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 (2)

좋아해요, 선배님.


학창시절의 휘는 수많은 고백들을 들어보았다.

하지만 이렇게 순수하게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딩당하게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설은 휘에게 1년동안 무수히 많은 고백을 했다.

그런 설을 휘는 1년 내내 무시하고 다녔다.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우선은 휘는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배우로서 연예계에 대뷔할 것이다.

그런데 애인이라니, 소속사에서 들고 일어날 게 뻔했다.

두번째로, 휘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남자에게 고백받는 것 자체가 낯설고 당황스럽기만 했다.

정말로 좋아한다고 해도 주위의 시선때문에 마음속으로만 생각할 텐데 이렇게 당당하고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다니.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설을 휘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무시하고, 차갑게 대하면 어느 순간 알아서 떨어지겠지.

하지만 아니었다.

1년이 더 지난 후, 설은 처음보다도 더 강렬한 눈빛으로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 사귀어 주세요, 선배님.


졸업을 앞두고 또다시 설이 고백을 했다.

어째서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너는 포기 하지 않는거야.


...... 그래


그 때 받아준 것이 잘못된 것 같았다.

아니, 잘한 일이 였던걸까?

잘 모르겠다.


...- 해서 이번에는 사장님이-

형, 나 애인 생겼어.

...뭐?!

남자야, 우리 학교 2살 후배.


처음으로 밝힌 사람은 매니저 형이었다.

그 뒤 매니저는 휘에게 설과의 관계를 깨라고 닥달했고, 깨지지 않는다면 당장 소속사에 보고할 것이라고 말했다.

깨버릴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1년 동안 고백을 하러 온 설의 모습과 마지못해 고백을 받아주자 날아갈 듯 기뻐하는 설의 모습이 비춰졌다.

고백을 받아 줬다는 건, 미약하게나마 그 애 한테 정이 있었다는 거겠지.

휘는 설에게 이야기 했다.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말라고,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라고.

왜 그렇게 지내야 하는지는, 아무리 바보라도 아직 이 사회가 우리를 받아드릴 준비가 안된다는 걸 아는 이상,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매니저에겐 헤어졌다고 거짓말을 했다.



데뷔 후, 한달에 한 두번 설을 만날 까 하는 정도로 바빴다.

그의 전화를 받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가끔 설의 집으로 가면 어린아이 처럼 기뻐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리고 참 예뻤다.

그래, 그 때 부터 였던 것 같았다.

그 애 한테 사랑에 빠진게

처음 관계를 가진건 그로부터 조금 후 였다.

처음일 것인 설에게 휘는 아픈 기억을 남겨주고 싶지 않았다.

몰래몰래 그와 관련된 동영상을 보는 등 닥치는 대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관계를 맺었을 때, 아프다고 눈물지으면서 어쩔 수 없는 쾌감을 느끼는 설의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몇번을 관계를 맺었고, 시간이 갈 수록 설을 향한 휘의 마음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다.

다정하게 대해 준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촬영을 마치고 매니저와 약간의 충돌이 있었다.

화가 많이 난 상태에서 휘는 설을 찾아갔고, 무작정 섹스를 했다.

분명 많이 아팠을텐데, 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휘 역시 그 때엔 스스로 자각하지 못했다.

그 이후 휘의 행위는 점점 더 심해져 갔고, 설이 참을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날 새벽, 막 잠이 든 설을 두고 씻고 나온 휘는 잠시 잠이 든 설을 바라보았다.

눈물자국이 가득한 얼굴부터 여기저기 나 있는 상처까지 전부 훑어보았다.

특히 설의 얼굴에 난 눈물자국이 눈에 계속 들어왔다.

쾌감에 젖어 우는 것이라 해도 심하게 울어버린 것 같았다.

순간 휘는 그 동안 자신이 설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가 떠올랐고, 휘는 도망치듯이 집을나왔다.

소중하게 대한다고 생각했고, 그리 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그 이후, 휘는 설의 연락을 거의 받지 않았다.

사실은 받기가 너무 무서웠다.

연락을 받고 찾아가면, 그렇게 된다면 또 다시 설을 다치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설과 만나는 시간이 점차 줄어들었고, 간단한 연락조차도 줄어버렸다.

그리고 사건이 터졌다.

갑작스럽게 난 휘의 열애설.

휘는 곧장 회사로 불려갔고, 회사에서는 정치적 이슈를 막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실제로 휘와 열애설이 난 여자는 함께 영화와 드라마를 두 세개 같이 찍어 조금 친해진 선후배 사이일 뿐이었고, 심지어 여자에게도 애인이 있었다.

휘는 설에게 해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마침 설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어두운 거리, 설과 밖에서 만날 때 마다 만나는 그곳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저 멀리서 설의 모습이 보였다.

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오해를 풀 수 있을까.


아, 왔어?


문이 열리고 설이 차 안으로 들어왔다.

설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음.. 그러니까...


젠장, 미치겠네, 무슨 말을 해야 오해가 풀릴까.


철썩-


눈 앞이 아찔했다.

정신을 차리니 고개가 돌아가 있었고, 뺨이 따끔거렸다.


..!! 무슨 짓이야!!


한번도 이런 짓을 당해본 적 없는 휘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미쳤어?! 지금 어디다 손을 대는거야?!!

선배가 잘못했잖아요.


갑자기 온 몸이 정지하는 듯 했다.

눈물이 잔뜩 고여있는 눈과 새빨개진 설의 얼굴이 휘와 마주쳤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사과하고, 해명해도 모자란데.


... 사라질게요.

... 뭐?

사라진다구요. 맨날 그랬잖아. 있는 듯 없는 듯. 사라져도 그 누가 알지 못하게 있으라면서요..!

... 야


왠지 떠나가 버릴 것만 같은 느낌에 휘는 설의 팔을 잡았지만, 설은 휘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사라져 준다잖아요!! 어차피 나 같은건 없는게 더 좋았잖아!!

지금 무슨..!


소릴 지른 설이 휘에게서 몸을 돌려 문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어딜 가..!

놔요!!! 저리 가라고!!


나가려는 설을 휘는 잡으려 했지만 설은 휘를 놓치고 말았다.

멀어지는 설의 뒷모습을 보며 휘는 차에서 뛰쳐나왔다.

뛰어가려고 발을 움직이자 발 밑에서 뭔가가 걸렸다.

바닥을 보니 작은 곰인형이 떨어져 있었다.

마음속에 뭔가 무거운게 쿵 하고 떨어지는 듯 했다.

떨리는 손으로 곰인형을 들어보자 곰인형은 작고 빨간 하트를 들고 있었고, 그 하트에는 흰색으로 4th라는 자수가ㅡ삐뚤 거리며 새겨져 있었다.

아, 그래, 오늘은 휘가 설의 고백을 들어준지 4년이 되는 날이었다.


아.. 서, 설아..!


휘가 고개를 들어 설을 보았지만 설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휘는 설이 뛰어갔던 곳으로 달려갔다.

사거리가 나왔고, 그 어느 거리에서도 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 아..


휘의 눈에서 는물이 계속 떨어졌다.

그 때 휘의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매니저의 전화였다.


[너 어디야?]

.... 형.. 나 어떡해...?

[.. 너 우냐.?]

어떡해.. 어떡해... 아... 진짜...

[... 일단 진정하고, 어디야.]

... 사거리..

[조금만 기다려]



매니저의 차를 타고 숙소로 가는 내내 휘는 울었다.


이제 못보면 어떡하지... 나 어떻게...

...... 일단 집에 가면 진정하고, 내일 찾아가 봐. 그리고 미안하다고 꼭 사과하고..

........ 응..


다음 날, 휘는 설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곳에서 휘를 반긴건, 언제나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봐 주던 설이 아닌, 따스한 설의 온기도 아닌, 무거운 적막 뿐이었다.

이럴리 없어.

휘는 집안 곳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언제나 집안에 가득했던 설의 흔적은 먼지 한톨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남은 건 가끔 집에 들렸을 때 사용했던 몇개 되지 않는 휘의 물건들 뿐이었다.

휘는 미친듯이 집안을 둘러보았다.

침실 구석에서 설의 휴대폰을 발견했다.

휘는 미친듯이 설의 폰을 뒤지기 시작했다.

설은 항상 사용하던 이메일 계정에서 탈퇴했고, 휘와 함께 깔았던 앱들은 전부 삭제되어있었다.


아... 아...!


휴대폰을 꽉 쥔 휘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을 흘렸다.

정말로 사라져 버렸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그 누가 알지 못하게.

휘는 터덜거리며 집을 나왔다.


저기...

...?


왠 꼬마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요.

.... 이게 뭔데?

여기 살았던 형이 떨어뜨린거에요. 이거 형이 매일 쓰던 일기장인데..


휘는 아이에게서 빼앗듯 공책을 낚아챘다.

아이는 휘를 이상하게 바라보다가 도망쳐버렸다.


....... 없어?


어느 새 온 매니저가 조용히 물어보자 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감한 표정을 짓고는 뜸을 들이다 말했다.


... 촬영가야해. 그건 가면서 보자.

.. 그래...


휘는 차에 타자마자 공책을 펼쳤다.

꽤 두꺼웠던 공책엔 매일매일이 기록되어 있었다.

앞쪽에 적힌 내용은 설과 휘가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함께 찍은 사진도 붙어있었다.

오늘은 만나서 이런이런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만나지 못했지만 연락을 해서 너무 행복했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점차 뒤로 갈 수록 많은 날을 뛰어 넘어 일기를 작성해놓았고, 둘이서 함께 찍은 사진보다는 휘의 개인 사진이 다 많았다.

배우로 데뷔 후, 혹시모를 위험에 설에게 더 이상 사진을 찍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던 게 기억이 났다.


아.... 흑.....


휘는 조용히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채 눈물을 흘렸다.

그 뒤로 휘는 여러번 설에게 연락을 해 보았지만 바뀌었다던 번호로 해 보아도 여전히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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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5-27 15:05 | 조회 : 4,470 목록
작가의 말
류화령

너무 오랫동안 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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