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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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11시부터 침대에 몸을 뉘였던 B은 결국 오지 않는 잠에 침대 속에서 뒤척이기를 반복하다 한숨을 내뱉은 지가 몇 십번 째였다. 그러다 결국 새벽 2시가 되어갈 즈음에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는 예전보다는 조금 건조해진 양 손바닥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간혹 목 디스크 증상으로 어떻게 누워도 자세가 불편해 잠에 들지 못했던 적이 한두 번 있긴 했었지만, 오늘은 자세가 불편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어디가 아프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잠 못 드는지. 이게 다 필히 그 아이 때문일 터였다.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잔주름 하나 조차 멋져보이던 그 아이 때문에.

어린 시절에도 아이는 그랬었다. 남들과 다 똑같은 귀 밑 8cm의 멋없는 단발머리를 하고는, 그 와는 어울리지도 않는 셔츠를 입고서는 항상 등교를 했었다. 여자가 남자도 아니고 이게 뭐냐고 잔소리와 핀잔을 주기도 하셨던 선생님들도 간혹 있었는데, 아이는 그럴 때마다 멋쩍은 웃음을 짓고서는 다음날 또 셔츠를 챙겨 입고 오는 거였다.

어떤 날은 품이 넓은 하얀 셔츠에 일자로 내려와 유행을 했었던 기본 청바지와, 또 어떤 날에는 검정 셔츠를 입고서는, 외제로 보이는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검정 손목시계를 차고 오기도 했었다.

수많은 여학생들 중에서 유독 눈에 띄던 아이가 바로 A었지. 평지도 아닌 산을 깎아 만들어진 높은 언덕에 지어진 학교는 간혹 언덕을 지름길로 지나쳐 내려가던 옆 학교 남학생들과 마주치는 경우도 다분하게 있었다.당돌하게 학교에 편지를 보내서 불려오는 남자 아이들도 여럿 있는 편이었고.

그렇게 남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음에도 여자아이들은 유독 A에게 호감을 보였다. 어떻게 보면 그 아이들은 친한 친구들 같으면서도 어떤 때는 이제 막 설렘이란 풋풋한 감정을 배워가는 것처럼 A에게 묘한 눈길을 보내기도 했었다.

물론, 그런 아이들 사이에서 아이가 선택한 건 나였지만. 막상 생각해보면 아이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묘한 힘이 있었나 보다. 물론 지금도. 다시 만났던 그 순간부터 다시금 날 끌어당겨 사랑에 빠지게 했으니까.

“후우-”

얼굴을 묻고 있었던 손바닥을 떼어내며 느릿하게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딛은 B은 결국 옷 장 안에 조용히 잠들어 있는 하얀 패딩을 양말과 함께 꺼내 입고 난 뒤에야 거실을 지나쳐 신발을 신고 천천히 현관문을 열었다.

오늘은 유독 속이 갑갑한 기분에 시원한 바깥바람을 맞아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그 이는 늦는다면서 결국 들어오지를 않았고, 혹여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18년 째 익숙하지도 않은 코골이 소리를 지겹게 내뱉으며 쿨쿨 잠만 잘 터였다. 다른 여자의 체향과 옅은 양주 냄새를 풍기면서.

하지만 그 이가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우리 관계는 애초부터 정상이 아니었으니까. 아니, 나만 정상이 아니었겠지. 초반의 그는 자신을 무척이나 사랑해줬었다. 너무 과분한 사랑에 절로 피곤해질 만큼. 애초에 그 사랑을 피곤해 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는 뜻이겠지.

그 이가 결국 지치고 지쳐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건 결코 옳지 못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한 사람만을 잊지 못하고 그 사람을 아프게 한 자신이 악(惡)한 거겠지.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어두운 새벽에 별은 하나도 없었지만 둥그런 달이 뚜렷이 모습을 드러내고는 은은히 땅을 비추고 있었다.사실 비추는 건 길마다 드문드문 켜져 있는 가로등이 하고 있는 거지만, 이내 그러면 너무 무드가 없어 보이니까. 옛 문학처럼 소년이 소녀를 사랑했던 그 은은했던 글귀처럼 낭만적인 생각을 하고 싶었다. 낭만 가득하고, 웃음 가득했던 그 어린 시절처럼.


하지만 지금은 아이가 좋아했던 황순원의 소나기보다는 나쓰메 소세키(なつめそうせき)의 ‘달이 아름답네요.’ 란 발언이 생각났다. 천 년 전 메이저 시대. 사랑(愛)이란 말이 금기시 되었던 그 때 그 시대. 전할 수 없는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였음에도 왜 그게 더 와 닿는 걸까.

어쩌면 지금 이렇게 잠이 오지 않는 이유도 그런 거일 수도 있었다.지금 떠 있는 달이 너무 아름다워서. 새삼 잠 못 이루는 거일 수도 있었다.달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리고 떠 있지도 않고 종적을 감추고 있는 A 너무 아름다워서. 달은 은은한 아름다움이 있었지만, 별은 반짝거리는 아름다움이 있었다.세월이 지나갈수록 별은 사라져 갔지만, 반짝임은 사라지지가 않았다. 그처럼 세월이 지나감에도 은은함에 가슴이 아려오게 하는 달 또한 그 사랑스러운 둥그럼이 사라지지가 않았다.

“후-”

숨을 내뱉자 하얀 입김이 하늘로 올라가 이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이는 수많은 문학 작품 중에서도 유독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 와 ‘이육사‘의 청포도를 좋아했었다. 한창 마이클 잭슨의 노래가 유행을 하고, 아바의 노래를 휴대용 카세트에 넣어 들으며 잡지를 뒤적거리던 그 시절. 아이는 항상 창밖을 보며 이육사의 시를 조용히 읊조리거나 얼마나 읽었던 건지 책 끝이 너덜거리는 소나기를 다시금 읽으며 . 산울림의 ’너의 의미‘나 혹은 들국화의 2집을 듣고 있는 자신의 이어폰 한 쪽을 빼앗아 가기도 했었다.

그러고 나서는 창밖을 보던 시선을 돌려 눈을 맞춰 웃어주거나, 책을 탁 덮고는‘재밌었다.’하고 늘 작게 속삭여 주던 아이는 지금 생각해 보면 과연 책의 뜻이나 알고는 읽고 있었던 걸까. 라는 의문이 문득 들었다.

아이는 독립지향적인 이육사의 청포도를 읽을 때마다 왜인지 밝은 소나기 같다는 이야기를 간혹 하고서는 선물 받은 일제 시계를 찬 하얀 오른손으로 내 손등을 쓰다듬으며 ‘넌 은쟁반 위의 하얀 모시 수건 같아.’라고 알 수도 없는 말을 조곤조곤 속삭이고는 했었다.

그 때는 닭살이 돋는다고 하지 말라며 아이의 어깨를 내려칠 때도 있었는데, 내심 세월이 지난 뒤 늦게 서야 그 뜻을 생각해 보니. 왠지 아이의 말이 이해가 가고는 했다.

밝은 소나기.

이미 지나가버린 7월. 한창 포도가 자랄 그 철은 지났지만, B은 왠지 A를 만난 지금이 7월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이를 본 그 순간부터‘하늘 및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A는 푸른 바다였다. 지금의 난 그걸 맞이하는 넓은 가슴이고.

“후-”


그리고, 다시금 우리는 예전 웃음 가득한 그 시절로 되돌아 갈 수 있을 거라는 묘한 믿음이 생겨나고 있었다.

아아-새벽은 묘한 마술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너를 닮아가고 있는 걸까.

결국은 픽-실소를 지으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B의 발걸음이 묘하게 가벼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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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그 순간부터.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끝낸 A는 오랜만에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한 뒤에도 남아 있는 여유 시간에 천천히 스트레칭을 하며 찌뿌등한 몸을 움직였다.

항상 6시. 칼 같은 시간에 카페 문을 닫고서는 집에서의 여가시간을 보내는 A는 요즘 한국인의 마인드와는 맞지 않게 6시 퇴근을 고집하는 한 사람이었다.

솔직히 저녁에도 장사가 되는 편이긴 하지만, 아직 어린 취준생을 오래 붙잡아 두기도 싫었고, 늙어서까지 고생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게 자신의 결론이었으니까. 10대 시절. 늘 버릇처럼 오른손에 차고 있던 시계가 20여년 만에 왼손으로 옮겨간 지금. A는 오랜만에 책장을 뒤적여 고등학생 시절의 앨범을 꺼내들었다. 졸업 이후 간혹 B가 보고 싶을 때마다 펼쳐 보았던 앨범을 B을 만나고 나서 펼쳐보려니 왜 이렇게 낯이 간지러운지. 괜히 목 언저리를 긁적이며 앨범을 넘긴 A는 마치 280화질처럼 옅게 보이는 컬러 사진들 속, 환하게 웃고 있는 B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는 지금과는 다르게 아이들이 많았던 시대라 셀 수도 없이 많은 검은 머리들 사이에서 아이를 찾는 게 왜 이렇게 쉽지가 않은지. 늘 앨범을 열 때마다 아이를 찾아다녔던 A는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듯 아이가 있을 만한 언저리를 두리번거려 찾아낸 B의 모습에 괜히 미소가 실실 새어나왔다.

성숙하지만, 젖살이 빠지지 않아 통통한 볼이, 웃고 있는 입가의 호선으로 인해 더 부곽 되어 보였다. 아아 어여쁘다.

2학년 수학여행은 비록 함께하지 못하였지만, 3학년 소풍만은 함께였었지. 아이들끼리 둘러 앉아 노래를 부르고, 옆 학교에서 소풍을 빠지고 쫒아온 남자아이들의 장기자랑을 보고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던 그 때 그 시절.

‘탁’

이내 앨범을 덮은 A는 따뜻한 미소가 씁쓸하게 변해가는 입 주변을 매만지다 집 안임에도 답답하게 채어진 왼 손의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이제 우리는 그 때 그 시절처럼 순수하지 못했다. 사랑의 깊이 또한 달라졌다. 그래서 더 애틋할 터였다.

밭에서 무를 뽑아 매콤한 그것을 아삭거렸던 소녀와 소년의 사랑처럼. 우리 또한 애틋할 터였다. 그럼에도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지지는 않을 거였다.

세월의 지나감에 따라 사람은 죽고, 그 차가운 몸에서 물이 흘러 이내 살점은 사라져 뼈만 남을 터였지만. 사랑은 대와 대를 이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 것처럼 우리의 사랑 또한 20년의 계단을 내려와 다시금 메밀 꽃 마냥 피어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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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1-21 20:29 | 조회 : 1,599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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