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변화(1)



"황태자 폐하? 여긴 어쩐 일로..게다가 그 자는.."


덩치가 큰, 푸른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단장이 마인을 보곤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마인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다가갔다.



"아아. 잠시 볼 일이 있어서 말이지.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 많군."



리안은 마인이 기사단장과 얘기하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 대제국의 힘의 축인만큼, 매우 넓은 크기의 훈련장에 시설도 잘 되있었으며 기사들의 실력도 한 명 한 명이 꽤 되어 보였다.



"카인이라면 지금 숙소에 들어가서 쉬고 있을 겁니다.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리안은 기사단장이 가리켜 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마인이 천천히 따라 걸어갔다. 숙소 안은 꽤나 쾌적하게 꾸며져 있었다. 긴 나무로 된 복도를 지나던 중 리안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발걸음을 멈추었다.



"- 싸울 생각 없으니 물러가 주십시오."



약간 화가 난 듯한 카인의 목소리였다. 리안은 그 자리에 멈춰서 방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인은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한쪽 미간을 들어올렸다.



"왜, 쫄리나? 그래도 한 나라 황태자의 호위무사였던게. 아 참, 그 나라는 없어졌고 황태자란 놈은 궁 안에 묶여 경멸의 대상이 된 채 지내고 있었지? 너도 참 불쌍하다, 주인이 저주받은 놈이라서."



"...그만하십시오."



"어이, 손에 힘 안 빼? 표정 구기는 거 봐라. 선배한테 한 대 치겠네?'



리안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설마, 자신 때문에 카인까지 이런 대접을 받는다곤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리안은 주먹을 꾹 쥐었다.



자신한테 침을 뱉거나 욕하는 건 괜찮다. 익숙하니까. 그런데, 어째서 주변 사람까지 이런 고통을 받아야하는 건가.


리안이 입술을 꼭 깨문 채, 방으로 막 들어가려 할 때, 마인이 그 앞을 막아섰다. 리안이 의문을 표할 새도 없이 마인은 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잘도 떠들고 있군 그래. 실력으로 안 되니, 입으로 놀리는 건가?"



"화, 황태자 폐하??"



기사들이 카인을 애워싼 채 협박 아닌 협박을 하다 말고, 무릎을 꿇었다. 마인은 기분이 안 좋은 듯, 미간을 살짝 좁혔다.



"너희들, 이번 전쟁에서 별로 한 일도 없이 벌벌 떨고만 있었던 놈들 같은데 주둥이 놀릴 시간에 가서 연습이나 더 하는 게 어떤가."



마인의 차가운 말투에 그들은 헐레벌떡 인사를 하곤 방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리안을 보더니 '칫'하며 이를 갈곤 그대로 지나쳤다. 리안은 어안이 벙벙해진 채 방으로 들어왔다.



"아, 고맙습니다..."



리안의 인사에 마인은 아무 대답도 안하고 할 얘기 하라는 듯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댔다. 카인은 그제야 리안에게 다가갔다.



"리안님, 어디 다치신데는 없으십니까? 밥을 제대로 못 드신다거나.."



"아니, 괜찮아. 너야 말로, 나 때문에 괜히 시비가 걸린 것 같다만.."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열등감에 저러는 겁니다. 어쨌든 무슨 일로-.."



리안은 마인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오랜만에 너와 대련하고 싶어서.. 왔긴 하다만..-"



그렇다. 카인을 만나는 것 자체는 허락을 받았지만, 카인과 대련을 한다는 것은 마인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마인은 그저 무표정하게 리안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해. 대신 오늘만이다. 네 실력을 계속 묵히고 있긴 아까우니 특별히 허가해주는 거야."



리안은 살풋 미소를 지었다. 왠지 오늘따라 마인이 제게 친절한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마인은 기사단장에게 명령해, 대련장 하나를 둘만 쓰도록 했다. 그리고 카인의 원래 검과 리안의 순백의 검을 가져오게 했다.
마인의 머릿속에선 자신이 이렇게까지 리안을 위해 해주는 행동들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몸은 머리가 시키는대로 따라주지 않아 답답할 노릇이었다.



"..짜증나는군."


마인은 대련장 한쪽에 기사단장이 준비한 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아 미간을 좁혔다. 아까부터 리안과 오랜 시간을 같이 있다 보니 가슴 한 켠이 간질간질해 짜증이 났다. 설마 리안을 좋아하는 것인가, 라고 순간 생각이 들었긴 하지만 자신이 그럴리 없다며 단순한 호기심이라 여기고 넘겼다.



그때, 대련이 시작되었다. 리안은 오랜만에 잡아보는 검의 감촉에 미소를 지었다. 차가우면서 묵직하고 예리한 이 느낌. 굳은살이 박힌 그의 손에 알맞게 들어차는 손잡이에 리안은 몇 번 검을 쥔 손을 돌려 보더니 카인을 바라보았다.



"뭐해? 먼저 와."



왠지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마음이 붕떴다. 어느덧 둘이 대련한다는 소리를 듣고 몇몇 기사들이 구경하러 몰려왔다. 마인은 그들이 오든 말든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리안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럼 갑니다, 리안님..!"



카인은 그대로 리안에게 달려 들었다. 오랫동안 수련하여 빠르면서도 묵직하다. 깊게 속을 파고 드는 카인의 칼을 리안은 그대로 자신의 검으로 스치듯 비켜 막고는 검 손잡이에서 오른손을 놓곤 바로 왼손으로 옮겨 카인의 정수리를 공격했다.


그 뒤로 몇 번의 공격이 더 있었지만 리안은 여유롭게 막아냈다. 그런데 그 막아내는 기술이 매우 독특하여 기사들의 시선이 쏠렸다. 마치 물 위를 닦아내듯이 부드럽게 카인의 검을 지나친다. 보통 검을 검으로 막는 것이 일반적인데 리안은 단지 약간 밀어낼 뿐이다.



'둘이 실력 차이가 꽤 크군. 대련하는 와중에도 리안은 수를 몇 개나 두고 있어.'



마인은 리안의 실력을 새삼 실감했다. 저와 붙었을 때는 마인의 실력에 눌려 제대로 그의 검술을 감상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보니 리안의 검술은-



리안이 카인의 검을 받아내며 웃는다. 그리곤 유려한 몸놀림으로 몸을 돌려 서서히 몰아붙이기 시작한다.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았음에도 그 몸놀림엔 군더더기가 없고 마치 달빛이 강가에 은은히 내려앉듯이 칼날이 움직인다.




-아름답다.



마인은 리안의 대련을 보며 점점 제 감정의 이름을 알아갔다. 가녀린 몸선과는 다르게 저보다 키가 더 큰 카인을 압도하고 있는 힘. 하얀 머리카락과 달빛을 머금은 듯한 은빛의 눈동자. 마치 춤추듯 아름다운 하나 하나의 그의 움직임.




아니라고, 몇 번이고 부정하려 했던 사실이 그제야 마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리안을 좋아한다. 그것도 안고 싶은 감정으로서.



제 어머니를 죽인 여자의 아들이다. 남자임에도 강한 신력을 가지고 있어 어릴 적부터 감금을 당해온 사람이다. 성격도 조신하지도 않으며, 강단만 크다.

처음엔 정말로 싫었다.


그런데 자신을 무서워 하지 않고 일어서 있기도 힘든 살기에도 꿋꿋히 제 할 말을 하는 그 뻔뻔한 얼굴이며 황태자라는 직위와 실력에 굽신거리는 다른 이들과 달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마인'으로 봐주는 태도. 그리고 가슴 한켠에서 그리운 듯하면서도 떠오르지 않는 기억들이 계속 마음을 움직였다.


단순한 호기심이 어느새 좋아하는 감정이 되어버렸다.




리안은 곧 끝을 내기 위해 한 발짝 앞 으로 내딛곤 카인의 검을 쳐내곤 그대로 검 을 목에 가져다 대었다. 카인이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올렸다.



"졌습니다. 실력이 어째 조금도 줄지 않으셨습니까."



리안이 피식 웃으며 대련장에서 내려왔다. 기사들은 리안을 증오했던 감정도 잊곤 길을 터주었다. 마인이 리안에게 다가왔다. 리안은 그가 계속 자신을 보고 있었음에 놀라며 그를 올려 보았다.



"그 검은 그냥 네가 가지고 있는 게 낫겠군. 이제 더 이상 시간은 못 준다."



"아, 예. 이 정도 만났으면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난 회의가 있어서 이만."



마인은 그렇게 말하곤 리안을 지나쳐 나갔다. 멀리서 콘들이 와선 마인에게 무어라 말하며 투덜대는 모습이 보였다.


리안은 뒤에서 카인이 저를 부르는 것도 듣지 못하곤 중얼거렸다.



"웃어줬던 것 같은데..잘 못 본 건가?"



마인의 달라진 태도를 생각하던 리안은 누군가가 지금까지 모든 상황을 지켜본 누군가가 있었단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곧이어 그 누군가는 리안이 카인과 함께 다가오자, 벽으로 숨었다. 그리곤 곧바로 별궁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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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1-03 15:39 | 조회 : 3,712 목록
작가의 말
렌테

감사합니당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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