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허리까지 곧게 기른 은발머리에 새하얀 피부, 언제나 정갈한 옷차림에 우아한 말투까지 흠 잡을 데 하나 없는 남자. 우리 도련님이다.

도련님은 실수하는 일 하나 없이 철저하고 꼼꼼한 분이시지만 사용인들에게는 관대했다. 그분은 보기보다도 훨씬 더 상냥하신 분이었다.
도련님께서 옅은 미소를 띄우고 바라봐 주시는 날이면, 나는 왠지 모를 흥분을 느끼고는 했다.

그러나 나는 한낱 하인으로 도련님께는 감히 말도 붙일 수 없었다. 그는 고귀한 신분에다가 나의 고용주이므로, 미천한 나로써는 다가갈 수 조차 없는 것이다.

높디 높은 위치의 도련님. 그런 그를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던 나. 고요하기만 했던 우리 둘의 사이가 뒤틀리기 시작한 것은 어느 가을밤이었다.


"도련님께 가져다 드려라."

몇 가지 알약을 건네는 집사는 퉁명스럽기 짝이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담당 시종이 챙겨야 했을 약이었다. 며칠 전 말의 뒷발에 치여 큰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그렇다해도 내가 맡아야 할 일은 아니었다. 도련님이 거주하시는 이 별관에서 일하는 시종은 하나가 아니기에. 물론 다른 저택에 비하면 사용인의 수가 현저히 적긴 했다.

"...그래도 이건 조금 심하지 않나?"

나는 도련님 방으로 통하는 복도를 지나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주 절묘한 우연의 일치로 약을 챙겨 드릴 사람이 나 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별세, 건강 악화, 결혼 등 가지각색의 이유로 많은 사용인들이 휴가를 내거나 퇴직했다. 덕분에 나는 최고참 하인이 되어있었다.
보통 높으신 나으리들이라면 새로 사람을 고용하겠지만 우리 도련님은 참 별난 분이셨다. 나 같은 하인 하나를 믿고 약을 전달받겠다니.

...

똑똑. 문을 두드리자 낮은 음성이 문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들어와, 몇 번 들어본 적 없는 그 목소리는 분명히 도련님의 것이었다. 미친듯이 날뛰는 심장을 겨우 부여잡은 채로 나는 문을 열었다.

"약을 가져왔습니다."

도련님은 살짝 찡그린 얼굴로 약을 삼키셨다. 고운 얼굴에 주름이 졌지만 그건 그것대로 아름다운 머습이었다. 예쁜 사람은 어떤 표정을 지어도 참 예쁘구나.

"...너. 이름이 뭐지?"

도련님의 말에 그만 들고 있던 쟁반을 놓칠 뻔했다. 도련님께서 내 생각을 알아차리신 건 아니겠지? 감히 모셔야 할 상전께 그런 불경한 마음을 품다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다행이도 그는 내게 친절했다. 그저 오늘 밤 자신의 방에 오기를 명했을 뿐. 오늘 도련님께서 잠자는 동안 벽난벽의 불을 지키거나, 아픈 도련님을 간호할 사람이 바로 나인 모양이었다.

...

똑똑. 아까 낮처럼 문을 두드리자 들어오라는 말이 들려왔다. 캄캄한 밤이라 그런 지 조금 더 오묘한 느낌이었다. 유난히 어두운 날, 달이 참 밝았던 어제와 달리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불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끼이익, 열리는 문 소리까지도 음산했고.

그 와중에도 도련님은 여전히 아름다우셨다. 평소와 달리 살짝 흐트러진 옷매무새가 눈에 들어왔다. 침대에 앉아계시는 모습이 아까와 다를 바 없건만, 가슴이 더 쿵쿵 뛰었다.

"편하게 있어."

네에, 그 말에 웅얼거리듯 대답하고는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여전히 도련님을 흘낏흘낏 훔쳐보면서.
그의 윗단추 세 개가 풀려 있어서 가슴팍이 보였다. 나는 괜히 얼굴이 홧홧해지는 느낌을 애써 모른 척 했다. 하지만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저어, 춥지 않으세요? 단추를 다 잠구시는 것이 낫겠어요."

도련님은 머뭇거리다가 내 손을 가슴팍으로 이끌었다. 그의 미지근한 체온이 손에 닿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심장이 밖으로 뛰쳐나올 듯 쿵쿵 소리를 냈다. 이러다 도련님께 들키는 것은 아닐까?

"네가 잠궈줘."
"네? 자,잘못 들었습니다."
"단추 잠궈달라고."

그는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나는 떨리는 손을 천천히 그의 딘추 쪽으로 옮겨갔다. 손 끝에 그의 맨살이 스쳤다.

"...아니면 다 풀어버리던가."

도련님은 내 귓가에 조곤조곤 속삭이며, 다시 나의 손을 잡아채셨다. 그리고는 자신의 배에 가져다대며 내 손으로 그의 옷을 벗기라 명하셨다.
너를 볼 때마다 자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거든...그의 목소리에 정신를 차릴 수가 없었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인가? 내가 망설이자, 그는 웃으며 덧붙였다.

"너도 알잖아, 이 층에는 우리 둘 밖에 없어. 내일 아침까지도."

툭. 유혹하듯 달콤하게 들려오는 그의 말에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나는 언제 망설였다는 듯 그의 옷을 완전히 벗겨버렸다. 구겨진 그의 허물이 바닥에 나동그라젔다.

내 손이 도련님의 뺨에 닿았다. 그리고 목, 가슴, 배를 지나 허벅지까지 스쳐지나갔다. 거친 손이 잠시 지나갔을 뿐인데, 뭐가 그렇게 자극적이었는지 도련님이 얕은 신음을 흘렸다.
그것은 매우 흥분되는 일이었다.

여전히 허벅지를 쓰다듬으면서, 나머지 한 손은 그의 유두에 갖다대었다. 선홍색의 그것을 꼬집자 기다렸다는 듯 신음이 튀어나왔다.
먼저 유혹한 사람답지 않게 도련님은 무척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아래가 뜨거워지는 느낌에, 서둘러 그의 애널에 손가락 두 개를 집어넣었다. 외벽을 살살 긁었다가 손가락을 벌려 그것을 자극했다.

"으읏, 흐...하아..."

도련님은 어떠한 말도 못하고 연이어 신음만 내뱉었다. 나는 손가락을 하나 더 늘려 그의 아래를 자극해나갔다.
거칠게 손가락을 박아댈 수록 그의 허릿짓도 격해졌다.

그가 사정을 하며 내게 애원했지만 택도 없었다. 그런 모습은 오히려 나의 가학심만 더 불태웠으니.

"도련님께서 먼저 시작하셨잖아요. 도련님께서..."

누가보아도 불경한 모습이었지만, 한껏 흥분한 내게 양심의 가책은 없었다. 또한 어떠한 불안도.

그는 눈물 맺힌 얼굴로 나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정액으로 더럽혀진 침대 시트와 밤꽃 향기와 일렁이는 촛불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게 느껴졌다.

도련님은 다리를 벌린 채 내 손길에 몸을 맞길 뿐이었다. 나는 내일 어떻게 될 지에 대해서는 외면하기로 했다. 그보다는 다시 올 수 없을 지도 모르는 이 상황을 즐겨야지.

...

"...좋았다고."

네? 당황스러움에 눈만 깜빡였다. 크게 화를 내며 쫓겨날 줄만 알았는데, 오히려 도련님의 총애를 받아버렸다.

"그보다는 여기저기 아프니까, 주물러줘. 약도 발라주고."
그의 차분한 투정에 나는 순응할 수 밖에 없었다. 밤시간 동안 내가 그를 강제했던 것처럼, 낮에는 그가 나를 강제하는 셈이었다.

나는 도련님의 허리를 정성스레 주물렀다. 기분이 묘했다. 엎드려 있는 도련님의 모습과 희미한 신음이 어제의 광경과 곂쳐 보였다.
그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도련님께서는 웃음을 흘렸다.

"조금만 더 기다려. 곧 밤이 찾아올 테고, 너는 또 내 시중을 들어야 하니."

싫어도 어쩔 수 없어. 그의 불안 섞인 말에는 나 역시 피식 웃어버렸다. 싫기는요, 어쩐지 고귀하신 도련님이 귀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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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9-12 17:02 | 조회 : 9,462 목록
작가의 말
타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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