던 사이야. 잠깐 오해한게 있어서... 그, 아직 오해를 못 풀었는데..

오해가 아니죠, 선배님.


싱긋 웃는 시안의 얼굴에 휘는 말을 멈췄다.


다 들었어요. 설마 애인한테 그런 소리를 하다니, 너무하잖아.

그, 그건...

그런 소리를 듣고도, 그렇게 상처를 입어도 그래도 곁에 있었다니. 정말 선배님에 대한 사랑이 엄청났나봐요.

.....

그런데 그렇게 열애설을 터뜨려 놓고, 미안하다는 말은 커녕 변변찮은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면서요?

아, 아니야...

선배님한텐 아닐 지 몰라도 설이에겐 충분히 맞아요. 엄청 상처받았던데-


시안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더 골려줄까 하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못하도 진땀을 빼며 이리저리 시선만 돌리는 휘의 모습을 보는 것도 꽤 괜찮았다.


아, 그러고보니 저 촬영이 있어서요. 실례 할게요~


시안이 휘를 지나쳐 저 멀리 사라질 때 까지 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매니저는 휘의 어깨를 쳐 주며 회사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차로 가는 동안에도, 숙소로 가는 중에도 휘는 내내 멍한 표정이었다.

차라리 울고 소리치는게 낫다고 생각한 매니저는 숙소에 도착하고 일단 푹 자고 일어나라고 했다.

휘는 순순히 침대에 누웠다.

설의 마지막 흔적인 설의 일기장을 손에 꽉 쥐고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인 마냥 품에 꼭 안았다.

오늘도 설은 꿈에 나오질 않았다.



잠에서 깬건 갑자기 울린 휴대폰 때문이었다.

누구지, 매니전가


여보세요..


거의 죽어가는 목소리로 휘는 전화를 받았다.


[...ㅡ오랜만이네요, 선배님.]

아...


2년 전, 휘와 열애설이 터진 여하였다.

매니저를 통해, 열애설이 터진 이후, 그녀도 애인과 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 왜

[할 말이 있어서요, 전해줄 것도 있고]

.... 어디서?

[주소 찍어서 문자 보낼테니까 거기서 만나요]


전화가 끊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자가 도착했다.

휘는 굼뜨게 움직이며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여하가 알려준 곳은 작은 식당이었다.

깔끔한 인테리어에 사람도 별로 없는, 딱 그녀가 좋아할 만한 곳이었다.

먼저 도착한 여하가 휘를 반겨주었다.

휘는 여하의 맞은편에 앉았다.


꼴이 말이 아니시네요.

......

... 선배님도 보사다시피 제 성격이 뭐같잖아요? 그렇다 보니 친한 사람도 거의 없죠. 그 얼마 없는 사람들 중에 하나가 선배님이구요.

......

그런 사람이 이렇게 된 꼴을 보니 참 마음에 안드네요.

그래서.. 무슨 말을 하자는 건데..

자요.


여하가 휘에게 작은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그 안에 든 건 초대장이었다.


이게 무슨..

매니저님한테 대충 이야기 들었어요. 왜 이렇게 됬는지.

어..?

일주일 후에요. 더 이상 말씀 드리는건 안되요. 그리고 꼭 나오세요.


횡설수설 하는 말에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휘는 가만히 초대장을 바라보았다.

일주일 후 열리는 파티였다.

연예인과 일반인들끼리 모이는 친목도모회 같은 건가.

딱히 이런 곳에 갈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여하와 친해지고 나서 그녀가 여러번 도움을 주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래, 잠깐 얼굴만 비추자.



매니저에겐 여하가 여는 파티에 간다고 말했다.

매니저는 자기가 데려다 주겠다고 했고, 파티에 가는데 이게 무슨 꼴이냐며 수염도 밀어주고 엉망이었던 머리도 대충 손질해 주었다.


역시, 얼굴이 있으니까 이렇게 해도 봐줄만 하네.

... 형.

어?

... 형은 알고 있었지? 내가 설이랑 안 헤어진거.

.... 니가 연애를 하고 있는건 알고 있었어. 오히려 모르는게 더 이상하지. 근데 그게 설이 일줄은 몰랐지.

그래..?

그래. 일단 옷이나 좀 입어.

..응...


휘는 매니저가 골라준 옷을 입고 그의 손에 이끌려 차를 타고 파티가 열리는 곳으로 갔다.

꽤나 큰 클럽을 통째로 빌려 하는 파티였다.

매니저는 휘를 이끌고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도착한 곳에는 여하와 시안이 있었다.


어머어머, 선~ 배~ 님~?

... 니가 왜 여길...?

그거야 저도 초대받았으니까요~

아...


그럼 설이도 온건가?

휘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여기 조금 시끄러우니까 좀 조용한 곳으로 가요.


여하의 말에 매니저는 밖에 나가있겠다고 말했고, 셋은 클럽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자기~~

...허?


문이 닫히자마자 시안이 여하에게 안겨들었다.

이건 또 뭐야?

휘의 표정에 여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저희 사귀는 사이에요.

아.. 그래...?

2년 전에도 사귀었었는데, 열애설 터지고 해어졌다가 1년 전부터 다시 사귀기 시작했고요.

.... 그럼 설이는..? 설이는 뭔데?!


휘는 다급하게 물었다.

설이 시안과 사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하의 말 대로라면 설인 시안과 사귀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그냥 친구사이에요. 2년전에 만난. 뭐, 이것저것 사정을 들어서 조금 더 친해졌달까.

.....

그 설아라는 분은 지금 윗층 룸에 있어요.

앗!! 말해주면 어떡해~

시끄러.

위에..?

네.


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방을 뛰쳐나가 설에게로 달려갔다.

변명이라던가, 지금까지의 일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얼른 설을 만나야 겠다는 것 뿐이었다.

문이 열리고, 혼자 쭈그려 앉아있는 설이 보였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놀란 표정으로 바뀌어버린 설에게 휘가 다가갔다.


... 미안해..

네..?


세걸음 정도 걸어간 휘는 더 이상 걸어가지 못하고 설에게 사과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놀란 설의 표정이 보였다.


.... 그런 말 해서 미안해.

......

상처만 줘서 미안해, 자주 연락 안해서 미안해.

......

나 같은거 좋아해 줘서 고마워..

......


설에게서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아, 끝이구나, 설이의 마음은 이미 떠나버렸어.

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뒤로 돌았다.


자, 잠깐만요..!


우당탕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설의 온기가 손에서 느껴졌다.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니 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 좋아했어.

......

지금도 좋아해.

......

갈ㄱ..

... 정말요?


떨리는 설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에 뭔가가 뚝뚝 떨어지는 듯 했다.

뭐가 떨어지는 걸까, 하고 생각하던 찰나 설이 고개를 들었다.

설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정말 저 좋아해요..?

.... 응..

.... 저두요.

.. 어?

저도 좋아해요. 계속.. 지난 2년동안 좋아했어요. 안그럴려고 했는데.. 흑.. 그래도 너무 좋아했어요..


가련하게 떨면서 말하는 설의 모습에 휘는 말을 잠시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나를 좋아했다고?


.. 정말?

네.. 정말요..



... - 그렇게 해서 시안씨와 만났어요. 그 때 시안씨도 엄청 힘들어 했었어요. 여하씨랑 사귀는게 소속사한테 밝혀져서 어쩔 수 없이 헤어졌다고 말했어요.

응.

시안씨가 그 동안 선배가 어떻게 지내는지 말해줬어요. 드라마나 영화촬영도 다 거절하고 있다고 했어요.

응.

만약 티비에 나왔으면 나 못참고 선배한테 달려갔을 거에요.

응..

.. 나중에 시안씨가 여하씨랑 다시 사귀게 됬다고 말했어요. 두분이서 제가 선배랑 만나는거 도와준다고 했어요. 근데 시안씨가 선배 때문에 해어졌다면서, 조금 골탕먹이고 만나게 해 주겠다고.. 그랬는데..

응..

아, 저, 저는 반대했어요.

.... 그래?


휘와 마주앉아 두 손을 조심스럽게 잡은 설이 얼굴이 발개진 채 말했다.


... 처음이네요, 선배가 이렇게 제 이야기 들어준거.

...... 미안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맞아. 미안해.


어쩔줄 몰라하는 설에게 휘는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는 우리 많이 이야기 하자. 가고 싶은곳도, 남들 눈치 보지 않고 가자. 네가 하고 싶은것도 전부 다 하자. 니가 원하는건 뭐든지 다 하자. 그러니까..

....?

다시 한번만 나랑 사귀어 줘.

......


설은 고개를 푹 숙였다.

설마 싫은건가?

그럴만도 하겠지.


... 좋아요.

..!!

우리 사귀어요..

... 고마워..!


밤하늘의 달이 예쁘게 빛이났고 떨어져 있던 두개의 그림자가 수줍게 하나로 뭉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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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5-28 09:53 | 조회 : 4,753 목록
작가의 말
류화령

이번에는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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