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눈(5)-만남

가장 최근의 기억이 끝나고 비디오가 감기듯 되돌아가 인간의 기준으로 치자면 아득할 정도로 오래 전의 기억들이 재생됐다.

귀찮은 표정으로 걷는, 하늘과 처음 만났을 때 처럼 어린 저의 모습.

하지만 관찰자 시점에서 보던 방금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과거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에 카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그는 아무 것도 없는 곳, 무의 공간에서 의식을 잃었다.




“사랑해! 카르!”

내 이름은 카르 덴 파이텔. 난 수컷이지만 제2-214차원의 생명체중 가장 아름다운 드래곤으로 뽑혔다. 젠장.

“난 게이가 아니다.”
“상관 없어! 나도.. 나도 게이가 아니었어!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너도..”
“닥쳐.”
“카, 카르!!”
“흥! 비켜. 더러운 수컷들이!”

뭐야 저 암컷은? 눈은 왜 저렇게 반짝거려? 부담스럽게. 저 모은 손은 뭐야? 여기서 기도하려는 거야?

“아아, 아름다운 카르 덴 파이텔. 저는 성스러운 빛의 일족의 드래곤, 라희노 하이펠입니다. 저 더러운 수컷들은 무시하시고 저와 함께 담소를 나누는 건 어떠신지요.”
“싫어.”
“아아!! 도도해!”
“짜증나는군…. [이동]”
매정하게 잘라내도 그것 마저 좋다며 달라 붓는 것들을 피해 흰 눈이 소복히 쌓인 마을로 왔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이번 달은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드래곤들이 고백하는 달이라는 것일까?

“멍청한 것들이. 귀찮게.”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 못한 것들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게 다행인 이유였다. 하지만 난 드래곤 역사에도 남을 만한 천재. 태어난 지 얼마 안돼서부터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고 성인식을 앞둔 지금은 성룡과도 맞먹을 정도다. 그 이점으로 저 멍청한 것들이 달라 붙으면 마법을 써서 달아나고는 했다.

“카르니이임!!”

얼마 안돼서 자기 부모님을 졸라서 나를 쫓아오곤 하지만 월등한 신체 능력으로 존재감을 지우면 되니까.

“카르…!”

젠장. 아까 그 수컷도 쫓아왔냐? 제길 수컷이라니! 수컷이라니!! 난 암컷이 아니라고!

푹 뽀드득 푹 뽀드득.

더 이상은 마을이라고 할 수 없겠는데? 너무 구서졌… 음? 집인가?

눈에 힘을 주자 순식간에 저 멀리 까지 시야가 넓어졌고 허름한 집이 보인다.

“이렇게 구석진 곳에 집이라… 집 주인이 사람을 썩 좋아하지 않는가? 뭐, 내 알 바는 아니지.”
걸음을 멈췄다.
분명 내 레어는 귀찮고 멍청한 것들이 가득 이겠지?

“흠. 이번 달은 저 곳에 있을까?”

뽀드득 푹 뽀드드득 푹

조금 더 걷자 집 주인이 오랫동안 집을 비운건지 제설작업을 하지 않아 문 중간까지 눈이 쌓여있는 집이 확연하게 가까워 졌다.

“젠장! 이 빌어먹을 눈! 저 귀찮은 놈들만 아니었으면 마법으로 녹여버리는 건데. 여기서 마법을 썼다간 귀찮고 멍청한 놈들이 쫓아오겠지…… 하. 짜증나네.”

제가 보기에도 탐스럽게 윤기 나는 머리칼을 한번 쓸고 멈췄던 걸음을 재촉했다. 마법을 쓰지 않더라도 저곳쯤은 금방인데.. 역시 짜증나는 것들.

똑똑
“이봐.”

안에 인간이 없지만 뭐, 형식적으로 노크 정도는 해주자고.

“들어간다 인간.”

끼기기기기기기기긱!

문의 사용 횟수가 적은가? 문이 꽤나 뻑뻑하군.

삐이걱-

역시나 바닥도 꽤나 낡았군.

“쯧”

생각보다 더 허름한 집이군. 흐음? 저건?

“호오… 실험 도구들과 마법 진? 이것들은 꽤나 희귀한 마법 재료들인데…… 집 주인은 평범한 인간이 아닌가 보군?”

무심코 책상을 더 훑어보는데 시선을 끄는 노트가 보인다.
이건 인간의 실험 일기인가?

기괴한 귀곡성을 내는 문과는 달리 많이 사용한 듯 많이 낡은 두꺼운 노트를 펼쳐보려는 찰나 또 다른 문 쪽에서 가느다란 숨소리가 들린다.

“뒷문 같은데.. 주인한테 인사나 할까?”

끼이익- 끼이익- 끼기기기기기기기기긱!

“아……”

흔한 갈색 머리. 곱게 감긴 눈. 추위에 질린 듯 살짝 푸른 입술. 그 입술에서 세어 나오는 가느다랗게 떨리는 숨과 하얀 김. 부드러우면서도 오뚝한 콧대. 빨간 코 끝과 붉게 상기된 볼. 그에 어울리게 창백하면서도 온기를 머금은 듯한 흰 피부.
쿵쿵쿵쿵쿵쿵!

남자임에도 어떡해 저렇게 아름답지? 겨우 인간 주제에 차디 차고 귀찮은 이 세상에 온가를 주고 의미를 주는 걸까?

이게 사랑에 빠진다는 건가?

가지고 싶다. 저 남자를. 저 인간을. 머리부터 발 끝까지 내 것으로 만들어 놓고 싶다.

나무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그. 그에게 다가가 내 피를 먹이고 주문을 외웠다.

“[…… 너는 이제부터 나의 가디언이 될 지니. 내 명령에 복종하라.]”

그의 고운 이마에 나의 가디언이라는 표식이 생겼다가 사라졌다. 이제 그는 나와 평생을 함께 할 것이다. 인간의 짧은 생명의 평생이 아닌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나와 함께.

너의 의사는 필요 없다. 이제부터 너는 내 것이기에.

"그래도 일단 유희를 좀 즐겨볼까?"

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아아, 짜릿하기도 하지.

"형. 형아. 그래, 이 모습으론 이런 느낌이 좋겠어."

바람으로 흐트러지는 갈색 머리칼을 쓸었다.

"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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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12-02 17:02 | 조회 : 3,487 목록
작가의 말
뚠뚜니

카르는 태생적 호모가 아니었지용. 우리 마성의 하늘이가 카르를 호모호모하게 만들었습니다. 자, 여러분 하늘이를 칭찬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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