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
“그러게-지금은 많이 달라졌으니까.”

세월이 지나간 만큼 우리도-그리고 이 세상도.

뒷말을 느리게 우물거리다 이내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B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말이야. 딸이 있어. 이제 열여덟 살이야.”
“….”
“남편은…매일 출장출장 하면서 이제 곧 정년퇴직인데 어디를 그렇게 싸돌아다니는지. 이제 나 같은 늙은 여자 말고 젊은 여자들이 끌리나 봐.”

“…지금 나 떼어놓으려고 일부러 이런 말 하는 거야?”
“아니, 이건 전부 사실. 그리고-사실대로 말하자면 말이야. 이때까지 다 잊고 살았었는데…오늘 따라 잘 마시지도 않는 커피가 왜 그렇게 마시고 싶었는지…이제야 알겠다. 널 다시 만나려고 그랬었나봐.”

금세 반쯤은 동이 나버린 아메리카노가 찰랑이는 머그컵을‘달칵’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B의 하얀 피부였던 예전과는 달리 조금은 붉게 열이 오른 왼손을 만지작거리며 후우-다시금 숨을 내쉬었다. 20살.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했던 그 시절. 서럽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주문처럼 내뱉었던 이 숨이. 지금은 버릇처럼 남아서. 강한 눈빛을 보내오는 저 아이로 인해 저절로 내뱉고, 내뱉고, 내뱉어진다.

“B아.”
“난 예나 지금이나 줄 수 있는 게 없어 A야. 세상이 변해서 인정을 해 준다고 해도, 조금은 당당해졌다고 해도. 내가 너한테 줄 게 없어 A야. 어느…누가. 이제 다 커가는 애가 있고, 남편이 있는 사람을 사랑해 줄 수 있겠니.”

비록 바람둥이 남편이지만 말이야.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뒷말을 내뱉은 B는 이내 몸을 일으켰다. 애초에 바로 나갈 생각이었던 듯 조금은 덥다고 느껴질 내부 온도에도 꼭 여며 입고 있었던 하얀 패딩을 더 꽈악 여미며. 이내‘갈게-잘 있어.’라는 인사를 끝으로 사라지려 한다.

내 앞에서. 다시금 내 인생에서.
25년을 사라졌던 아이가. 또.

다시금 조급함이 일었다. 인생은 느긋하게 라는 모토는 다 어딘가로 날아가 버린 건지. 떠나가는 아이를 따라 몸을 일으킨 A가 이내 B의 손을 다시는 놓을 수 없을 정도로 힘껏 잡고서 방금 전 B가 계속 그러했든 후-숨을 내쉬었다. 후-후-길게 그리고 짧게 여러 번.

“…우리 다시 말이야. 천천히 시작 하자. 나 잘 할 수 있어. 애가 있어도 괜찮고, 네가 유부녀여도 이렇게 나이를 먹고 주름이 있어도 괜찮아. 내가 다 괜찮아 B아. 들키지 말자. 주지도 말고. 그냥 이렇게 받기만 하자. 내가 잘 할게.”

애원조로 애타게 내뱉는 말 사이로. 붙잡힌 손을 채 뿌리치지도 못 한 체 붙잡혀 있던 B는 다시금 후-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우선 가 볼게. 핸드폰 좀 줄 수 있어? 내 번호 알려줄게.”

결국 못 이기는 척 잡혀있는 손에 힘을 주어 A의 손을 맞잡은 B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 짓고 말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음에도 억지웃음을 짓는 꼭 그런 웃음처럼.

어린 시절 장난 같던 사랑은 우리에게 사치였다. 나이가 지나감에 따라 달라지는 건 장난이 아닌 진지함이었고, 느릿함이 아닌 조급함이었다. 그러기에 사실 알고 있는 거였다. 내가 지금 이 아이의 손을 잡으면 놓지 못할 거라는 걸. 우리는 어린 10대 20대가 하는 풋풋한 사랑이 아닌 진지하면서도 더할 나위 없는 사랑을 할 게 분명하니까. 필히 불장난이 아닐 거였으니까.

결국 슬픔과 기쁨이 섞인 얼굴로 핸드폰을 건네는 아이의 손에서 폰을 받아들고 나서야 패턴은커녕 비밀번호도 하나 안 걸려 있는 아이의 폰에 꾸꾹 전화번호 열두 자리를 적어 넣은 B은 카페 밖까지 배웅을 해주는 A에게 인사를 받으며 천천히 멀어져 갔다.

그리고-

오늘 저녁엔 왠지
딸의 얼굴을 볼 낮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B었다.

“…저기 사장님…저 이제 나가도 되요?”
“……다…들었어요…?”
“…으음…어쩌다가…?”

그렇게 B을 보내고 카페로 돌아온 A는 직원휴게실 안 문틈으로 쭈볏쭈볏 고개를 내미는 아이의 모습에 그제 서야 아차 싶은 표정이 되어서는 황당하다는 듯 허허 헛웃음을 내뱉었다. 참…A 배알도 없는 모습 다 보였겠네. 싶은 마음보다는 오히려 저가 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의 모습에 그저 웃음을 짓다‘우리 이제 일 해야죠.’ 라고 말하며 되려 C을 타이르는 A었다.

그리고는 이내

“C 학생-나 이제 연애 할 것 같아요.”

라고 다시금 놀리는 말을 내뱉으며 아메리카노가 반 쯤 담겨 있는 컵을 싱크대에 담군 A 식사 전 공부를 하려 꺼 놓았던 음악을 트는 C에게 다시금 물음을 담아 입을 열었다.

“C 학생은 애인 있어요? 이를 테면…첫사랑이라던가. 아니면-짝사랑이라던가.”
“에이-취업하기도 바쁜데 무슨 연애에요. 지금은 사랑도 사치입니다아- 그래서 지금 좋아하는 연예인 콘서트도 못 가는데!”
“그러니까 얼른 이번에 무역 관리사 자격증을 따오세요. 그러면 시급도 올려주고, 다음에 하는 콘서트 티켓 값도 줄게요. 어때요?”
“…좋아요!!”

방금 전까지 어정쩡하게 서 있던 사람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의지를 불태우는 듯 화르륵 타오르는 아이가 다시금 책에 얼굴을 파묻는 걸 보며 작은 꼬마아이처럼 쿡쿡대던 A는 이내 카페 안에 구비되어진 스피커로 나오는 최신 유행곡을 들으며 무겁게 숨을 내쉬었다. 남편, 딸, 그리고 좋은 아내. 거기에 감히 내가 끼어들어 갈 틈이 있을까나.


필히 B은 좋은 아내였을 터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을 차리고 딸과 남편을 깨우고 배웅을 해주는 것까지의 아침 일과를 마친 뒤에야 성실하게 자기가 맡은 바를 열심히 할 사람이 바로 B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분명 좋은 사람이 아니겠지만.

진하게 내린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시며 으음…앓는 소리를 내뱉던 A는 이내 한두 명씩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주문을 받으며 슬렉스의 뒷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의 존재를 신경 쓸 틈조차 없을 정도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장사가 잘 되면 좋은 거지만. 오늘따라 왜 이렇게 어려운 음료 종류로만 주문을 하는지…테이블 아래 구비되어 있는 냉장고에서 새 생크림을 꺼내며 벌써 몰아치는 것 같은 피곤에 목을 돌린 A가 이내 음료 제조를 시작했다.

생크림 듬뿍, 초코칩 많이.
단 걸 좋아하시는 손님의 주문이었다.


-

깨끗한 집 안 내부임에도 뭐가 이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건지. 괜히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한 번 더 반복한 B은 허리가 뻐근히 아파올 때 즈음에야 걸레를 빨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후우-”


사실. 막대형으로 되어 살균 티슈를 부착하여 사용하는 청소용 제품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고 싶은 마음에 직접 걸레질을 한 덕분인지 온 몸이 뻐근해짐과 그와는 비례되게 왠지 더 상쾌한 기분이 드는 B었다.

“벌써 시간이…”

지금 쯤 저녁을 만들고 개인적 여가시간인 뜨개질을 하려고 했었는데…

늘 지루하게 흘러갔던 시간이 오늘따라 유독 빨리 흘러간 기분이 들었다. 벌써 5시 30분이라니.

곧 있으면 D가 집에 돌아올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그 사람도. 좋아하는 감정이 아닌 정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아이에게는 좋은 사람이니까 오늘 만큼은 집에 들어와 주겠지.

락스를 풀어 더러워진 걸레를 담구어 놓은 뒤 냉장고에서 봐 왔던 장거리를 꺼낸 B은 이내 최대한 빠르게 할 수 있는 요리가 무엇이 있을까 진지한 고민에 잠기어 있었다.사실 있는 걸 대충 차려주고 싶은 마음이 컸었지만, 전 날 딸인 D와 남은 반찬에 고추장을 넣고 비벼 먹었기에 실상 남아 있는 반찬이 없었다. 그렇기에 무언가를 하긴 해야 하는데…

이내 오뎅 볶음과 D가 좋아하는 소시지 볶음을 하자는 결론을 짧게 내린 B는 싱크대에서 손을 씻고는 도마와 식칼을 꺼내 들었다. 이참에 꽁치 통조림으로 김치 찌게도 만들까.

팩 안에 담겨 있는 세척된 파와 양파를 꺼내어 물을 틀어 한 번 더 헹구던 B은 야채를 도마에 올려놓기 무섭게 울려오는 핸드폰 벨 소리에 이내 손에 묻어 있는 물기를 대충 털어내었다.

그러면서도‘D 아빠 로 단조롭게 저장되어 있는 수신자에 조금은 설레었던 마음이 왜인지 알 수도 없게 차갑게 식어 내린 기분이 드는 걸 느끼며 전화를 받았다. 아마도. 내심 그 아이였으면 하는 바램이었겠지.

“여보세요-”
“아-D 엄마, 지금 바빠?”
“아니-왜?”
“오늘 다른 지점의 사람들이랑 모여서 회식을 한다네? 나 오늘 조금 늦을 것 같아서. D랑 먼저 저녁 먹고 자고 있어-”
“…알겠어. 술 많이 마시지 말고.”
“어-”

‘뚝’

짧은 시간 만에 단조롭게 끊겨버린 전화에 또 버릇처럼 후-길게 한숨을 내뱉은 B가 이내 깨끗하게 씻어진 파를 10등분 하여 팩에 담아 다시금 냉장고에 다른 재료들과 함께 집어넣었다.

오늘은 D가 좋아하는 피자나 시켜먹을까나.

최근 피자 한 판은 혼자 다 먹어치워 버리는 사춘기 딸을 위해 사이드 메뉴를 함께 시킬까 아니면 피자를 한 판 더 시킬까 고민을 하던 B은 손에서 질척하게 묻어 사라지지 않는 물기를 바지춤에 문지르며 거실로 돌아가 소파에 편하게 기대어 앉았다.

그러고 보니-그 아이한테 번호를 못 받았구나.

문득. 참 몹쓸 생각이지만. 이 아이였다면 누구처럼 날 혼자 두지는 않았을 텐데. 란 생각이 들었다. 주에 3-4번은 넓은 침대에 혼자 누워 잠을 자고. 자세한 설명을 하지도 않고 간단한 통화로 일을 일단락 시켜 사라져 버리는 누구와는 다르게 학생 시절부터 다정했던 그 아이는 왜인지 항상 변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B었다.

하지만 그럼 뭐해.

우린 이제 늙어가는 한낱 중년일 뿐인데. 젊고 풋풋하던 모습. 그 때로는 돌아갈 수는 없을 터였다. 우리는 이제 너무 커버린 어른이니까.

갑작스럽게 몰아치는 피로함에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대며 눈을 감은 B의 귓가로 어릴 적 히터 하나도 없이 넓은 교실에서 수업을 듣던 그 때 그 시절 아련한 소리들이 들려오는 듯한 환청이 일었다.


“야-너 죽을래?”
“미안미안-”


한참 동장군과 같은 추위가 몰아치는 이맘때는 더운 여름에 넓게 떨어져 앉은 책상을 뭉쳐 동그랗게 모여 있는 아이들과 그 사이에서 B의 주머니 안에 있는 알사탕을 꺼내가던 A는 항상 먹을 것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는 B으로 이내 잽싸게 손이 잡혀 버리고 말았다.

외제 샤프라고 선물 받은 샤프를 B에게 가지라고 주었던 A는 그 샤프를 가지고 공책에 낙서를 끄적이는 B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다시금 알사탕을 꺼내어 자신의 주머니에 우겨넣었다.

“야! 너가 사서 먹어!”
“안 돼…사서 엄마한테 걸리면 죽는단 말이야.”
“…이래서 부잣집 애들이 더 불쌍하단 거야.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먹고.”
“알면 이거 내가 먹는다?”
“…그러세요. 그거 하나에 몇 원 한다고…네가 준 샤프에 비해 100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인데 뭐.”
“헷…”

작은 알사탕 하나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주머니에 우겨 넣은 걸 꺼내어 포장지를 까 입에 넣은 A는 이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책상 위 쌓여 있는 문제집에 턱을 올린 체 고개를 돌려 B의 옆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남들과 같은 검정 머리와 최근 단속이 심해져 귀 밑 8센티로 맞춰 자른 단발머리가 왜 저렇게 풍성해 보이는지 괜히 B의 배는 더 귀여운 기분이 드는 A었다.

엄마에게 조르고 졸라 생일 선물로 힘겹게 얻었다는 검정색 칙칙한 카세트에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꽂아 넣고는 여전히 알 수도 없는 글씨로 낙서를 끄적이던 B은 벌써 수십 번은 들은 것 같은 마이클 잭슨의 노래가 막바지에 다다른 듯 카세트테이프가 뒤로 돌아가는 기계음에 들고 있던 샤프를 내려놓았다. 위잉잉 인지 드루루루 거리는 건지 알 수도 없는 소리.

“A야-”
“…응?”
“오늘 점심도 거기서 먹을까?”
“그럴까? 근데 나 거기 좀 별로야. 요새 애들이 그 쪽에서 담배 핀단 말이야. 나무 뒤에 숨어서.”
“어차피 넌 모범생이니까. 거기에 있어도 별 의심 안 하지 않을까?”
“…뭐야, 날 그런 쪽으로 이용하려고 하다니…!”
“와앗…! 야아!! 너 손 완전 차갑단 말이야…!!”

몸을 일으켜 B의 후드티 뒤로 손을 집어넣은 A는 이내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치는 B을 꽈악 끌어안으며 결국 웃음 짓고 말았다. 반응이 너무 좋아서 더 괴롭히고 싶은 걸 이 아이는 알고나 있을까나. 란 생각을 하면서.


“…마…엄마!!”
“…어?”
“이때까지 잔거야? 졸리면 방에 가서 자지 불편하게 왜 그러고 자?”
“어…조금 졸았나보다. 학교 잘 다녀왔어?”
“졸기는…완전 침 나올 것처럼 잘 자던데…”
“그래?"
"응!“

“우리 D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네?”
“완전 최고야! 나 오늘 길 가다가 완전 잘생긴 오빠들 봤단 말이야. 연애하고 싶어졌어.”
“하하…”
“그건 그렇고. 어마마마 오늘 저녁은 무엇이옵니까. 이제 슬슬 배가 고프옵니다.”

“오늘은 D가 좋아하는 피자?”
“진짜? 완전 좋아!!!! 나 옷 갈아입고 올 테니까 대신 좀 시켜줘!”
“손도 씻고-”
“네에!”

피자 하나에도 기쁜 듯 펄쩍거리며 방으로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에 절로 나오는 행복 가득한 미소를 짓던 B은 이내 D 사라지고 나자 느리면서도 급격하게도 몰아치는 죄책감에 후-숨을 내쉬었다.

그 이는 다른 사람을 만나고도 아이에게 자상하게 웃음을 짓던데…나도 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아이의 얼굴을 보지도 못할 것 같았다…헌데 아이를 대하는 건 변하지가 않는다. 이게 이런 느낌이었구나. 하지만. 굉장히 아프다. 심장이. 가슴이 뻐근하고 무거운 그런 고통 말이다.

이내 핸드폰을 들어 114를 연결하던 B은 새삼 방금 전까지 꿈에서 나오던 옛날을 다시금 떠올리며 후- 또 숨을 깊게 내쉬었다.

마음이 아프다.
이번엔 다른 느낌으로.

그리워서 아팠다.
예전이 그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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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1-11 02:06 | 조회 : 1,645 목록
작가의 말
무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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