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버티기(2)




"리안님? 방에서 나와 계셨네요? 저녁 준비가 다 되었어요."



메리나가 해맑게 웃으며 리안에게 다가왔다. 리안은 옅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러나 메리나 또한 저런 순수한 표정을 짓곤 있지만 이 시녀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진 않을까, 하고 리안은 씁쓸한 얼굴을 지어냈다가 메리나의 의아한 표정을 보더니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쳤다.



시녀들은 그 틈을 타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갔다. 리안은 그들에게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메리나를 뒤따라갔다.




"저 있잖아요, 황실마마분들을 이렇게 직접 보는 건 처음이예요! 다 리안님 덕분이예요."


메리나는 앞서 나가면서 흥분한 듯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도저히 아무리 찾아봐도 가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습. 리안은 자신도 모르게 진심에서 우러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뒤따라갔다. 그래, 그녀만은 아닐거다.




그러나 그 웃음은 곧 사라졌다. 거대한 홀의 문이 열린 후, 쏟아진 황족들의 찝찝하게 들러붙는 시선 때문이었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경멸과 함께 동물원에 갇힌 동물을 보는 듯한, 인간이 아닌 것을 보는 듯한 더러운 시선.



구역질이 올라올 정도로 집요하게 온 몸에 달라붙는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격식어린 인사를 한 후 허리를 핀 채, 뻣뻣해진 다리를 움직였다. 그때, 그들의 시선과는 다른 오로지 호기심과 관심으로 바라보는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마인이었다.




한동안 공중에서 마인과 리안의 시선이 얽혔다. 마인은 가만히 리안을 바라보다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다시 돌렸고, 리안 또한 그와 동시에 테이블의 맨 끝 부분에 앉았다. 그래서 보지 못했다. 마인의 귀가 약간 붉어져 있었단 사실을.



황제는 병석에 있는 탓인지, 그 자리엔 있지 않았다. 그랬기에 황금으로 세밀하게 새겨진 그의 의자는 비어져 있었으며, 그 양쪽으로 마인과 누군지 모를 한 아름다운 여인이 앉아있었다. 그 뒤로 황자, 황녀로 보이는 약간은 어린 듯한 황족들이 자리했다.


그 아름다운 여인은 웨이브 진 금발에 적당히 붉은빛이 도는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긴 속눈썹은 그녀의 녹빛 눈동자를 가지런히 덮었으며 오뚝한 콧대와 귀여울 정도의 옅은 주근깨, 화장을 하지 않았음에도 붉은 입술은 너무도 그녀와 아름답게 어울리고 있었다.



마인이 입을 열었다.


"먼저 소개하지. 이쪽은 베리어스 지나, 내 약혼녀다."



뭐라고? 리안은 수저를 집으려던 손을 멈췄다. 약혼녀라니, 마인에게? 없을 만한 얘기는 아니다. 마인은 분명 나이가 혼기에 찬데다가 황태자로서 약혼녀 한 명 쯤 있는게 당연했다. 그걸 알고 있는데도-



"반가워요. 그쪽이 그 유명한 리안님이군요."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인사하는 그녀의 순한 웃음에도 리안은 웃지 못했다. 단지, 싱숭생숭하면서도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와 표정 관리를 하기 힘들었기에 짧게 대답하고 말았다.



"예, 반갑군요."



그 이후부턴 마인이 황족들을 소개해주었지만 리안의 귀에는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대화를 하는 건지 마인과 그녀, 지나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일방적인 지나의 질문이 이어진 것이지만. 그래, 이렇게 보니 그 둘의 모습은 너무도 잘 어울렸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거지.
리안은 결국 호화롭게 차려진 음식들도 제대로 맛 보지 못한 채, 멍하니 황족들의 질문도 대충 넘기며 시간을 때우다 방으로 돌아왔다.


마인은 그 모습을 계속 쳐다보다 잠시 후, 뒤따라갔다.




***



아까부터 계속 착잡하면서도 짜증나는 기분이 사라지질 않는다.


"왜 이러지...?"



리안은 혼자서 중얼거리며 복도를 지나쳤다. 식사 때 제대로 먹지도 않고 일어난 것은 예의엔 어긋났으나 더 이상 그 자리에 있다간 정말로 기절할 것 같았기에 빠르게 일어났다.


자신이 이곳에서 유일하게 믿을 사람은 카인, 그리고 메리나 밖에 없다. 이곳에 온 지 며칠만에 그들을 제외한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외면을 당했던가. 리안은 뻐근한 목을 한 번 돌렸다.


마인. 리안의 어릴 적 친구. 그러나 지금 마인은 리안을 경멸한다. 그 사실이 리안을 더 지치게 만들었다.




고개를 옆으로 흔들어 마인 생각을 안 하려 애쓰던 리안은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려 했다. 발을 한 걸음 내딛은 순간, 갑자기 느껴진 인기척에 리안이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



-탁



그 누군가가 리안의 등을 밀쳤다. 그와 동시에 리안은 균형을 잃었다. 계단은 홀에서 방으로 내려가는 길인 만큼 매우 높았다. 여기서 떨어져 머리를 부딪힌다면, 죽을 수도 있겠지. 어디가 부러지는 것은 당연한 말. 그때 콘들의 말이 생각났다. 누군가 자신을 죽이려 할 지도 모른다는 것. 그러나 리안의 머릿속엔 그 범인의 얼굴을 보겠다는 생각보단,



'그냥 죽는 게 나으려나-'



몸이 기울어지는 순간에, 리안은 그런 생각을 했다. 차라리 감금 되있었을 때가 더 편했을지도. 이곳에 와서부턴 직접적인 경멸과 분노를 마주하는 것의 연속이었다. 그럼 그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죽는 게 낫지 않을까.



리안은 눈을 감고 그대로 허물어지는 몸에 모든 것을 맡겼다. 그리고 곧 몰려올 고통을 예상했다.



"다시 한 번 말하겠지만-..... 누가 죽으래?"



그러나 고통은 커녕, 리안의 몸은 어떤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것에 포옥 안겼다. 리안이 슬그머니 눈을 뜨고 바라본 그 익숙한 목소리의 상대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마인이었다.

마인은 미간을 찌푸리곤 제 품에 안겨 있는 리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한 마디로 리안을 따라가던 중, 리안이 갑자기 넘어지려는 것을 보았고 바로 뛰어가 잡은 것이다. 그 과정 중에서 마인은 보았다. 체념한 듯 눈을 감고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던 태연한 리안의 얼굴을.



이 얼굴을 몇 번이나 보았던가. 이 체념한 듯한 쓸쓸한 얼굴을.



"마, 마...아니...황태자 저하?"



리안은 그 상태로 몇 초가 지난 후에야 상황 파악을 하곤 말을 더듬으며 그를 올려다 보았다.



"왜 네 멋대로 죽으려 하는 거지? 내 명령을 그때 듣지 못한 건 아닐 테고."



리안이 그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갑자기 떠나버릴 것 같다.



"넌 내 분풀이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고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럴 때마다 마음 한켠이 불안하다.



마인은 리안을 꽉 안은 채, 그대로 몰아붙였다. 그의 힘에 리안의 몸이 조이며, 리안은 미간을 구겼다.



"아, 아픕니다. 내려 주세요."



마인은 그제야 리안이 자신의 힘 때문에 아파한 것을 알고 팔에 힘을 풀었다. 바닥에 발이 닫자 리안은 잠시 휘청거렸으나 이번엔 다시 균형을 잡았다.


마인은 속으로 자신을 비웃었다. 고작 이정도로 아파하는 리안의 모습을 보는 것도 싫다, 고 느끼는데 화풀이는 무슨. 왜 그렇게 느끼는 지는 모른다. 언제부터 이렇게 느끼게 된 건지도 모른다. 다만,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게 이젠 싫다- 는 것을 안다.



"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안은 그제야 머쓱한 표정으로 마인을 바라보았다. 마인은 그 순간 손을 뻗어 리안의 머리카락 가까이 가져갔다. 리안은 그가 손을 뻗은 대로 가만히 있었다. 마음대로 죽으려 했다고 때리는 건가....? 리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마인은 때리지도,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다만 어떤 그림자가 리안의 정수리에 머물다가 사라졌을 뿐이었다.



"됐다. 다음부턴 네 몸은 네가 챙겨."


"아, 예..."



여전히 이 상황에 대해 멍한 리안을 냅둔 채, 마인은 발걸음을 서둘러 사라졌다.



"뭐지...?"



리안이 어깨를 으쓱하면서도 자신을 구해준 마인의 품을 기억하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 동안, 마인은 달아오른 귀를 진정시키며 성큼성큼 복도를 지나쳤다.



'미쳤다. 이건 말도 안되는 일이다.'



마인은 입술을 꾹 물었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마인은 그 순간, 그 자리에 멈추어서 아까 뻗었던 손을 펼쳐 보았다.



"하, 내가 그 녀석을 쓰다듬어주려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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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1-01 00:10 | 조회 : 3,923 목록
작가의 말
렌테

이제 점점 내용이 진행이 되는 느낌이네여 히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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