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투쟁과 평화 (5)

"네?"
"그 공녀한테 한 번 귀띔이라도 해보라고."
"...아니, 어떻게 공녀님께 그런 부탁을 합니까?"
"지금 네가 살려면 이런 방법 밖에 없어. 지금 시민들은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 받지 않고 억울한 시민들이 처벌 받는 것 때문에 시위를 일으키고 있어. 왕실은 시위 때문에 지금 골머리를 앓고 있을 거야. 근데 너처럼 누가 봐도 범죄를 저지른 귀족이 나온다? 심지어 직위도 낮은 귀족에 서자네? 왕실은 시위를 잠재우려고 널 희생 시킬 거야."
"..."

그는 팔짱을 끼고 발을 톡톡 굴렀다.

"그런데... 프뢸리히 가문이라면 왕실에서도 뭐라 못하는 아주 큰 가문이거든. 가문의 힘만 따지면 왕실 보다 더 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렇죠..."
"근데 프뢸리히 가문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인 에밀리아 프뢸리히 공녀라면, 만약 공녀가 네가 처벌 받는 걸 원치 않을 경우, 네가 처벌 받는 걸 왕실에서도 진행 시킬 수 없을 거야."
"..."
"어때? 공녀를 꼬셔서 처벌을 피할래, 아니면 왕실의 희생양으로 전락해 충성스러운 왕국의 노예가 될래?"

할 말 따윈 없었다. 이딴 왕국의 노예가 될 바엔 공녀를 어떻게든 꼬셔서 처벌을 피해야만 했다. 그게 내가 살 길이고, 그게 내 최선의 선택이었다.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이런 일의 담보가 나의 목숨이다. 돈이나 명예, 직위도 아닌 목숨. 나한테 선택권은 없었다.

*

"프뢸리히 공녀님? 여긴 어쩐 일로..?"
"아... 롤랜드. 얘기는 들었어."
"...들으셨어요?"
"응."

잠시 침묵이 돌았다. 그녀는 부채로 탁자를 탁탁 두드리며 옆자리에 앉으라는 듯한 제스쳐를 취했다. 조금 머뭇거려지긴 했지만 공녀 옆에 걸터 앉았다.

"뭘 그렇게 불편히 앉아? 편하게 앉아."
"제가 어찌 공녀님을 옆에 두고 편히 앉겠습니까."
"에이~ 넌 괜찮아. 내가 말했잖아. 난 내 사람한테만 이래."
"제가... 공녀님의 사람이 된 건가요?"
"그치!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나 봐? 이렇게 똑똑할 줄이야."
"화, 황송합니다."

분명 공녀를 만난 건 처음이 아니다. 벌써 대 여섯 번은 되었지 않는가.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공녀와 이러한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게 조금 수치스러웠다. 공녀에겐 멋진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이렇게 격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공녀는 피식 웃으며 내게 종이 한 장을 건넸다.

"이게 무슨..."
"너에 대한 건 이미 다 처리 해 놨어. 그러니까... 걱정 마."
"..."
"어때? 좀 감동 받았나?"
"...예...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도 앞으로는 좀 조심하도록 해.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다 처리해 줄 수 있는 건 아니거든."

공녀는 흘러내린 내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며 말했다. 나에게 이렇게 어려웠던 일이 공녀에겐 식은 죽 먹기라는 사실이 너무 부질 없다고 느껴졌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참...

가늠할 수가 없다.

"아,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 아, 뭐든 물어보세요."
"지금 바그너 남작이 앨런 바그너 맞나?"
"아, 네. 맞습니다."
"그리고 전 남작이 하야디 바그너 맞지?"
"...예."
"그래, 알겠네. 고마워. 언제 한 번 식사라도 대접하지."

공녀는 내 볼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아닙니다. 저번에 공녀님이 대접하셨으니 이번엔 제 쪽에서 대접하죠."
"됐어, 넌 따로 줄 게 있잖아?"

공녀는 피식 미소 지으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갔다. 줄 거라...

"뭐... 원하시는 거야... 언제나 똑같으니까, 준비하기엔 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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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3-02-24 13:31 | 조회 : 302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