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지 못할 약속

“이상하다. 아까 들어갔을 땐 아무도 없었던 거 같은데…”
우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주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기에 봄은 더 별거 아니라는 듯 응수했다.
“못 봤나 보지. 자 얼른 가자. 곧 다시 모여야 하는 시간이야.”
그리고 우진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그를 데려갔다. 그제야 영주도 발걸음을 떼며 봄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래. 얼른 가자.”
여전히 우진은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은 채 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대수롭지 않게 넘기듯 다른 말로 이야기는 흘러갔다.

그날 저녁을 먹고 난 뒤 산책 겸 아파트 단지 산책로를 걷는 두 사람이었다. 우진에게 거의 들킬 뻔한 이후로 어쩐지 하루종일 멍해 보이는 영주 때문에 봄은 그의 기분을 띄우려 애썼다.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사주려고 데려갔지만, 여전히 얼굴에 남은 근심은 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땅거미가 내려앉은 시간이 되었다.
“봄아.”
풀이라도 붙인 건지 도통 열리지 않던 그의 입술사이로 진지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그 목소리와 함께 마주한 얼굴은 여전히 근심이 가득했다.
“아까… 우진이랑 화장실 앞에서 마주쳤을 때 이후로 걔가 무슨 말 안 했어?”
“조금 이상하게 쳐다보긴 했는데… 별말 없었어.”
“그래?”
“그래. 그러니까 걱정 그만해도 된다니까? 언제까지 그렇게 침울해져 있을 거야. 아까 밥도 깨작깨작 먹고.”
봄은 장난스레 그의 볼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분위기를 풀어보려 한 가벼운 행동이었지만 오히려 영주는 곤란한 표정을 지은 채 다급히 그의 손을 잡아 내렸다. 누가 볼까 걱정되어 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조금 서운했다.
“우리… 조금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지금도 충분히 조심하고 있지 않아? 오늘 같은 경우는… 내가 좀 그러긴 했는데. 학교에선 스킨쉽 절대 안 했잖아.”
“만나는 것도 조금 조심해야 할 것 같아. 우진이가 뭔가 눈치챘을 수도 있으니까… 만약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학교에서 만나는 것도 좀 자제해야 할 것 같아. 지금은 우진이랑 현진이 둘 뿐만이더라도… 나중엔 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
걱정 근심이 많은 그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만나는 것도 자제하자니. 그 정도까지 해야 할까? 의구심은 계속 마음 한구석에 파고들어 우물을 만들었다. 봄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못내 서운한 티를 감추지 못하고 그에게서 몸을 돌려버렸다.
“… 봄아. 화났어?”
봄이 여전히 대답하고 있지 않자. 영주는 주변을 슬쩍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 침울한 그의 뒤를 꼭 껴안았다.
“미안해… 너 서운하게 하려고 그런 게 아니야. 들키면 우리 둘 다 힘들어지잖아. 그것 때문에 그런 거지.”
“…”
“많이 화났어?”
영주는 그를 달래듯 꼭 끌어안고서 양쪽으로 살살 흔들어보았다.
또 금방 풀이 죽은 듯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서운한 마음은 금방 풀어지는 듯했다. 자신을 껴안고 있는 그의 팔을 살짝 풀어내 그를 올려다보았다. 피하고 있던 얼굴을 마주하자 축 처져 있던 그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너랑 날 위해서 하는 말이야. 내 마음 알잖아.”
위로하듯 가벼운 키스가 뺨에 닿았다. 봄은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삼키곤 고개를 끄덕였다. 서운한 건 순간이겠거니. 그렇게 생각했다.

이후로 두 사람은 학교에서 마주하는 일이 거의 사라졌다. 집처럼 드나들던 서로의 과실에도 발길이 뚝 끊겼다. 한순간에 접점을 없애자 그것을 또 이상하게 보는 이들도 있었다.
현진은 노트에 글자를 끄적거리는 봄에게 말을 건넸다.
“너 영주 오빠랑 싸웠어?”
봄은 움직이던 펜끝을 멈추었다가 금방 다시 적어 내려가며 대답했다.
“아니? 왜?”
“아니- 요즘 영주 오빠도 여기 잘 안 오고. 너도 안 찾아가고. 둘이 맨날 같이 밥 먹으러 다니고 그러더니. 갑자기 너무 잠잠해지니까 물어보는 거지. 둘이 싸운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바쁘니까 그런 거지 뭐.”
“…정말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봄은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것은 맞지만… 싸운게 아니냐 의심을 할 정도로 너무 무심해진 것 같은 그의 태도 때문이었다. 가끔 복도를 걷다 마주쳐도 데면데면한 듯한 인사에 가끔 가슴이 쿡쿡 찔렸다. 하지만 이 서운함은 잠깐이고 둘이서만 볼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하루에 몇 번이나 온탕과 냉탕이 오고 갔다. 괜찮냐고 묻는 다면 완전히 괜찮다 말할 순 없었다. 풀렸던 서운함의 찌꺼기들이 조금씩 쌓이고 있었기에.

과실 창밖이 어두워진 지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밤 열 시가 넘어서고 현진과 봄은 과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노트북과 노트, 충전기, 필통 등으로 꽤 묵직한 백팩을 메고 찬찬히 건물 복도를 걸었다. 계속 앉아 있었더니 무릎관절이 뻐근했다.
“계속 앉아 있었더니 무릎이 시리다.”
양어깨를 빙글빙글 돌리며 현진에게 말하니, 그녀는 장난기 뭍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벌써 무릎 시리면 어떡하냐? 할아버지네. 할아버지.”
“넌 안 아파? 우리 거의 여덟 시간 넘게 앉아 있었는데.”
“난 시릴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너 관절 다 닳은 거 아니야?”
“그럴지도…”
진이 완전히 빠진 채 조금 비틀거리는 다리를 겨우겨우 내딛으니 건물 밖 통로에 도착했다. 일 층 갤러리의 밝은 흰색 조명과는 대비되는 밖은 조명의 그림자가 바닥에 내려앉아 있었다. 안이 비춰 보이는 유리문 너머로 어두운 실루엣이 흐릿하게 보였다.
“어? 영주 오빠다.”
유리문을 열고 나가니 건너편 건물에서 영주가 나오고 있었다. 여자 몇 명과 남자 몇 명이 섞인 무리였다. 영주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서 그에게 말을 건네는 여자를 보며 웃고 있었다. 현진은 반가운 듯 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봄은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스쳐가는 시선들 속에 그도 있었으나 하지만 이내 사라졌다. 보답 받지 못한 인사에 무안해진 현진은 손을 어색하게 내리며 말했다.
“뭐야…? 눈 마주쳤는데. 인사 씹었어!”
“그래?”
“그래! 아까 나랑 눈 마주쳤는데 그냥 씹고 가던데? 뭐야. 영주 오빠 갑자기 왜 저래?”
현진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채 작게 소리쳤다.
“그냥 못 본 거겠지.”
봄은 아무렇지 않은 듯 응수했다.
“아니야. 바로 딱! 나오자마자 눈이 마주쳤다니까?”
“어두워서 헷갈렸나 보지 뭐.”
봄은 유리문 앞에 있는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가며 말했다.

“…”
봄은 집에 도착한 뒤 침대에 매고 있던 가방을 던졌다. 묵직하게 떨어진 가방은 중심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풀썩하고 이불 안에 차 있던 공기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
바람빠지는 소리처럼 깊은 한숨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인사 정도는 그냥 할 수도 있잖아…”
침대에 아무렇게나 엎어진 가방처럼 봄도 침대에 몸을 던져 누웠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누워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 진동소리가 들렸다. 바지 뒷주머니에 꽂아둔 휴대폰 화면을 켜보니 문자가 와 있었다. 선명하게 영주의 이름이 떴다. 봄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리고 곧 휴대폰 화면을 신경질적으로 꺼버렸다.
잠들기 전까지 몇 번이나 더 진동소리가 들렸다. 열 두 시를 넘어가도 울려대는 휴대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봄은 어쩐지 휴대폰 전원을 켜지 않았다.
“김 봄. 너 바닥 청소 깨끗이 안 할래? 바닥 쓸라 했더니 입구 쪽만 계속 빗자루질 하고 있어. 입구 바닥 뚫으려고 그러니?”
“깨끗이 쓸고 있구만 엄마는…”
봄은 비죽거리며 입구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카운터에서 오늘 주문을 정리하는 엄마를 보았다.
“깨끗이 하기는. 거기만 10분 넘게 쓸고 있구만. 오늘 배달 주문 들어온 거 많아서 빨리 빨리 끝내야 한다고.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왜 이렇게 넋이 나갔니?”
“오늘 봄이가 피곤한가 보지 뭐. 봄아 빗자루 줘봐. 아빠가 쓸게 넌 피곤하면 좀 앉아 있어. 요즘도 과제 한다고 바쁘지?”
카운터 안쪽에서 이야기를 들은 것인지 아빠는 엄마의 어깨를 두들기며 봄에게 손을 내밀었다. 따스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아빠는 봄의 손에 쥔 빗자루를 가져갔다. 그런 아빠를 보는 엄마의 눈초리는 따가웠다. 아빠는 허허 털털한 웃음을 건넸다.

“엄마 단골 빵집 사장님. 위치 전에 가봐서 어딘지 알지? 조금 머니까 가게 앞에 꺼내놓은 자전거 타고 배달 다녀와.”
“예에.”
봄은 엄마가 건넨 꽃바구니를 한 손에 들고선 발걸음을 옮겼다.
“넋 놓다가 넘어지지 말고! 차 오는 지 잘 보고!”
“알겠어요~”
“대답만 하지 말고!”
“어유 참. 알겠어요.”
얼른 나가지 않으면 다시 쏟아질 잔소리게 봄은 도망치듯 가게를 빠져나왔다. 걸어가기에 조금 멀다 싶으면 타고 가던 빨간색 페인트 자전거가 놓여있었다. 어릴 적부터 집에 둔 물건이라 새빨간 페인트는 색이 바래서 붉은 갈색빛을 띠었다. 드문드문 벗겨진 페인트 아래로 녹슨 철이 드러나 있는, 시간의 때가 뭍은 자전거였다.
그런 시간에서 혼자 현재를 사는 듯한 핸들 앞 바구니에 작은 꽃바구니를 넣었다. 얼마 전 손재주 좋은 엄마가 새로 엮은 베이지색 바구니였다.
우울한 마음과는 반대로 화창한 햇살 아래 봄은 페달을 밟았다. 닳은 캔버스 아래로 끼익끼익 하는 소리가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들려왔다.

“안녕히 계세요~”
새로 개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빵집 문을 열고 나왔다. 들어갈 때에 비해 더 무거워진 양손 아래에는 갓 구운 빵들이 담겨 있었다. 정성이 가득 담긴 종이봉투를 다시 핸들 앞 바구니에 넣었다. 자전거 몇 바퀴 굴리니 조금 전보다 더 무거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빵집 아주머니의 친절한 목소리 덕분인지 머리위로 낀 구름이 조금 맑아졌다.
자전거는 무거웠지만 가벼워진 발로 페달을 다시 열심히 밟았다.

“다녀왔습니다~”
“봄아!”
가게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엄마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 들어왔다. 깜짝 놀라 양손 쥐고 있던 종이봉투를 떨어뜨릴 뻔했다.
“너 오늘 약속 있었으면 미리 말을 해야지. 조별 과제 있다면서?”
“…? 무슨 소리야? 나 오늘 조별…”
“어머니 이 물건은 여기다 두면 될까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느냐 말 다하기도 전에 카운터 안쪽 방에서 익숙한 얼굴이 나왔다.
“호호. 안 도와줘도 된다니까 그러네! 참.”
“괜찮아요. 어머님.”
영주였다.
형이 왜 거기서 나와…?
조금 전 놀란 것보다 더 벙진 채 봄은 그를 바라보았다. 영주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봄에게 말했다.
“봄아 이제 왔어? 오늘 조별과제 하기로 했잖아. 잊어버린 거야?”
“너는 어떻게 학교 다니는 애가 숙제를 깜빡하니? 얼른 앞치마 벗고 옷 깔끔하게 갈아입고 다녀와.”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영주는 엄마에게 아주 정중하게 인사한 뒤 봄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앞치마를 벗고 옷을 대충 갈아입은 뒤 내려오니 영주는 계단 옆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한 손을 앞주머니에 욱여넣은 채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영주는 피우던 담배를 아래로 내리며 돌아보았다.
“왔어?”
그리곤 얼마 피지도 않은 담배를 바닥에 던져 불씨를 꺼버렸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환하게 웃으며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흔들릴 뻔했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최대한 무뚝뚝한 표정을 유지한 채 계단 아래로 내려오니, 영주는 그 앞에 섰다.
“네가 갑자기 연락이 안 돼서 찾아왔잖아. 걱정했어. 휴대폰 고장 나기라도 했던 거야?”
“…아니.”
“그러면… 뭐 때문에 그런 거야.”
“…”
입을 꾹 다문 봄 앞에 영주의 입꼬리는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봄아. 무슨 말인지 얘기해야 내가 사과를 하든가 하지. 계속 그렇게 아무 말 안 하고 있을 거야?”
“…”
“지금 나랑 얘기하기 싫어?”
“형은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서 묻는 거야?”
“네가 말을 안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그냥 던진 말일 텐데. 건넨 말이 돌처럼 날아와 발밑에 쿵 떨어졌다. 순간 울컥한 마음에 그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알아? 어떻게 그걸 몰라. 형이 행동해 놓고는!”
금세 날카로워진 목소리에 영주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갑자기 소리치듯이 쏘아붙이니 놀란 듯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러니까 말을 해줘…! 내가 뭘 잘못한 건지!”
“모른 척 지나갔잖아!”
“뭐?”
“어제! 분명히 봐 놓고는 그냥 모른 척 가버렸잖아. 그냥 인사 정도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뭘 그렇게까지 해? 어제 현진이가 나보고 뭐라 했는지 알아? 형이랑 나랑 싸웠냐고 묻더라. 조심하는 거 아는데. 형이 걱정하는 게 뭔지 알아. 근데 그렇게까지 해야 했어? 그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알아?”
꾹 눌러 참았던 감정을 쏟아내니 눈물이 핑- 돌았다.
아. 울기 싫은데.
코끝이 찡하게 차오르는 눈물을 막으려 눈을 찌푸려보지만 역부족이었다. 발갛게 물이 드는 눈가 때문에 봄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참았던 눈물 한 방울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회색 아스팔트 바닥 위로 검은색 방울들이 생겨났다.
“…봄아.”
애절한 듯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 형 얼굴 보기 싫어.”
“봄아…”
“둘이 아직 안 갔어?”
때마침 아빠가 가게 유리문을 열고 나왔다. 배달을 가는지 손에는 조금 전보다 큰 꽃바구니가 들려있었다.
“아. 지금 가려고 했어요.”
손등으로 다급히 눈가를 닦고는 영주의 팔을 붙잡고 가게 뒤쪽으로 걸어갔다.

가게에서 한참이나 떨어지고 나서야 봄은 그의 팔을 놓았다. 던져놓듯이 놓은 팔이 허공에 힘없이 흔들리다 멈추었다.
“미안해.”
“말만 미안하지?”
갑작스러운 아빠의 등장에 눈물은 쏙 들어갔으나 여전히 불편한 건 마찬가지였다.
“아니야. 진짜 미안해. 네가 그렇게 상처받을 줄은 몰랐어.”
“…미안하면 미안할 짓을 하지 말아야지.”
“미안… 한 대 때릴래? 그럼 네가 기분이 좀 나아지겠어?”
“…”
“때려. 화 풀릴 때까지 때려. 미안…”
영주는 정말로 때리라는 듯 봄 앞에 서서 자기 왼팔을 내밀었다. 앞에서 알짱거리는 게 짜증 나서 봄은 주먹으로 퍽퍽 그의 어깨를 때렸다. 세게 때릴 생각은 없었는데 생각보다 감정이 많이 실린 것인지 몇 대 얻어맞자 영주는 악 소리를 내었다.
“봄아 진짜 많이 화났구나… 정말 아프네…”
“그래. 저기 시냇물에 그냥 던져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워. 짜증 나.”
봄은 보도 옆에 흐르는 시냇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바닥에 누울까…? 그럼 기분 풀릴 거 같아…?”
시무륵한 얼굴로 영주는 말했다. 봄이 대답이 없자 영주는 정말로 시냇물에 가서 드러누울 것인지 시냇가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당황한 봄은 그의 뒤를 따라갔다. 신발까지 벗어 던지는 그를 겨우 말렸다.
실랑이 끝에 영주는 얌전히 다시 신발을 주워 신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푹 나왔다.
“…미안해.”
“됐어.”
“…잘못했어. 앞으로는 안 그럴게.”
“…앞으로 미안하다고 말할 짓 하지 마.”
“…응.”
“….”
“…”
“약속.”
봄은 새끼손가락만 피고 그에게 내밀었다. 축 처져 있던 영주는 다급하게 그 손가락을 걸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화가 머리까지 치솟고 눈물이 나고 그랬는데. 또 이상하게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약속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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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4-05 22:44 | 조회 : 588 목록
작가의 말
최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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