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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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피자를 먹고 잠에 들어서인지 퉁퉁 부은 얼굴의 아이에게 정성스러운 아침 식사를 차려주고 학교를 보낸 뒤에야 홍차를 홀짝이며 잡지를 보던 B의 확인한 시계의 시간이었다.

채 4시간도 채우지 못했던 수면이었음에도 이상하게 전혀 피곤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머리는 상쾌했고, 몸은 무겁지도 않고. 마치 20대 초반 한참 수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이며 은행 창구 일을 했었던 그 때 보다 더 청아한 기분.

속이 후련해졌기 때문일까.

붉은 빛의 홍차가 바닥을 보일 때 즈음에야 읽고 있던 뷰티 잡지를 덮으며 몸을 일으킨 B은 컵의 안 표면에 말라가는 붉은 찻물을 지우려 세면대의 물을 틀고는 컵을 뽀드득 씻어 내렸다.

기름을 쓰지 않아 굳이 설거지용 세재를 쓸 필요도 없었기에 그저 물로만 간단히 헹궈낸 하얗고 작은 머그컵은 이내 뒤로 뒤집어져 건조대 위에 올려졌다. 고작 컵 하나 씻는 거면서 조금은 단단해진 손에 또 물을 묻히고 말아버렸다. 어린 시절보다는 하얗지 않고, 목 디스크로 인해 붉어진 손등은 간혹 스트레스를 받거나 디스크 증상이 심해지면 파랗게 변해 파르르 떨려올 때가 있었다.그럼에도 남편은 절대 모르겠지. 서로가 소월해진 게 D가 10살이 채 되어가기도 전의 해였으니까. 하지만 그게 또 아쉽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당연한 거니까. 하지만 당연하면서도 늘 당연한 건 없었다. 정말 당연하게도.

젖은 손을 탈탈 털며 거실 소파에 앉아서야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B은 뒤늦게 서야 떠오른 생각에 남편과 공동으로 사용하는 통장의 금액을 확인하고서 일 년에 단 한 번. 입맛에 맞지도 않는 한정식 집을 예약했다. 그리고는 당연하게 40이라는 금액을 이체를 시켰다. 그것도 어머님에게.

1년에 한 번. 내 엄마도 아닌 사람의 생일을 위해 이렇게 돈을 보내고 그 분이 좋아하는 식당을 예약을 한다. 내가 원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게 도리라고 늘 입이 닳도록 말하는 그 사람 때문에. 그러면서도 당신이 아닌, 나란 사람의 어머니에게는 무심하기만 한 그 사람은 우리 어머니의 생일 날짜도 모르고, 어머니에게 부치는 작은 돈 10만원도 아까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렇게 상반되게 내 속을 썩어 문드러지게 만들면서 자기 엄마한테는 당연하게 효도를 추구하는 그 사람은 왜 나한테 이렇게나 대리 효도를 시키는 건지.

40만원을 보내고 나서야 개인적으로 모아둔 개인 통장에서 20만원을 지방에서 조용히 바람 따라 바다 따라 세월 따라 살고 계시는 엄마에게 보낸 B은 또 버릇처럼 후-길게 숨을 내쉬며 시어머니에게 연락을 하고, 시댁 가족 분들과 약속을 잡고. 또 듣기 싫은 소리를 실컷 듣는다.

참 18년이란 세월이 넘게 이걸 반복하였음에도. 받는 상처와 괴로움은 똑같은데…이 사람들은 다 자기 잘난 맛에 살고는 또 뻔뻔하게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오는 사람들이었다. 이기적인 사람들.

“예, 그럼 내일…아, 네네. 아니요. 네-감사합니다. 예-그럼 내일 7시에 데리러 갈게요.”

늘 가덕 식당을 예약 했냐, 아들 밥은 잘 챙기고 있느냐, D는 요즘 뭐하고 다니냐, 애가 저번에 보니까 피곤이 상접해 보이던데 보약은 지어서 멕이고 있는 거냐. 여자가 밖에서 나가서 떠들어 봐야 접시만 깨지니까 항상 입단속 하고, 남자가 외간 여자도 만날 수 있는 거다. 그게 당연한 거다.

괜히 알고 싶지도 않고, 듣고 싶지도 않았던 이야기를 양심이 찔리는 듯 술술 내뱉어 주는 시어머니는 뒤늦게 서야 무안해진 듯 내일도 데리러 올 거냐? 란 물음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후…”

정말.
이혼할까.

나란 사람을 챙겨주지도 않는 분에게 항상 가식이란 가면을 쓰고 18년을 참고 살아왔는데, 그게 익숙하였는데…왜 A를 만난 순간부터 이렇게나 약해지는 건지. 정말…당연하면서도 늘 당연한 건 없는 거구나. 뻣뻣해진 손가락으로 어색하게나마 남편에게 메신저를 보낸 B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안방 옷장 안에 단정히 걸려있는 하얀 패딩을 꺼내 걸치고는, 캐릭터가 아기자기하게 그려진 하얀 양말을 꺼내 신고서, 이내 현관으로 나가 하얀 운동화를 발에 끼어 넣었다.

현재 시간인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정도까지의 시간은 나만의 자유이니까.

그 전까지는 마음대로 하고 싶었다. 사실. 다 뒤집혀서 망해 버려도 지금은 상관없지만 말이다.

지침과 기다림은 이래서 무서운 거였다.
지치면 모든 게 무기력하게 되고, 기다림은 그 지침을 가져와 사람을 무너뜨렸다. 그래서 잃을 게 없어지는 거겠지.

‘철컥’

문이 열림과 동시에 따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바깥으로 이내 발을 내딛은 B은 탁하고 닫히는 문을 뒤로 한 체 걸음을 옮겼다.

갈 곳은 없었지만, 쉴 곳은 있었다.물론 그게 장소가 아닌 누군가의 품이었지만. 오히려 그게 더 행복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날 받아줄 사람이 있다는 거니까.

미처 핸드폰 번호를 받지 못해서 간다는 연락을 못했지만, 아이는 분명 환한 웃음으로 받아줄 게 분명할 터였다. 그만큼 날 좋아해 주는 사람이니까. 더군다나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어제 아이가 타줬던 은은함 가득한 아메리카노는 이상하게 맛있는 기분이 들었다. 늘 커피를 마시고 나서 느껴지는 끕끕한 느낌을 싫어하던 B가 처음으로 맛있다고 느꼈던 커피. 그게 또 마시고 싶었다.

다행히도 카페는 B의 자택과는 꽤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곳이었다. 어떻게 저기에 카페가 있었는데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 했던 걸까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A의 카페는 가끔 반상회를 하는 B의 아파트의 주민들의 입에서도 자주 오르내리는 이름이었다.‘xopowo’라고 단순하게 적혀 있는 그저 일반 카페임에도 사장과 알바생이 친절하고 커피를 잘 내린다고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남아있는 덕분일까. 약 5분여의 거리에 위치한 카페를 걸어가는 것뿐임에도 괜히 아이가 장해 보여 쿡쿡 웃음이 나오는 B었다.

그러고 보니. 머신이 아닌 손으로 직접 커피를 내렸었지.

가느다랗고 하얀 손으로 물줄기를 내리는 모습이 꽤나 진지해 보여서 다시금 멋져 보였는데…오늘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찰랑’
‘쨍-’

저번에도 그러더니.
여기는 참…

문을 열면 기계가 부착 되어진 문에서 쨍-하는 크리스마스에서나 나올 것 같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게 싫다는 건 아니지만, 그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어서오세요-”

다정한 저 대답을 내뱉는 아이에게 다시 설레어 버려서.

“….”
“기다리고 있었어-”

왠지 이 문이 참 요술 같다는 느낌과 몽환적인 감각에 또 사로잡혀 버리고 말아버리는 B었다.

그리고는 이내-

“….”

친히 카운터를 지나 입구까지 마중 나와 준 그 아이의 품에 안겨버리고 말아버린다. 나 힘들었으니까. 네가 보고 싶었으니까. 얼른 안아주라는 그 무언의 마음을 담아 꼬옥. 놓치지 않을 정도로.

그런 B의 행동에 A 또한 익숙하게 손을 두르고 예전 그대로 옅은 비누향이 올라오는 것 같은 B의 체향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고작 하루 떨어져 있었을 뿐이었는데…왜 이렇게 심장이 쿵쿵쿵 세차게 피부를 때려대는 걸까나.

아마도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심장이 미쳐가는 건가 봐. 지금은 널 만났다는 이유로 심장이 날 이렇게도 괴롭힌다. B아.



“….”
“….”
“….저…저기요…?”
“…아?”
“아. 맞다…C 학생 미안해요.”
“아,아니아니 아니에요. 그럴 수 있죠. 다만…! 입구 앞에서 너무 그러시면…손님들이 안 오십니다!”
“하하…”

“알바생이셔…?”
“아, 응. 맞아. 저기 C 학생. 오늘은 내가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할 것 같은데, 혼자서 괜찮아요?”
“물론이지요. 그 동안도 혼자서 잘 해왔는걸요. 사장님은 걱정 하시지 마시고, 애인 분이랑 즐거운 데이트를 하고 오시면 됩니다!”
“하하…고마워요. B아 잠깐만. 나 코트 좀 가지고 올게. 오늘 시간 괜찮아?”
“아…응. 5시 전에만 집으로 돌아가면…”
“그래? 한참 남았네. 그러면 나랑 같이 나가자.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알겠어.”

이내 카운터 옆 스텝용 휴게실로 들어가는 A를 뒤로한 체 엉거주춤 근처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은 B은 뭐가 그렇게 흥미로운 건지 눈을 빛내며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C에게서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D와 비슷한 나이 대 같아 보이는데. 둘 다 아기 같아서 그런 건지 꽤 귀엽기도 하고. 은근슬쩍 A가 들어간 문을 바라보다 이내 총총총 걸어와 말을 거는 C의 모습에 반대편 의자를 가리킨 B은 C 앉으며 건넨 미온수를 한 모금 마신 뒤에야 다시금 C의 이야기에 집중을 했다.

“저기요저기요.”
“네-C 학생?”
“그…언…니?가 정말 사장님 첫사랑이에요?”
“…아마도요? 그리고 A가 제 첫사랑이에요.”
“…오오…쩐다. 나 이런 스토리 처음 들어봐. 둘이 어떻게 만나게 된 거에요?”
“같은 학교였어요. 3학년 때 알게 되었는데, 저는 바로 취업으로 넘어가고, A는 입시로 넘어가 버려서 그 뒤로 연락이 끊겼지만, 어제 다시 만나게 되었어요.”
“우아…그런데도 지금까지 좋아한 거예요?”
“그러게요-지금까지 좋아하고 있네요. C 학생은요?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아직은 없습니다! 지금은 먹고 살 길이 막막합니다.”

“이제 나이가…20살?”
“아뇨! 올해 25살 되었습니다!”
“청춘이네요.”
“C 학생-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있어요.”
“아-싸장님!”
“직원은 일을 해야지,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돼요. 자 얼른 원래 자리로 복귀.”
“…칫…치사해…”


아직 물어볼 게 산더미 같은데 언제 나온 건지. 단정히 묶어 내린 머리를 꾸욱 누르며 귓가에 속삭이는 A의 모습에 이내 풀이 죽어 카운터로 돌아간 C은 세상 어느 커플 보다 더 돈독한 것처럼 팔짱을 끼고 나가는 둘의 모습에 뿌우-볼을 부풀렸다.

좋을 때야 좋을 때. 청춘이구먼.
실상 청춘은 C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런 진심 가득한 사실도 모르는 C은 점심은 이걸로 시켜 먹으라며 A가 쥐어준 카드로 아주 비싼 걸 사먹어야겠다고 다짐을 하며 얼음 가득한 아이스티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펼쳐져 있는 무역책은 저 멀리 의식의 세계에서 날려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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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6-11 20:01 | 조회 : 1,496 목록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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