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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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영화 한 편을 감상했다. 그저 남들처럼 당연하게 그리고 연인처럼 다정하게 서로에게 기대어서, 팝콘보다는 치즈 소스가 듬뿍 뿌려진 나초를 오도독거리며 본 스릴러 무비는 왜 이렇게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건지. 오히려 지금의 남편과 데이트를 했을 때 보았던 러브 코미디 보다는 액션과 공포 위주로 나뉘어 있는 이 스릴러 무비가 더 재미있다고 느껴질 만큼 B에게서의 이 시간은 너무나 행복했다.

내게 남겨진 게 없었기에, 무언가를 발견한 기쁨이 크기 때문일까.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윤동주 시인이 써내려갔던 시 한편 마냥 내 마음도 이리저리 치여 부딪혔던 그 고통에서 조금은 벗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딱히 나쁘지는 않은 기분. 오히려 나쁘다기보다는 이제 막 돋아난 어린 새싹 잎을 바라보는 새끼 강아지의 순둥한 눈망울처럼 순수한 감정만이 마음속에 그득해 기쁘기 그지없었다.

젊은 시절. 아이와 같이 영화를 보러 간 적도 없었고, 이런 상황을 상상해 본적이 없었음에도, 왜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이처럼 행복하다는 예감이 드는 것일까. 이런 경험을 해 보지도 않았고, 이미 지나간 시절임에도.

참 아리송한 기분에 내려놓은 콜라를 스트로우 빨대로 쪼르륵 마시던 B은 이내 맛있는 식사를 하자며 분위기 좋은 식당으로 운전을 하려는 A에게 고개를 저으며 이내 간단하면서도 종류가 다양한 근처의 초밥뷔페로 네비 주소를 변경해 주었다.

“영화는 네가 샀으니까. 밥은 내가 살게. 그래야 서로 공평하잖아.”
“내가 사주고 싶은데…”
“안 돼. 돈이 모으는 건 힘들지 쓰는 건 눈 깜짝할 사이에 다 사라져버리니까. 푼돈이라도 아끼는 게 좋은 거야.”
“헤에…B가 딸이 있다더니 거짓말은 아니었나봐. 예전에는 틈만 나면 징징거리면서 응석 부렸었는데.”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까. 싫어도 변할 수밖에 없는 게 있는 거야.”
“그래도-비록 성격은 변했어도 우리는 변하지 않았잖아.”

부드럽게 핸들을 꺾으며 주차장으로 들어가던 A가 이내 익숙하다는 듯이 비어있는 자리에 주차를 한 뒤에야 왼손에 채워진 손목시계를 풀어내며 어린 그 시절처럼 오른손에 꼭 매었다.

여분의 구멍이 하나가 남을 정도로 얇은 손목에 단단하게 채워진 손목시계는 늘 아랫부분으로 차고 있던 그 때와는 다르게 손등 쪽으로 유리알이 보이게 시계를 찼고. A가 이내‘짠!’하는 귀엽고도 어리숙해 보이는 효과음을 내며 시계를 B의 앞에 들이밀었다.

“어때? 이러면 옛날이랑 비슷해 보이려나?”
“하나도 안 똑같거든?”

사실은 어릴 적 잔상이 그대로 남아있는 A의 얼굴과 뭉툭한 보조개에 절로 잔 미소가 그려지려던 B은 이내 입을 다물고는 차에서 내려 조금은 분비고 있는 식당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아이를 보면 옛 잔상이 남아있듯이 아이도 날 보면 그렇게 옛 잔상이 남아있을까. 그래. 아마 그러겠지. 성격은 변해도 외모에 남아있는 잔상과 무의식적인 버릇은 없어지지가 않는다.

칼을 대거나 그것을 의식하고 억압하여 바꾸려하지 않는 이상은. 그러니 필히 아이에게도 19살 어릴 적 내 모습이. 그 잔상이 남아있을게 뻔할 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혀 아쉽지도 않고 과거에 얽매여 있어도 슬프지가 않는 이유는. 그 때는 항상 행복했던 기억들만이 남아있었기에. 과거를 다시 생각하고 오랜 시간동안 그 곳에 파묻혀 있어도 전혀 아쉽거나 서운하지가 않는 거였다. 슬프지도 않고 웃음만 가득한 그 시절.

물론, 지금은 하지도 않는 교련이란 과목에서 붕대를 감거나 남자아이들이 행렬을 하고, 학생의 인권은 없다는 듯이 무자비하게 폭행을 일삼았던 선생님들에게는 좋은 감정은 없었지만. 그 때를 되돌아보면 행복한 기억이 80프로라면 나쁜 기억은 20프로다. 그래서 결코 슬프거나 힘겹지가 않았다.

“어서오세요!”

필히 아이 또한 그럴 것이었다. 우린 늘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시간을 오직 둘 만이 공존하는 것 마냥 살아왔으니까. 필히.

“같이 가-”

그래. 필히.

“너무 느릿한 거 아니야?”

단정한 셔츠를 입고서는 인원 확인과 함께 안내를 해준 직원에게 인사를 전한 뒤에야 패딩을 벗고선 푸드 코너로 들어간 B을 졸졸 쫒아온 A와 그런 A의 손에 접시를 쥐어주고는 어릴 적 간혹 소화불량으로 고생하던 그 때처럼 양배추와 만다린이 들어있는 샐러드를 올려 준 B은 얼른 따라오라며 A를 이끌었다.

자신의 딸이 요즘은 성장기인지라 식비가 감당이 안 되어 자주 뷔페를 온다고 궁금하지도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던 내용을 말해주며 샐러드와 수프 위주보다는 간장에 푹 담구었다 나온 새우로 지은 초밥과 붉은 북방조개를 김과 함께 말아 놓은 초밥을 담고 튀김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B은 느긋하게 초밥을 골라 담는 A를 기다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먹고 싶은 음식을 두 접시나 가득히 담은 뒤에야 자리로 돌아와 초밥들과 겉에 덴뿌라(てんぷら)가 가득 묻혀진 튀김을 와사비가 섞인 간장에 콕 찍어 입에 넣고는 우물거렸다.

오랜 시간 놔두었음에도 온도 조절을 할 수 있는 온열기가 음식을 계속 데우고 있어서일까, 은은한 따뜻함을 가지고 있는 단호박 튀김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바삭함이 살아 있어 입안에서 사각소리를 내며 기분 좋게 씹히고 있었다.다음에는 D랑 같이 와야지.

자나 깨나 언제나 자식 생각이 가득한 B은 다시금 튀김을 우물거리다 이내 D를 향해 톡톡 메신저를 보냈다. 이번 주 휴일에는 같이 뷔페를 가자고 열심히 수업을 듣고 있을 딸에게 전송 버튼을 누르고서는 느긋하게 걸어오는 A를 뚱하니 바라보다 북방조개 초밥 하나를 입어 넣었다.

쫄깃하면서도 바다 특유의 맛이 느껴지는 것 같은 북방조개는 B가 좋아하는 조개류들 중 하나였다. 물론-어린 시절 가난한 가족. 3자매 중에서도 힘센 언니 밑에서 자랐던 둘 째 B은 많이 먹을 수 없었던 해산물을. 특히 북방조개를. 지금도 간혹 조개가 먹고 싶어질 때면 언니에게 맛있는 걸 사달라며 투정을 부리다가도 이내 시내로 나가 큼직한 꼬막 무침 한 팩과 키조개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으로 먹기도 하는 편이었다.

간혹, 뻘 세척을 하지 않은 조개를 사와 다음 날까지 기다려야 하는 곤욕이 있기도 하였지만. 이상하게 고기보다는 해산물이 좋은 B은 이번에는 케이퍼 한 알이 올라가 있는 연어초밥을 우물거리다가도 A가 건네는 우동 그릇을 받아들고는 수저로 국물을 홀짝거렸다. 방금 전까지 나초와 콜라를 우물거려 차 있던 배가 거짓말처럼 가라앉은 것처럼 허기가 지는 기분에 정신없이 음식들을 우물거리던 B은 A가 한 접시를 비울 때 즈음에야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들을 담기위해 동분서주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B의 모습을 흘깃 바라보다 이내 가져온 녹차를 한 모금 홀짝인 A가 결국 헤실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사라지지 않는 미소에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어린 시절 그때와 변하지가 않았다. 여전히 예쁘고, 여전히 사랑스럽고, 여전히 먹성이 강한 아이. 그게 어린 시절. 그리고 지금의 B었다.


오늘도 여전히 발라당 까진 언니들이 담배를 펴고 가는 나무 옆 벤치에 앉아 도시락 뚜껑을 열던 A는 고추장과 함께 버무린 멸치 복음을 오물거리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B에게 흘러내릴 것 같은 반숙 계란으로 어렵게 만들어진 장조림을 밥 위에 올려주며 느릿하게 흰 밥을 입가로 가져다 댔다.

“야-”
“응?”
“우리 언니-공장 갔다.”
“…응?”
“없는 살림에 대학 보내났더니, 사고 쳐가지고. 다행인지 아닌지 애는 유산이 되었는데. 아빠가 엄청 뿔이 나셨어. 머리 밀고 절에 보낸다고 하는 것도 그나마 엄마가 난리 쳐서 도망치듯이 공장 간 거지….”
“그런 이야기를 나한테 해줘도 괜찮은 거야?”

반찬도 없이 차가워진 흰 밥을 삼켜낸 뒤에야 의견을 내뱉는 A와 도시락 위에 올려진 장조림의 계란을 반으로 가르자 흘러내리는 노른자에 씨익-미소를 짓던 B가 이내 고개를 들어 A를 바라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안 될게 뭐가 있겠어.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인데.”
“…그래도.”
“걱정 마. 이 사실은 우리 마을을 통틀어서도 너랑 나랑 우리 부모님밖에 모르는 사실이니까.”
“….”
“그리고-언니도 솔직히 정신 좀 차려야해 누구는 가고 싶어도 못 가는 대학을…그렇게 쉽게 말아먹어버리다니.”

쓴 맛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웅얼거리다 늘 빠지지 않고 들어있는 분홍 소시지를 우물거리던 B은 이내 후-숨을 내뱉고는 다시금 활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난 우리 언니 믿으니까. 그래도-잘 하겠지. 한 일 년 정도는 조용히 있다가 들어가면 아빠도 모른 척 해주실 거야.”

그리고 다시 시작해야지.


다시금 푸른 하늘에 오색 별사탕 마냥 둥둥 떠 있는 하얀 구름을 바라보며 밥을 우물거리는 B의 모습을 바라보던 A는 그런 B의 씩씩한 척 하는 모습을 외면한 채 느릿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B은 항상 그랬다. 속상하거나, 슬픈 일이 생길 때면 오히려 더 씩씩한 척, 강한 척을 하고는 다 괜찮을거라고 혼자만의 주문을 거는 것이 말이다.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으면서. 오히려 자신도 무섭고 자신이 없으면서도 항상 남을 걱정시키기 싫어하는 아이였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A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드는 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B에게 굳이 압박을 가하지 않는 건. 참을성이 강한 A만의 배려였다. 서로를 배려하고 있음에도 둘 다 고통스러운 배려.

B의 멸치 볶음을 집어 오물거리던 A는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B을 따라 고개를 치켜 올려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아-하늘이 기분 나쁠 만큼 참으로 청아하고도 아름다웠다. 그 때문일까 이상하게 짜증이 샘솟는 기분에 멸치 볶음을 삼켜내던 A가 이내 입술을 삐죽거렸다.

진짜 하늘 한 번 더럽게 맑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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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10-05 01:25 | 조회 : 1,744 목록
작가의 말
무관심

다음편부터는 책 제작으로 인해서 결제로 바꾸겠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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