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비밀 4화

비밀 4화

몇 시간 전 까지만 해도 창관의 남창으로 살아가게 될까 두려워했던 노예 소년은, 자신을 구원해준 아주 잘생긴 흑발의 귀공자의 제안에 환하게 웃으며 기뻐했다. 귀공자의 제안을 아주 당연하다시피 수락한 지금, 그 노예 소년은 동쪽에 있는 네르시안 공작가를 향해 가고 있다.

* * *

네르시안 공작가로 가는 마차 안, 검은 머리의 소년 둘이 어색하게 마주보며 앉아있었다. 노예 소년은 어느새 아까의 열기가 식은 채 고요한 눈으로 눈 앞의 다른 검은 머리 소년을 바라봤다.

'..노예보단 확실히 매 맞는 아이가 낫겠지..'

저 아름다운 분도 볼 수 있을 터니, 나는 괜찮을 거야.

허나 노예 소년은 자신의 처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매 맞는 아이로 간다한들 그 긍지 높은 공작가의 사용인들과 가신들에게 충분히 학대받을 수 있었고, 설령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잘생긴 귀공자가 절 보호해준다 해도 공작부부가 자신을 쫒아내려하면 그 귀공자는 자신을 보호해줄수 없다는걸 그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노예로 사는 것 보단 매 맞는 평민 아이가 나았다.

*

시간이 흘러 해가 지고 저녁이 되었다. 노예 소년과 귀족 도련님이 탄 마차는 제국의 동부지역과 중심부의 경계지역에 위치한 필리스 산맥 부근에 야영을 하기 시작했다. 

기사들이 둘로 나뉘어 주변에 위협이 될 만한 것이 있는지 둘러보거나 고른 땅에 천막을 치기 시작했다. 하인들은 기사들과 주인을 위해 불을 피우고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름 모를 노예 소년과 귀족 도련님, 그리고 도련님의 호위기사인 에릭 경만이 마차안에 가만히 앉아 무료하게 시간을 떼우고 있었다.

읽을만한 책도, 입가심을 할 사탕도 모두 지금 당장 꺼내기엔 애매한 시간이라 아르테온은 억지로 무료함을 죽이며 창 밖으로 보이는 드넓은 평원의 모습에 집중했다.

늦은 오후임에도 주변에 환하게 켜져있는 횃불과 마차 안의 주홍빛 전등에, 창 밖을 보고 있는 아르테온의 단단한 콧날과 유려한 턱선이 붉그스름하게 빛났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풍경에 집중하는 청록색 눈동자가 노랗고, 붉게 물들여져 반짝였다. 명화에서조차 보지 못할 미남 중의 미남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노예 소년은 문득 자신의 눈동자 색이 궁금해졌다.

저 도련님의 고귀한 눈동자처럼 고고한 빛을 띌까, 아님 그냥 평범하게 생겼을까.
물어볼 방도가 없어 소년은 그저 계속해서 아르테온의 그린듯한 옆 모습을 홀린듯 바라볼수 밖에 없었다.

더 이상 귀족 도련님에게 홀려서는 안됬지만, 불가항력이었다.

 *

시간은 흘러 아르테온과 에릭, 그리고 노예 소년은 저녁 식사를 끝마치고 잠자리에 들어설 준비를 했다. 귀하디 귀한 공작가의 도련님인지라 아르테온은 기사들이 불침번을 서며 호위하는 거대한 마차 안에서 혼자 조립식 침대를 깔고 자야했지만, 아까부터 계속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노예 소년이 걱정스러워 기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년과 함께 마차 안에 침낭을 깔았다.

마차의 앞쪽과 뒤쪽에 달려있는 넓고 푹신한 소파를 각각 앞뒤로 나오게 조립해 평평한 공간을 만들고 침낭에 파묻힌 노예 소년은 기사들이 걱정한 것이 우스울 정도로 아무 일이 없어 보였다. 그저 아르테온만이 노예 소년에게 말을 걸고 싶어 안달을 내고 있었다. 그래봤자 노예 소년은 벙어리임에도.

"..그러고보니 네 이름을 모르는구나"

어떻게든 대화를 나누고 싶단 의지가 느껴졌다.

"….."

"그, 어..알려줄수 있니?"

그의 말에 노예 소년이 눈을 깜빡였다.

생각해보니 소년은 자신의 눈동자 색 뿐만이 아니라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허나 그것도 그거지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소년은 그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아..! 그, 너는, 그… 말을 못하였지"

아르테온이 당화하며 미안하단듯이 말하였다.

'전혀 미안할 필요가 없는데도.'

노예 소년은 아르테온이 자신을 배려하려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차에 탈 때도 도와주었고, 소년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해할까봐 마차 안에서 같이 자겠다고도 해주었다. 게다가 그는 소년을 창관에서 구해준 은인이었다. 그런 사소한 걸로 미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소년은 천장을 보고 있던 고개를 돌려 아르테온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부드럽고 아주 약간의 곱슬기가 있는 까만 머리카락이 소년의 단단한 갈빛 어깨선을 가리고 흘러내렸다. 얼굴 쪽으로도 몇가닥 흘러내려 까만 흑옥의 눈을 아른거려 보이게 만들었다.

달빛에 비쳐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년의 자태에 아르테온은 소년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멍하니 소년을 바라보고 있을 때, 소년이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무슨 뜻이지?

아르테온은 한참 동안 뜻을 떠올리지 못하고 멍을 때리고 있다가 소년의 묘해지는 표정을 보곤 정신을 차렸다.

"..아..! 아! 그래! 괜찮다는 뜻이지"

혼잣말인지, 아니면 묻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그 고민은 이어지는 말에 뚝 끊겨버렸다.

"미안하다, 내가 잠시 멍을 때렸구나. 그.. 순간 네가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여서"

어느새 다시 고개를 천장으로 돌린 노예 소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멍을 때려? 내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혹, 도련님도 내게..

"아니다. 새,생각해 보니 너 때문은 아닌것 같구나..! 그..냥 못 들은 걸로 하고 이만 자자."

부끄러워서 하는 말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연애 쪽은 영 아닌 노예 소년은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 괜히 설레발을 쳤다고 후회했다.

물론 아르테온도 괜한 말을 했다며 부끄러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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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2-01-09 16:36 | 조회 : 1,630 목록
작가의 말
에스테로(aws40662)

5화는 5시쯤 연재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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