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줄거야

청량한 푸른 하늘, 여름의 끝물이었다. 디자인 대학 건물 앞에는 사람들이 총총히 모여있었다. 친한 무리로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 수다스러운 목소리들은 활기가 넘쳤다. 2학기가 되고 나서 과대가 된 봄은 학생 수를 꼼꼼히 세고 있었다. 그 옆엔 자연스레 영주가 있었다.
“1학년 다 왔어.”
봄은 옆에 서 있던 2학년 과 대표 영주에게 말했다. 영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교수님 오시면 그때 출발하면 되겠다.”
“전시관까지는 버스 타고 가면 얼마 정도 걸릴까?”
“한 삼십 분 조금 넘을 거 같아.”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겠네.”
“응.”
덤덤한 말투로 대답하는 영주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영주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입은 떼지 않은 채 눈썹을 치켜 올리며 왜? 라는 눈빛을 보내왔다. 봄은 가까이 와보라는 듯 그에게 손짓했다. 물음표를 띄운 채 영주는 봄에게 귀를 가져다 대었다. 봄은 손으로 입을 슬쩍 가리고서 느긋이 속닥였다. 속삭이는 목소리엔 장난기가 가득하였다.
“누구 남자친구인지 참 잘생겨서 쳐다봤어.”
은밀한 대답을 끝낸 봄은 손을 내리며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진 않았지만, 팔꿈치로 슬쩍 쿡 찔러대는 탓에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상상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난 지 석 달이 넘어가는 때였다.

1학년 2학년으로 갈라선 버스는 4차선 도로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봄은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슬며시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 음악만 틀어놓았던 휴대폰을 들어 그의 SNS에 들어갔다. 올려놓은 게시물들을 차례로 죽죽 내려보았다. 몇 달 전부터 최근까지 올라온 사진들을 구경했다. 최근에 올라온 사진까지 전부 그와 함께했던 사진이었다. 아쉽게도 서로를 찍은 사진은 올리지 않았지만 그 사진 속 기억은 선명했다. 실실 웃고 있던 것을 본 우진은 고개를 슬쩍 내밀며 말했다.
“뭐 보길래 그렇게 실실 웃고 있냐?”
흠칫, 놀란 봄은 아무렇지 않은 척 휴대폰을 덮으며 대꾸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우진은 눈을 가늘게 뜨며 히죽, 하는 웃음을 지은 채 수상하다는 듯 말했다.
“뭐야. 뭘 숨기는 거야? 야한 거라도 봤냐?”
“뭔 소리야.”
우진의 손을 뻗자 봄은 휴대폰을 급히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가방 안에 넣어버렸다. 그러자 더 눈을 반짝거리는 우진이었다.
“야. 봄이가 넌 줄 아냐?”
둘이서 주고 받은 이야길 들은 것인지 현진은 뒷자리에서 의자 사이에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뭐?”
우진은 그런 현진의 말을 되받아치듯이 응수했다.
“너 전에 나한테 들킨 거 기억 안 나냐?”
“…?”
현진의 말을 들은 봄은 옆에 앉은 우진을 쳐다보았다. 우진은 적잖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현진과 봄을 번갈아 보았다. 반응을 보아하니 전에 들킨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대체 어떻게?
“야. 아무리 그래도 공공장소에서 그러면 어떡하냐?”
봄이 그를 나무라듯 말하자, 현진은 얼굴을 확 붉히며 대꾸했다.
“아! 공공장소에서 그런 거 아니었어!”
“그러면?”
“내가 얘 자취방 잠깐 간 적이 있거든. 자주 들르니까 그냥 문 열고 들어갔는데… 다시 문 닫고 나왔지.”
“야, 그걸 말하면 어떡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는 우진이었다. 얼굴을 빼꼼 내밀었던 현진은 짓궂은 미소를 지은 채 혀를 슬쩍 내밀고는 빠져버렸다. 봄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큭큭 흘리고 있었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 달리던 버스 두 대는 전시관 뒤 주차장에 도착했다. 한 명씩 줄줄이 나오는 버스 입구에 영주가 보였다. 현진과 우진 옆에 서서 천천히 걸으며 그를 잠시 보다가 곧 고개를 돌렸다.
전시장 입구에서 다시 인원체크를 끝낸 뒤 학생들은 줄지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 데스크 옆에는 오늘 열린 전시회의 카탈로그가 꽂혀 있었다. 이런 곳에 오면 습관처럼 챙기는 카탈로그 한 부를 빼내고 다시 우진에게로 돌아갔다.
이십 분 정도 흐르자, 몰려 있던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진 채였다. 작품 위로 천장에 달린 조명만 켜진 전시장은 조금 어두웠다. 습관처럼 뽑아들었던 카탈로그를 훑어보며 걷던 중, 같이 걷던 현진은 그들보다 좀 더 앞에 있던 영주의 이름을 불렀다.
“어? 영주 오빠다.”
그녀의 목소리에 자연스레 카탈로그에 두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와 딱 눈이 마주쳤다. 슬쩍 올라간 그의 입꼬리를 보고선 따라 미소가 터질 것 같은 입을 카탈로그로 가리며 현진과 우진의 뒤를 따라갔다.
“오빠 왜 혼자 돌아다니고 있어요?”
“맞아요, 형 왜 혼자 다니고 있어요? 재형이 형은요?”
“나 작품을 좀 오래 봐서 친구들한테 그냥 신경 쓰지 말고 먼저 가라고 했어. 너희는 벌써 다 본 거야? 먼저 들어가지 않았나?”
“저희는 이미 한 바퀴 돌았어요. 너희는 어떡할 거야? 한 바퀴 더 돌 거야?”
현진은 봄과 우진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나는 조금 쉬다가…. 좀 걸었더니 다리 아프다. 카탈로그도 가지러 갈 겸 안내 데스크쪽에 가보게. 거기 앉을 만한 장소도 있는 것 같고.”
“봄이 넌?”
건네오는 물음에 봄은 들고 있던 카탈로그를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난 조금 더 보다가 쉬려고.”
“아~ 그러면 봄이 네가 영주 오빠랑 같이 좀 보고 있어! 나랑 우진인 안내 데스크 쪽 벤치에 앉아 있을 테니까.”
현진은 은근한 미소를 지은 채 우진의 팔짱을 꼈다. 옆구리에 들어온 팔짱에 뭐하냐는 듯한 눈빛으로 우진은 현진을 내려다보았다.
“잘 보다가 와~”
어쩐지 텐션이 올라간 웃음을 남긴 그녀는 우진의 팔을 붙잡고 사라졌다. 조금은 의아한 기분으로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아무래도… 뭔가 눈치챈 것 같지 않아?”
영주는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중얼거렸다.
“그럴 지도…”
“너무 태연한 거 아니야? 소문이라도 나면 어떡하려고?”
“현진이가 연애 얘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남 얘기를 막 하고 다닐 앤 아니야.”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영주는 조금 불안한 것처럼 말했다. 봄은 그런 영주를 지긋이 보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시장 입구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사람 말소리가 조금 들려왔다. 하지만 밖에 있는 것인지 그 말소리가 가까워지진 않았다.
“잘못 소문나면 우리…”
“…”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걱정하는 그의 입술을 살짝 막아버렸다. 서로의 얼굴을 가렸던 카탈로그 한 부와 함께 떨어지자 영주는 멍한 얼굴을 했다. 그러곤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며 주변을 둘러보며 작게 소리쳤다.
“야…! 누가 보면 어떡하려고 그래?”
“설사 나쁘게 소문이 나도. 내가 형 지켜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스스로 뱉어놓은 말이었지만 조금은 오글거렸다 생각이 들었다. 아무 말 없자 괜히 더 민망해져서 카탈로그로 부채질을 했다.
“큼… 여튼,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야. 현진이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아직 들켰다는 것도 확실하지 않고…”
말끝을 뭉그러뜨리며 그를 쳐다보자 그의 뺨에 열꽃이 피어있었다.
“가끔 넌… 진짜 남자 같아.”
“남자지, 그럼 여자야?”
“…”
잠시 말이 없던 그는 갑작스레 봄의 손목을 잡았다. 아직 다 제대로 보지 못한 작품들을 지나쳐가며 데려간 장소는 공공 화장실이었다. 겉부터 화려했던 전시관 건물의 화장실은 건물 외벽만큼이나 화려했다. 화장실 바로 옆에는 몸을 단정히 할 파우더 룸까지 있으니 말 다했다. 영주는 화장실 칸 칸마다 문을 열어보며 아무도 없는지 확인을 하고서 봄과 작은 칸 안에 들어왔다.
“뭐야. 은밀하게 이런 곳 데려와서 뭐하려고?”
쿵쾅거리는 심장을 모른 척 시치미 떼며 그에게 속닥였다.
“여기면 안전하게 다음 단계 할 수 있어.”
“무슨 다음 단계 말하는 거야?”
모른 쇠를 시전하자 영주는 뚜껑 내린 흰 변기 위에 앉아서 자신의 무릎을 탁탁 내리쳤다. 그 모습에 픽- 웃어버리며 봄은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가까이 마주 본 그의 눈에 자신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그 잔상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따뜻한 감촉을 한번 남기고 떠나갔다.
“나한텐 조금 전에 누가 보면 어떡하냐고 그러더니. 자기가 한술 더 뜨는 구만.”
입술에 닿은 감촉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괜히 툴툴거리자, 그런 봄이 귀엽다는 듯 쪼아대는 듯한 키스를 퍼부었다. 쪽쪽 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화장실을 울렸다.
“네가 그렇게 멋있게 말하는데 어떻게 참아.”
휩쓸고 간 소나기처럼 퍼붓던 베이비키스를 끝낸 영주는 봄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봄은 들고 있던 카탈로그를 변기의 물통 위에 올려다 놓았다. 그리고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다음 단계라면서 뽀뽀만 해…?”
예민한 그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속삭이자, 흠칫 거리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져 웃음이 나왔다.
“이따가…”
“이따가 언제?”
“전시회 다 보고 나서 진짜 둘만 있을 때…”
“왜 지금은 안 해?”
“지금은… 하면 위험해.”
장난기가 돋은 봄은 그이 얼굴을 양손으로 잡더니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떨어질 때 그의 밑 입술을 약하게 물고 떨어지며 말했다. 물고 떨어진 그의 입술은 붉고 말랑해서 젤리 같았다.
“난 하고 싶은데.”
“…안돼.”
영주는 픽픽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려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돋은 장난기는 가라앉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 번 더 그렇게 가볍게 입을 맞추니, 아예 고개를 돌려버리는 그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손으로 다시 얼굴을 잡으면 고대로 다시 돌아오니, 좋으면서도 싫은 척하는 그가 귀엽게만 느껴졌다.
“조금만…”
“…”
“조금만 하자. 응?”
“그럼... 조금만이야.”
“응응. 알겠어.”
가볍게 맞추었던 키스는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피식피식 나오던 웃음도 들어간 지 오래였다. 서로의 거칠어진 숨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아 이제 슬슬 그만해야 하는데.
화장실에 앉은 지 꽤 시간이 지났을 터였다. 하지만 붙어 있는 이 온기가, 나누는 숨결이 너무나 달콤했다. 시간이 멈추었으면 했다. 그렇게 한참을 붙어 있을 때 아무도 오지 않던 화장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두 사람은 급하게 입술을 떼어내며 눈알을 굴렸다. 봄이 무어라 입을 떼려고 하자, 영주는 그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후끈하게 달아올랐던 공기는 낯선 소리 덕분에 가라앉을 수 있었다. 바로 옆 칸에 들어온 누군가가 물을 내렸는지 돌아가는 물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 물소리가 끊기고 다시 조용해지니 영주는 봄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었다.
“갔나…?”
봄은 천천히 그의 무릎에서 일어나 작은 문틈 사이로 살펴보았다. 틈이 너무 작아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 소리도 없이 고요한 것을 보니 나간 것이 확실했다.
“간 거 같아.”

“지금 몇 시지…?”
작은 화장실 칸에 나와 개수대 거울 앞에 선 영주는 조금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며 물었다.
“지금 세 시 십분 넘었다. 이제 가야 해.”
봄은 그 옆에 서 있었다. 밖에선 조심하자고 생각을 늘 했다. 하지만 한 번 불이 붙으니 잠시 이성을 잃었다. 바보 같아서 머리를 한번 콩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런 마음을 눈치챈 건지 아닌지 영주는 멍한 봄의 뺨을 장난스레 꼬집었다.
“왜 이렇게 멍해?”
“어…? 아냐. 아무것도…”
꼬집었던 볼을 놓아주며 그는 한번 그 뺨에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그리고 곧장 나가는 두 사람의 앞에 한 사람이 화장실 옆 파우더 룸에서 나왔다.
“어? 영주 형이랑 봄이네. 화장실에 있었어?”
우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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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3-28 18:03 | 조회 : 689 목록
작가의 말
최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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