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시리즈5

-드디어-

“드디어..”

드디어.

20대 후반의 이제는 한 풀 꺾여가는 늙은 할미꽃처럼. 온전한 직업 하나 없이 아등바등 살아온 내게도 ‘드디어’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드디어 와 버렸다. 그래 드디어.

무슨 드디어가 드디어냐고 누군가가 보면 혀를 차고 땅에 침을 뱉고는 다시금 제 갈 길을 갈 만큼 쓸모없는 의미였지만. 오랜 시간 동안 체 이름 하나 날리지 못 하고 쉽게 바스라져 버린 글쟁이는. 쉽게 펜을 놓아버렸지만, 그럼에도 제대로 된 직장하나 없는 한낮 나 같은 놈팽이가 드디어.

그래 드디어.

손에 들려진 커다란 우체국 박스를 들고는.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힐 만큼 기쁨에 겨워 죽을 것 같았다.

29살. 연인의 돈을 갉아 먹는 놈팽이. 쓸모없는 쓰레기.

그런 내가 드디어.

아이에게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기쁘고 가슴이 먹먹한지. 항상 받기만 하는 사랑에 심장이 따스하고 아려옴에도 이때까지 변변찮은 선물 한 번 제대로 준 적이 없었던 저이기에. 비록 파트타임에 불과한 편의점 아르바이트였지만 조금씩조금씩 모아 드디어 결실을 이룬 이 물건에 화가 아닌 반대의 기분으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착각이 일었다.

89만원. 새하얀 노트북.

늘 낡아빠진 노트북으로 타각타각 글을 쓰던 그 때와는 다르게 상자를 열고 뽁뽁이를 뜯고, 겹겹이 쌓여진 상자들을 제거한 뒤에야 뽀얀 열매처럼 모습을 비춘 건, 고급스러운 외형과 가벼운 디자인으로 제작되어진 새하얀 노트북이었다.

“공책에다가 적기만 하는 건 구식이래.”

어떤 남자 아이가 그러더라구. 다른 애들도 다 손으로 적는데..내가 편한가봐 가끔 이렇게 툭툭 건드네.

이사와 동시에 폐기 처분한 낡은 노트북이 사라져 허전한 책상 위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현이의 모습에 문득 떠오른 듯. 아홉 달 전 단비가 자신에게 한 말 이었다. 물론, 물질적으로 욕심이 없는 단비인지라 그냥 스쳐지나가듯 한 말 이었겠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왜 이렇게 그 말 한 마디가 가슴 속에 두고두고 사무치는지. 늘 상 깨어나는 새벽녘처럼. 차마 잠에 들지 못 하고 끙끙 앓기만 하는 저의 모습에. 또 잠결에 깨어나 못난 저를 끌어안고 토닥여 주던 아이의 행동에서야 겨우 잠에 빠져 들었었던 그 날의 자신은. 날이 밝고 간소하지만서도 정성스러운 아침밥을 챙겨주던 아이가 새하얀 밖으로 종적을 감춤과 동시에 일자리를 찾으려 돌고 돌아 그나마 집 인근에 있는 오후 파트타임의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작은 돈벌이를 할 수가 있었다.

최저시금 6,470원 오후 두 시부터 저녁 여덟시 까지 총 여섯 시간. 그렇게 5일을 일 하면 십구만 사천 백 원을 벌수가 있었고, 또 주말을 제외한 한 달을 일 하면 팔십팔만 사천 사십 원의 월급을 벌수가 있었다. 간혹 하루나 이일 차이로 월급이 달라지기도 했지만, 저 금액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었다.

예전엔 책을 한 권 내기 위해서 적게는 6개월 길게는 일 년 이라는 시간이 걸리면서도, 월급은커녕 반 년 동안 쫄쫄 굶기가 일쑤였던 그 때와는 다르게 채 100만원을 넘지 못 하는 저 금액이 왜 그리도 크게 보였는지. 첫 월급을 받았던 그 날부터 하루에 10만원씩은 동그랗게 똘똘똘 말아 자일리톨 껌 통 안에 넣어 넣고는 종일 흐뭇하게 웃다가, 이거 조금은 우리 아이 옷으로. 이거 조금은 우리 아이 신발로. 그리고 그 조금의 조금은 날 위한 선물로. 그렇게 해서도 남아 있는 3-40여 만 원의 돈은 은행으로 쪼르륵 달려가 꼬박꼬박 저금을 했었다. 애초에 꾸준히 적금을 들 마음도 없었고, 열심히 벌어도 연 몇 프로도 안 되는 돈이기에 관심도 없었던 현이는 그렇게 9달을 일하고 벌어 326만원 이라는 금액이 통장 안에 찍히고 나서야 단비의 장부에 비밀번호 네 자리가 적혀 있는 통장을 곤히 끼어 넣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알바를 그만 두지는 못 했지만. 왜 이렇게 행복한지.

웃고 있는 얼굴과 둥그런 눈매가 새삼 아이만큼이나 둥글둥글 해진 기분이 드는 현이었다.

아아-이게 다 너 때문이다.

드디어 선물을 줄 수 있는 나 때문이기도 하고.

이제 곧 아이가 돌아올 시간이 분명함에도 이렇게 품에 안겨 있는 노트북은 왜 떼어 놓지가 못하는지. 아직도 눈물이 울컥울컥 새어나올 것 같았다.

더운 여름부터 추운 겨울까지 달마다 겉 스티커를 벗겨낸 새하얀 자일리톨 껌 통 안에 들어가는 십 만원을 모으고 모아, 힘겹게 산 노트북을 네게 건네주는 상상 만으로 버텨 왔었던 그 긴 개월이 새삼 마음을 먹먹하게 해 주는 것 같았다. 노름방 근처에 위치했던 편의점은 현이와 단비가 살고 있는 주택에서는 걸어서 15분이 걸렸고, 그 곳에서는 화투를 치다가 울분에 못 이겨 담배가 술을 사러 들어오는 아재와 아줌마가 쉴 새 없이 들락거리며 현이를 피곤하게 했었다.

간혹, 4시 밖에 안 되는 그 시간에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들어오다 넘어져 매장 물품이 채어진 판대를 엎기도 하였고, 샐 수도 없이 많은 만 원짜리와 천 원짜리를 동전으로 바꿔주라며 현이에게 윽박을 지르기도 했었다.

그걸 생각하면 얼마나 서러웠던지.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웃으면서 울을 수가 있는 건 필히 내 아이 때문일 터였다.

아아..아이야. 단비야.

오늘도 난 봄날의 저 날씨에 피어나는 들꽃처럼. 나 또한 너로 인해 다시금 피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웃고 있음에도 마음이 아픈 것은 비록. 너에게 한껏, 그리고 맘껏 해줄 수 없는 내 못난 미련 때문이겠지만. 새삼 그러면 어떠랴. 네가 나 때문에 조금이라도 웃을 수 있다면. 난 아린 죄책감을 조용히 끌어안고서 너에게 미소지어줄 용기가 있었다.

갈수록 세상이 야박해지고 우리를 아프게 핍박하더라도.

그로 인해 죽을 만큼 힘겨워 지더라도 이 모난 내가 너의 등을 끌어안아 주기만 할 수 있다면. 내가 너의 힘든 마음까지 다 끌어안고 이겨낼 테니까. 넌 아직도 채 사라지지 않고 굳은살이 드문드문 배겨있는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모난 양심이 날카로운 칼날에 찢겨 붉고도 둥그런 내 마음을 조곤조곤 어루만져 주니까. 필히 그런 날이 오더라도. 난 괜찮을 터였다. 안 괜찮아도 괜찮을 터였다. 세상에 버림받아 개처럼 빌빌 기는 나라도. 네가 있으니까. 그거면 다. 그래, 그거면 다 괜찮아질 터였다.

넌 여리면서도 단단한 사람이었고. 난 단단하면서도 여린 사람이니까. 우리는 필히.

다 괜찮을 거였다.

“현이야-나 왔어.”

“왔어..?”

그래. 다 괜찮을 거야.

새삼 아직 주지도 못 한 선물을 여전히 품에 안고는 신발을 벗으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네 앞에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주춤주춤 다가가 괜시리 콧등을 스윽 비볐다. 왠지 모르게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단 한 번도 해준 적 없는 선물.

단 한 번도 내게서 무언가를 받아본 적이 없는 너는. 이런 나란 사람과 내 품안에 있는 이 녀석을 본다면 어떤 웃음을 지어줄까.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드는 아이가 이내 딱딱하지만 서도 물컹한 두부마냥 품에 안겨 있는 물건을 발견 한 듯 두 눈동자가 동그래지더니 이내 다시금 고개를 올려 나와 눈을 마주했다.

자-얼른.

이제 웃어줘.

“..이..게..뭐야아..!”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눈물을 흩뿌리는 너는 다시금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어떻게 품에 안기지도 못 하고 벗겨진 신발을 내팽게 친 체 현관에 서서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너는. 뒤늦게 서야 어쩔 줄 몰라 하며 굳어진 나를 조심스럽게 끌어안고는 도리어 위로를 해주는 듯 토닥토닥 등을 쓰다듬어 내렸다.

“누가..이런 거 해주라고 했어..!”

“미안해.”

“..누가 바보같이 사과하래?!”

채 울음을 멈추지도 못 한 체 끅끅. 힘겹게 말을 내뱉는 아이의 품에 안겨 부드러운 모발과 정수리에 고개를 묻은 나는. 결국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네가 기뻐서 이런 행동을 하는 걸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파서 눈물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이의 고통은 나도 똑같이 아프고, 아이의 기쁨 또한 똑같이 기쁘다.

그렇기에, 눈물을 흘리는 너로 인해 나또한 이렇게 눈물이 흘러나오는데.

슬프면서도 기뻐하는 너와는 다르게 나는 이렇게 아프기만 하다 아이야.

“단비야-”

“왜에..”

“내 옆에 있어줘서 항상 고마워.”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아아..아이야, 아이야.

내 아이야.

뒤늦게 서야 무안한 지 품 안에 있는 노트북을 가져가는 아이를 따라 책상에 앉은 나는 정신을 차려보니 인터넷에 대해 문외한인 아이에게 어느 샌가 하나하나 설명을 하고 있었다.

다시금 글을 써주기를 바라며 자신의 책상과 내 책상을 구매했었던 아이는. 평소에 좋아하지도 않았던 분홍 키티 모양의 의자를 끌고 와 옆에 앉으며 ‘응,응’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집중을 한다. 방금 전까지 눈물짓던 건 전부 거짓이었다는 듯.

그렇게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짓는 네 모습을 보며 재잘거리던 난 결국 재미있지도 않음에도 뭐가 그렇게 웃긴 건지 배를 부여잡고는 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런 내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넌 아마 지금 내 마음을 모를 터였다.

늘 받기만 하는 것보다 이렇게 줄 수도 있다는 걸 배우면 죽을 만큼 행복하다는 걸.

늘 주기만 하는 너는 절대 모를 터였다.

아이야.

드디어. 내가 드디어.

너에게 무어가를 해줄 수가 있었다.

드디어.

그래, 드디어.

드디어..드디어..

드디어.

오늘 알라딘과 그 외의 소설 사이트에서 '오를 수 없는 나무'과 연재됩니다. 나중에 이벤트도 할 예정이니까. 혹여 관심 있으신 분들은 트윗 확인 꼭꼭 부탁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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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6-22 06:08 | 조회 : 1,681 목록
작가의 말
무관심

새벽 시리즈 다운로드 링크입니다. https://blog.naver.com/anrhkstl/22130415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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