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처음

먀아-옭
먀아 옭-

현의 회상을 깬 건 다름아닌 고양이였다.

'아, 마리 밥 줘야하는데.'

밥그릇에 도로록 사료들을 부어주고 나니 제 주인은 안중에도 없고 사료 그릇에 고개를 박고 먹기 바쁘다.

"이러니까 돼냥이가 되는 거야..."

잘 먹는 마리를 보며 괜히 혼자서 중얼거리던 현은 우연히 베란다 구석의 화분 하나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니, 물론 눈은 없긴 한데 괜스레 자기를 쨰려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도 그럴것이, 출장을 꽤나 오래갔다와서 물 주는 걸 까먹어버렸던 것이다.
가만히 보니 바싹 말라서 시들시들한 게 영 아니어보였다.

"이러다 죽게 생겼는데? 빨리 물 줘야겠네."

현은 앓는 소리를 내면서 힘든 몸뚱아리를 일으켜 베란다로 향했다.

베란다에는 먼지도 쌓였고, 여기저기 곰팡이도 조금 있는 것 같았다.
이 화분은 현이 키우는 유일한 화분이었다.
현은 제 솜씨를 알아서 생물은 손을 대지 않는 편이었다.
마리도 원래 키우려던 애가 아니라 우연히 집 앞에서 보고 딱해서 밥을 챙겨주었다가 집에 눌러앉은 케이스였다.
그러니까 이 화분도 현이 가져온 건 아니었다.

현은 분무기로 물을 주다가 영 시원찮았는지 뚜껑을 돌돌 열어서 조금씩 넘치지 않게 부어주었다.
그러다 현은 이 화분의 출처를 떠올렸다.

"백한."

"맞아, 걔가 줬는데."

넘치지 않게 잘 따르던 물이 화분의 턱을 넘어 흐르고 밀려들어가 넘친다.
.
.
.

"아이고, 예예. 당연하죠. 아마 애들도 다 착하고 순해서 별 일 없을 겁니다."

"네, 저희 수현이 잘 좀 부탁드려요. 얘가 몸이 약해서.."

"아유, 어머님. 제가 책임지고 잘 돌볼 테니 걱정 마시고 가셔도 됩니다."

"예, 그럼 선생님 믿고 갈게요. 감사해요."

곧이어 드르륵- 문이 열리고 엄마가 나왔다.

"선생님들도 다 좋으신 분이고, 여기 애들도 착하대. 너는 아무 생각말고 몸이나 챙겨. 알았지, 아들?"

"알았어. 엄마도 가봐."

"어머, 얘도 까칠하기는. 엄마 갈테니까 연락 좀 잘하고. 종종 내려올게. 네 동생 시험기간 끝나면 더 자주 올테니까 좀만 참아. 삼촌하고도 잘 지낼 수 있지?"

"안 와도 되는데..뭐하러 귀찮게 여기까지 와. 내가 알아서 잘 지낼게."

"알았어. 알았으니까 네가 네 건강 챙겨. 엄마 간다~"

"...."

수현은 엄마의 웃음에 말 없이 손을 흔들어 작별했다.
곧 담임선생님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수현에게 말을 건넸다.

"네가 수현이구나. 반 애들이 호기심도 많고 눈치도 별로 없긴 한데, 다들 좋은 애들이다. 너라면 잘 지낼 것 같은데. 일단 갈까?"

선생님은 앞장서서 걸었고 수현은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아 참, 교과서는 네 책상 위에 올려놨어. 아마 네 짝꿍은 날라리라서 잘 등교 안 할거다. 혼자 편하게 책상 두 개 쓰라고 일부러 거기 뒀는데, 괜찮지?
여기는 시골이라서 전체 학생도 별로 안되는데, 듣자하니 요양차 온 거라면서."

선생님의 속사포같은 말에 약간 당황한 수현은 그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래그래, 여기가 공기 하나는 좋지. 그래도 공부는 열심히 해야한다."

"네."

그 답을 끝으로 대화는 끊겼고 어색한 공기가 복도를 가득 채웠다.
선생님은 맨 끝 교실로 걸어가셔서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문을 열고 헛기침을 했다.

"야야, 조용히들 하고. 종 쳤잖아, 종. 임마, 임현석이! 자리 앉아라."

그러더니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미시더니 수현을 불러들였다.

"어이, 들어와."

"네"

"야, 내가 이걸 오늘 해본다, 그치?"

선생님도 전학생을 소개할 마음에 약간은 들떠있었다.

"안녕, 내 이름은 한수현이야. 얼마 전에 전학 와서 여기는 잘 모르는데, 잘 부탁해."

호기심에 가득 찬 학생들은 거의 잡아먹을 기세로 한수현을 빤히 보기 시작했다.

"야, 애들아. 백한뭐시기 안 왔지?"

선생님은 심드렁하게 백한의 이름을 내뱉고는 수현에게 싱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구석자리를 가리켰다.
덕분에 수현은 뒷자리로 가는 내내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선생님이 조례로 안내사항 몇 가지를 불러 주시고는 나가자, 아이들은 쏜살같이 한수현에게 달려들었다.

뽀얗고 하얀 피부에 마른 체구. 또렷하게 올라간 눈매에 약간 커보이는 안경을 쓴 수현은 아이들에게 있어 관찰대상이었다.
갈색빛이 보이지 않는 새카만 머리카락은 마치 수현을 백설공주처럼 보이게 했다.
실제로도 수현은 고등학교 3학년 내내 별명이 백설왕자였다.

아이들은 떠오르는 질문들은 필터 하나 거치지 않고 수현에게 들이부어댔고,
수현은 조금 숨막히는 기분에 천천히 숨을 내쉬며 아이들의 호기심에 찬 질문들에 하나하나 답해주었다.

수현의 성격이 원체 까칠하긴 해도, 첫인상이 좋게 남아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여기서 얼마나 지낼지도 미지수여서, 수현은 일단 잘 지내고 봐야한다는 생각으로 질문세례를 떠맡았다.

백한이라는 짝꿍은 오지도 않아서 그나마 수업시간에는 좀 더 편하게 있을 수 있었다.

둘째 날, 셋째 날이 지나면서 호기심의 열기는 슬슬 내려갔고, 수현은 몇몇 아이들과 조금씩 대화를 섞으면서 있는 듯 없는 듯 지내기를 성공해냈다.

그리고 투명 짝꿍이 슬슬 궁금해지던 차에, 그 애가 등교했다.


.
.
.

아침 일찍 등교한 수현은 애정 어린 햇빛의 손길에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잠이 눈꺼풀을 무겁게 눌러버리자 수현은 아예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런 수현의 눈에 들어오던 햇살이 확- 가려지며 어두워진 주변에 눈을 뜨자, 눈 앞에 있는 건 자신의 햇살을 앗아간 백한이었다.

그래, 그 놈의 백한, 백한.

햇살 같은 웃음을 짓던 백한이었다.

또래보다 훌쩍 큰 키에 약간 구릿빛이 도는 피부. 적당히 올라간 콧대에 약간 도톰하고 길쭉한 입술까지.
눈은 수현과 같은 올라간 눈매긴 한데, 좀 더 찢어지고 끝이 뾰족해서 수현의 눈매가 동그래 보일 정도였다.
그럼에도 절대 작거나 매서워 보이지는 않았고 오히려 웃을 때는 서글서글하게 웃는 상이었다.

그린 듯한 얼굴에 조각한 듯한 몸매. 그렇게 완벽하게 생긴 사람을 수현은 처음 봤다.

"와...ㅈ나 잘생겼다."

"진짜, 친구야?"

싱글방글 웃으면서 훅 다가온 백한에게 시선을 빼앗긴 수현은 자신이 생각으로만 해야 했던 것을 내뱉었다는 걸 한참 뒤에 알았고
그걸 또 얼굴을 감상하느라 몰랐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서 볼을 약간 붉히고 말았다.
그걸 보던 백한은 싱긋 웃더니 말을 계속 걸어댔다.

"못 보던 얼굴인 거 보니까 전학 왔나 보네. 반가워. 난 백한인데, 넌?"

한 손으로 의자를 빼고 걸터 앉아 악수를 청하는 모습이 딱 봐도 친화력이 좋은 것 같았다.
수현은 백한이 능글 맞게 웃으면서 입을 털어대는 것이 약간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오늘 처음 본 사이 아닌가?

'교복도 제대로 안 입었네. 왜 선생님이 날라리라고 부르시는 지 알겠다.'

"난 한수현.잘 부탁해."

그거랑 상관없이 일단 인사는 하고 봤다.
혹시 모르잖아. 괴롭히면 어떡해.

그 뒤로 일주일간 백한은 꼬박꼬박 학교에 나와서는 수업시간이고 쉬는 시간이고 혼날 때 말고는 여러 가지를 꼬치꼬치 물었는데,
백한의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 때문인지 고양이처럼 경계하던 수현도 나중에는 말을 좀 편하게 할 수 있었다.

백한도 얼마 전 전학 온 애였고,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혼자 자취를 한다고 했다.
선생님이 날라리라고 부른 것과는 달리 올 때는 공부도 꽤 열심히 했고 수현이 백한을 처음 본 날 뒤로는 계속해서 말을 붙여댔는데
애들이 가끔 와서 말 거는 걸 보면 수현에게 보여준 사교성이 다른 애들에게도 똑같은 모양이었다.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좀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는데 특히 백한이 웃을 때면 진짜 홀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날 무렵에는 백한과 제일 친한 친구로 서로 집에 가끔 들락날락 하는 사이가 되었다.

마리의 울음에 문뜩 정신을 차린 수현은 마지막으로 생각해냈다.
이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처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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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2-03 10:52 | 조회 : 2,091 목록
작가의 말
소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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