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이유(4)

“어때, 조금 진정 됐어?”

그는 날 소파에 앉히고 냉수를 주며 말했다.
난 냉수를 받아 조금 들이켰다.

“…….”
“표정이 안 좋네. 조금 쉬고 있어.”

난 그 악몽이 너무 생생해서 한동안 멍하니 창 밖만 바라봤다.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는 일을 하필이면 지금 꿈으로 꾸다니, 예감이 좋지 않다. 곧 다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건지, 아니면 그저 내가 불안하기 때문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와 아줌마가 돌변할까 봐 두렵지만,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런 사람들로는 안 보이는걸.’

남은 냉수를 모두 들이켰다.
목구멍이 막힌 듯 너무 답답하다. 손도 저려오는 것 같다. 숨도 막혀오고 몸이 무거워지는 것 같다. 견딜 수가 없었다.
난 벌떡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대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가?”
“…….”

내가 나가려고 하니 이렇게 바로 쫓아오는 이유는 뭘까.
내가 도망가면 안되기 때문일까, 내가 걱정돼서 그러는 걸까.

“그냥 바람 쐬려는 거에요.”

난 문을 열고 천천히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그런데 그가 계속 따라오는게 아닌 가.

“왜 따라와요?”
“혼자 나갔다가 큰일 나면 어떡해?”
“…….”

난 그를 무시하고 점점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그러자 그도 내 뒤를 빠르게 쫓아 올라왔다.
난 그와 떨어지기 위해 언덕 위에 있는 한적한 공원까지 무작정 뛰어갔다.
공원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콜록콜록-”

숨이 차서 마른 기침이 계속 나왔다. 다리에 힘이 빠져 나는 바로 옆 벤치에 털썩 앉아 숨을 골랐다.

‘그 날의 실수를 또 다시 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할 수만 있다면 그 기억을 송두리째 없애버리고 싶다.
‘사실……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야. 그렇게 되면 정말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이연우! 야 이씨……!”

누군가가 뛰는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어느새 눈 앞에 그가 나타났다.

“후……달리기는 왜 이렇게 빨라…….”

그는 날 보며 말했다. 그도 뛰느라 숨이 찼는지 숨소리가 무척 컸다.
난 그의 눈을 피했다. 도저히 저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하기 싫으면 그냥 싫다고 말해. 아직 서명도 안 했잖아. 아무도 강요 안해.”

그는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는 혼잣말로 땀난다, 하며 셔츠 안에 바람이 들어오게 셔츠를 잡고 펄럭였다.

“어떻게 이 좋은 기회를 날려요? 다시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을 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제가 당신을 잡을 수 밖에 없게 만들어서 후에 날 어떻게 할지 누가 알겠어요.
혼자서 해결도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도 싫고……그래서…….”

나는 어렵게 그동안 속으로만 생각해왔던 걸 말해버렸다.
그는 내 말을 끝까지 듣더니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것 때문에 이렇게 뛴 거야?”
“그건……아까…….”

말을 삼켰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했다.

“사실 네가 그렇게 생각할 거라곤 알고 있었어. 분명 그때 내게 ‘또 무엇을 바라고 내게 잘해주느냐.’라고 말했었지.
그런데도 날 따라 왔단 말이야. 내가 뒤통수 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그때 선택지는 아마 두개였을 거야.
내 제안을 거절하고 그 생활을 다시 하던가, 날 믿고 따라오는 도박을 하던가…….”

그는 내 눈치를 살피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그것보다야 잠시라도 편안하게 있는게 나을 거라는 생각에 날 따라왔겠지. 맞아?”

난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도 틀림이 없다.
내가 그렇게 생각할 걸 알면서도 함께 살자고 한 건가.
정말 기분이 나빴을 텐데…….
순간 눈물이 나왔다. 미안한 마음에 눈물을 흘린 건지, 다 들켰다는 생각에 흘린 건지 알 수는 없었다.

“……그래서 왜 말도 없이 밖으로 나온 건지 말 안해줄 거야?”

그는 바지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난 무언가에 홀린 듯, 그에게 차 안에서 꿨던 악몽에 대해 말했다.


“부모님을 잃자, 아버지와 친한 친구였던 사람이 찾아와서 앞으로는 절 돌봐 주겠다고 했는데…….”

행복했었다. 좋은 부모님 곁에서 남부럽지 않은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하지만 내가 15살 때,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도 아빠를 잃은 슬픔에 2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부모님의 남은 친인척은 내게 등을 돌렸고 학교에서도 부모님이 없다고 따돌림을 당했다.
난 눈물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제게 정말 따뜻하게 잘 대해 줬어요.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이 분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할 때쯤, 그 사람이……. 그래도 난 그 사람밖에 없었으니까……그마저도 없으면…….”

또 눈물이 핑 돈다. 가슴이 아파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난 왜 이 사람한테 그 이야기를 꺼내고 있을까…….
제발 이런 나에게 또 아픔을 주지 말라고? 이번만은 내가 믿을 수 있게 해달라고?
너도 그 놈처럼 내게 그럴 거냐고…….

“그래서……그 때 일을 꿈으로 꾸니까…….”

갑자기 눈 앞이 어두워졌다. 포근함이 느껴졌다. 그가 아무 말 없이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내 등을 토닥여줬다. 그도 손이 떨리고 있었다.

“흑…….”

나는 그의 가슴팍에 묻혀 소리없이 울었다. 울고 또 울고, 멈출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내색하지 않고 내가 멈출 때까지 계속 나를 안아줬다.
이렇게도 따뜻한 품은 정말 오랜만이라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 날의 기억 때문에 불안하기도 하지만, 왠지 모르게 엄마, 아빠가 생각나서 한편으로는 의지하고 싶어진다.

……몇 분이 지났을까, 울음은 조금 멈췄지만 그 품에서 떨어지고 싶지도 않았고, 어느 타이밍에 떨어져야 할 지도 몰라서 계속 가만히 있었다.

“다 울었어?”

그는 내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나는 빨갛게 부은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고개를 푹 숙였다.
조금 진정되니 창피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셔츠가 푹 젖었네.”

그의 말에 얼굴이 더 화끈거렸다.

“괜찮아, 언제든지 내게 기대도 돼.”

내가 옷소매로 눈물을 닦자, 그는 또 손수건을 꺼내 내게 건넸다.
항상 이런걸 챙기고 다니는 건가…….

‘그 애가 생각나는 걸.’


“연우야, 난 다소 오래 걸리더라도 네가 나에게 의지했으면 좋겠어.”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날 못 믿는 것도 있고, 피해주는 것도 싫어해서 그런 거지? 괜찮아, 다들 누군가에게는 의지하고 살아.”

이런 그를 아직도 의심해야하는 걸까……?

“기댈 곳이 없는 건 정말 슬픈 일이잖아. 그리고 나도 또래 친구가 없어서 외롭단 말이야.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되면 좋을 텐데…….”

그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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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07-21 23:19 | 조회 : 3,942 목록
작가의 말
로렐라이

다음화는 민운의 시점으로 나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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