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키스는 쓰다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의 초침은 혼자 느긋하게 12시를 넘어 달리고 있었다. 봄은 종일 들여다보았던 노트북 화면 때문에 뻐근해진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집중한다고 아예 눈을 감지 않은 것인지 사막처럼 메말라 뻑뻒했다.
일요일 저녁, 꽃집 알바를 끝낸 뒤 봄은 저녁을 먹고 과제를 하고 있었다. 1학기의 막바지에 다다르니 1학년이라고 그리 여유롭진 않았다.
덮여 있던 손을 치우고 다시 눈을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자연스레 책상 위에 덮여있던 휴대폰에 시선이 갔다. 때마침 조용하던 방안을 요란하게 할 진동이 울렸다.
‘지금 뭐 해?’
영주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멍했던 머리가 순식간에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어쩐지 조급한 듯한 손동작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봄은 조금 곤란한 참이었다. 열두 시 넘은, 새벽을 향해 달리는 시간에 문자를 보낸 이 남자 때문에.

“영주 오빠는 과제 없어요?”
봄 옆에 앉은 현진은 봄 앞에 태연히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영주에게 말했다. 영주는 아래로 내려두었던 시선을 들었다.
“어우, 아주 많지.”
“그 바쁜 시간 쪼개서 봄이 만나러 오는 거예요?”
“봄이가 나 보고 싶다고 계속 졸라대니까 어쩔 수 없이 온 거지. 그치?"
영주는 묵묵히 화면만을 들여다보고 있던 봄을 슬쩍 보면서 말했다. 짓궂은 미소도 함께 보이며 킥킥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봄은 아무렇지 않은 척 키보드 자판을 두들기던 손가락을 멈추었다. 시선을 올리니 장난기가 한가득한 눈동자와 마주했다. 봄은 괜시리 쿵쿵대는 심장을 애써 누르며 그를 흘겨보았다.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현진은 그런 두 사람을 흥미진진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저 호기심 어린 눈빛 탓에 괜히 더 말투가 새초롬해졌다.
“어제 문자 내용에서 말이야. 같은 학년이 아니니까 자주 못 보네요. 이렇게 보내놓고선."
“그게 어떻게 보고 싶다고 조른 거야? 그냥 그렇다 이 말이지.”
“못 봐서 서운하다는 말이잖아. 그래서 이렇게 바쁜 시간 쪼개서 보러 왔는데, 넌 인사 한번 꾸벅하고 계속 노트북만 뚫어져라. 보고만 있고. 누가 보면 노트북이 애인인 줄 알겠네. 한 번도 눈을 안 떼.”
봄은 이 자리에 더 앉아있다간 저 능구렁이 같은 말 지옥에 둘러싸일 것 같아 일어났다.
“어? 어디가?”
자신을 불러세우는 저 말에도 봄은 그저 발걸음을 옮겼다. 성큼성큼 가감 없는 발걸음 아래 봄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잠재우려 애쓰고 있었다. 계속 아니라고 눈 가리고 모른 척 했던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하게도 저런 말을 툭툭 내뱉으니 자꾸만 그에게 짜증만 냈다. 조금 전에도 조금은 과하게 반응해버린 자신을 탓하며 4층 아래 계단 중간에 있는 정수기 앞에 섰다.
정수기 옆에 붙어있는 종이컵 하나를 빼내 냉수 물을 담았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멍하니 보고 있을 때,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딜 급히 나가나 했는데, 목말라서 그런 거야?”
들으면 좋으면서도 듣고 싶진 않은 그의 목소리가 귓가로 스며들었다. 봄은 한숨인 듯 아닌 듯 숨을 후, 뱉었다. 그리고 곧 물이 반쯤 담긴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다 대었다.
어느새 바로 옆에 선 영주는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않고 있는 봄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이 따끔거릴 만큼 적나라해서 봄은 더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요즘 왜 그러냐.”
“뭐가.”
마음 한 구석이 찔렸다. 하지만 애써 모른척 시치미를 뚝 떼며 대꾸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 대도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낮은 한숨 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문자 보낼 땐 안 그러면서. 만나면 투덜거리잖아. 뭐 삐진 사람처럼. 내가 어제 문자에서 뭐 서운하게 한 거 있어? 아니면… 방금 그런 식의 농담이 그렇게 기분 나빴던 거야?”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니면 뭔데. 요즘 밥 먹자 그래도 계속 다른 거 해야 한다고 그러고. 누가 보면 네가 4학년인 줄 알겠다. 나보다 네가 더 바빠.”
봄은 다 마신 종이컵을 잘근 씹었다. 서운한 듯 말을 계속 늘어놓는 눈앞의 사람에게 솔직해질 수 없는 자신이 이럴 땐 밉기까지 했다.
다시 예전처럼 웃으며 대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감정에 대해 깨닫고 나니. 모든 것이 신경 쓰였다. 옷차림이 이상하진 않은지, 얼굴이, 표정이 이상하지 않은지. 별의별 것이 다 신경이 쓰여 고장 난 로봇처럼 되어버려선 하고 싶은 말이 입밖에 나오지 못했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실없이 웃어버리니. 들키지 않으려면 온 신경을 쏟아부어야 했다. 그렇기에 좀더 예민하게 말이 나갔다.
내가 이 정도로 소심한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1학년 여자애들이 한 번쯤 다 좋아했다는 사람.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는 사람. 심지어 교수에게까지 신임받는 사람. 모든 좋은 형용사를 다 때려 박은 이 사람이 좋다는 게 너무나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게다가 남자. 들킨다면... 분명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아 더 조심스러웠다.
“바쁘니까 그러지.”
봄은 정수기 옆 아래에 있는 파란색 쓰레기통에다가 종이컵을 던져넣었다. 빈 플라스틱 통 안에 종이컵이 요란하게 떨어졌다. 곧장 몸을 돌려 다시 계단으로 올라가려 하자, 영주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그의 손목을 잡았다.
“...뭐야.”
잡힌 손이 아플 정도의 세기였다. 하도 세게 잡아대는 통에 눈살이 자동으로 찌푸려졌다. 고개를 슬쩍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잠깐 전 딱딱하게 굳어버린 목소리처럼 조각같은 얼굴에 짜증이 서려 있었다.
“놔, 아파.”
“싫어. 왜 그러는지 말 할 때까지 안 놔줄 거야.”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왜 눈 안마주쳐?"
잡힌 손이 뜨거워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크게 요동치는 심장소리가 그에게 닿을까 무서웠다. 그래서 괜히 짜증내듯 그를 쏘아 붙였다.
"별 거 아닌 거 가지고 왜 이렇게 반응해?"
“별거 아니면... 왜 자꾸 피하는데!”
처음엔 낮고 어둡던 음성이 감정이 격해지면서 높아졌다. 고요하던 층에 메아리가 들릴 만큼 큰 음성이었다.
격양된 목소리에 어깨가 움츠러 들었다.
실수했다. 어떡하지.
“말하기 싫다고.”
조금 전보단 기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말하기 싫은데.”
기죽은 척 하면 놓아주길 바랬지만 잡힌 손과 그의 눈빛은 단호하기만 했다.
“아! 그냥 모른 척 넘어가 주면 안돼?”
“왜 그래야 하는데?”
“말하기 싫다잖아. 그냥 기분이 안 좋은가 보다. 말하기 싫다 그러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면 되잖아. 왜 자꾸 짜증 나게...”
“...”
"..."
상처받은 듯 그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너... 지금 말 안하면 나 너 얘기 안들을거야."
어떡해 말해. 너 좋아한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그가 조금은 원망스럽고 미안했다. 나도 이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닌데.
"..."
봄이 아무말 없이 보고만 있으니, 꽉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꽉 잡힌 팔목이 시큰했다.
“너... 진짜. 짜증나."
그러고 나서 그는 휙 하고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아래층 계단을 타고 사라졌다.
“영주 오빠랑 싸웠어…?”
언제 계단 쪽으로 온 것인지 현진은 문 옆에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서 말했다. 그에게 붙잡혔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흰 피부 위로 붉은 손자국이 선연했다. 격하게 휘몰아치는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봄은 혼란스럽고 자신에게 화난 마음에 입술이 하얗게 되도록 깨물었다.

이후로 영주는 정말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봄은 딱딱한 얼굴을 하고서 2학년 과실 앞에 서 있었다. 그렇게 계단에서 다툼이 있고 난 뒤 일주일이었다. 1층 복도에 있는 자판기에서 뽑아온 캔 음료를 들고 철문에 뚫린 유리창 너머 안을 살펴보았다.
창 앞으로 얼굴을 들이민 순간,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며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렸다.
“…”
“…”
피곤한 기색이 만연한 영주가 문앞에 서 있었다. 손안에 든 차가운 캔보다 더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는 눈빛이 봄에게 박혔다. 하지만 곧 박힌 시선은 떠나갔다. 그는 금방 고개를 돌리며 봄을 등지고서 걸어갔다. 양손에 가득 쥔 캔을 꼬옥 쥐고서. 그를 따라갔다.
“형.”
긴장으로 조금 떨리는 목소리에 영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봄은 천천히 심호흡하며 그에게로 걸어갔다. 그의 발치에 도착하고, 오른손에 든 캔 음료를 그에게 건넸다. 영주는 말없이 시선만 내리며 눈앞에 들어온 캔 음료만 직시했다.
“뭐야?”
“마시라고 뽑아왔지.”
“…”
허공에 슬쩍 흔들어보아도 그는 잡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그의 손에 쥐여주려는 순간, 영주는 봄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곧장 불이 들어오지 않은 계단의 구석 쪽으로 데려갔다. 거의 계단 구석에 고양이가 쥐 몰듯이 몰아넣은 좁은 공간안에 봄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하자는 거야?”
“…”
싸운 그 날처럼 격한 손짓은 아니었지만 차가운 말투와 차가운 목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뭐긴, 화해하자고. 전화는 안 받고 문자엔 답도 없으니까. 찾아온 거잖아.”
태연한 단어들의 나열이었지만 떨리는 목소리는 감추지 못했다. 무서웠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서 있는 눈앞의 사람이. 정말 화가 많이 난 것 같아 만나기전 하려 했던 말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과하려고 준비해둔 말들이 많이 있었는데...
“…하.”
그의 얼굴에 답답함이 스쳐 갔다.
“…왜 그랬는지. 는 말해줄 생각은 없는 거야? 그것 때문에 싸웠는데.”
생각했다. 아주 많이. 그의 그림자도 보지 못한 일주일간 머리 터지게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이유에 대해서 궁금하다고 하더라도. 솔직히 말해줄 생각은 여전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말해주면 안 돼?”
겨우 입을 떼서 나온 말을 듣고서 영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전히 답답한 듯 머리를 한번 위로 쓸어넘기고선 봄에 손에 붙들려 있던 음료 캔을 받아들었다.
“…나중에."
그리곤 꾹꾹 눌러참은 듯한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떼었다.
"정리되면 꼭 말해줘야 해.”
“알겠어.”
“좀 까칠하게 굴지 말고. 얼마나 서운했는지 아냐? 약속 계속 거절당하는 거 진짜 상처야.”
“미안해.”
“어휴.”
영주는 고개를 숙인 봄의 머리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리곤 몇 번 머리카락을 헤집어 놓고선 손을 떼었다. 여전히 봄이 그와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있자, 영주는 그의 앞머리를 위로 넘겼다. 조금 놀란 듯 봄이 그를 쳐다보자 영주는 굳어있던 얼굴을 조금 풀며 웃어 보였다.
“알겠으니까, 무슨 큰 죄 지은 사람처럼 있지 마.”
“화 많이 났던 거 아니야…?”
“화났지. 서운하고. 근데…”
“…”
“네 멍한 얼굴 다시 보니까 그냥 괜찮아졌어.”
이 말을 끝으로 그는 캔 음료의 뚜껑을 땄다. 캔 안에 든 탄산이 톡톡 튀어 오르는 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지금 과제 중이야. 형은…’
‘과제 마무리하다가…’
별거 아닌 문장을 몇 번이나 지웠다. 쓰고를 반복했다. 한 번 다툰 이후로 피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마음을 다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이런 소소한 것에 설렜다. 나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을 짓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깨달았다. 한번 빠지니 정말 답이 없구나 하고…
봄은 자조하듯 속으로 한숨 쉬고 있을 때 휴대폰 화면에 전화기 아이콘과 함께 맑은 신호음이 울렸다. 몇 번 울린 뒤 받으려고 했지만, 문자를 지우고 있던 엄지에 의해 바로 수신 버튼을 눌러버렸다.
“악!”
“왜? 무슨 일이야?”
당황을 참지 못하고 악 소리를 냈더니 놀란 그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아. 아니야. 그냥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해서…”
벌렁거리는 심장을 주먹으로 툭툭 치며 대답했다.
“그래? 어휴 깜짝이야. 난 뭐 어디 부딪히기라도 한 줄 알았다. 지금 뭐 해? 전화는 엄청 빨리 받으면서 문자는 왜 답장을 안 했데.”
“답장하려고 했는데, 딱 형이 전화 온 거야. 큼… 과제 하다가 잠깐 쉬는 중이었어.”
“아 진짜? 과제 언제 끝나냐?”
“어…”
봄은 책상 위에 놓여있는 탁상시계를 보며 시간을 짐작해보다 입을 열었다.
“한 삼십 분 좀 넘게?”
“그렇게 오래 걸려? 주말 동안 너 놀았어?”
“아니거든? 꽃집 일 돕는다고 지금 한 거야.”
“아 어머님, 아버님 꽃집 하신다고 그랬지, 참. 하여튼 알겠어.”
하고 전화는 뚝 끊어졌다.
뭐야. 왜 전화한 거람. 괜히 긴장했네.
몇 분 채 안 되는. 생각보다 짧은 통화에 아쉬움이 남았다.
아니지, 아니지… 얼른 다시 해야겠다. 빨리하고 자야지.
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휴대폰을 책상 옆 침대에 던져놓았다. 그리고 다시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나마 굴러가던 눈이 다시 뻑뻑해질 때 즘 봄은 상체를 뒤로 젖혔다.
“어우… 이제야 끝났네.”
다시 탁상시계를 바라보니 시간은 1시를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위로 쭈욱 펴는 양팔과 함께 늘어지는 하품을 하고서 노트북 전원을 끌 때쯤. 침대 위에 아무렇게 던져진 휴대폰의 신호음이 다시 선명하게 울렸다.
설마. 하는 마음과 함께 봄은 다급히 이불 위에 묻혀있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영주였다.
이번엔 멍청하게 실수로 누르지 말고 딱 신호음이 세 번 울릴 때까지 참았다. 그리고 천천히 버튼을 누르고서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끝났어?”
“어, 끝났어. 이제 잘 준비하고 있었어.”
“자지 말고 나와.”
“…뭐? 아니 형 지금 어디야?”
설마설마했는데…
“너희 집 앞이야.”
“설마 했는데… 언제 온 거야?”
“너한테 전화했을 때 이미 도착했지. 빨리 내려와! 줄 거 있으니까!”
봄은 다급히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열었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보도 위로 유일하게 불빛이 내린 곳에 영주가 서 있었다. 봄은 다시 커튼을 치고 잠옷 위에 재킷을 대충 걸치고 방문을 열고 나겠다. 부모님이 잠든 초 새벽,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나가니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상쾌했다. 맨발에 슬리퍼만 신고 1층으로 가는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렇게 바쁘게 내려가니 유일하게 밝은 곳 위로 긴 그림자를 드리운 영주가 서 있었다.
“영주 형.”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영주는 고개를 돌렸다. 환한 미소와 함께. 하지만 그 환한 미소와는 반대되는. 붉은 자국이 그의 뺨에 선명히 자리 잡고 있었다.

두 사람은 불이 다 꺼진 거리를 나란히 걸었다. 마른 바닥에 슬리퍼가 끌리는 소리가 고요한 적막에 유일한 소음이었다. 봄은 그에게 건네받은 따뜻한 캔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적당히 쓰면서도 단맛이 입안을 감돌다가 사라졌다.
“바람 선선하게 불어오는 게 기분 좋네. 그 치?”
“응. 그러게…”
중얼거리듯 대답하고서 그의 부은 왼쪽 뺨을 흘끗 보았다.
아무리 봐도, 저거…
맞은 게 분명하다. 대체 누구한테…?
봄의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쳐 갔다.
“이 시간까지 했는데, 별로 피곤해 보이진 않네?”
“어… 응. 형은? 학교에서 과제 하다가 온 거야?”
“난 어제 할 거 다 끝냈지. 집에 있다가… 너 생각 나서 왔어. ”
“아. 그렇구나…”
깨졌던 적막은 금방 다시 찾아왔다. 그렇게 한참을 가게 뒤쪽에 있는 아파트 단지 산책로를 걸었다. 잔잔히 흐르는 개울가 옆으로 찬찬히 걷다가 위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봄은 손짓으로 돌계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앉아서 조금만 쉴래?”
“좋아.”
영주는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돌계단 위에 올라앉아 있는 먼지를 손으로 털어냈다. 희고 고운 흙가루가 아래로 부슬거리며 떨어졌다.
“얼굴은 왜 그렇게 된 거야?”
봄은 결국 건드려야 할지 말지 고민하던 것을 툭 건드려보았다. 영주는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낸 뒤 왼손으로 조금 부어오른 왼쪽 뺨을 문질렀다. 조금만 건드려도 아릴 것 같은데, 만지는 손은 크게 아픔을 못 느끼는 듯했다.
“많이 티나?”
영주는 푸스스 웃음을 아래로 떨구며 물었다.
“많이 부었어. 아프게 왜 그렇게 문질러데.”
봄은 가만히 있지 못하는 그의 왼손을 붙잡았다. 잡힌 손이 움찔 떨렸다. 그 미세한 변화를 눈치 못챌 봄이 아니기에 얼른 잡은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곤 어색하게 캔을 만지작거리다 얼마 남지 않은 커피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냥 별건 아니고 아빠한테 맞아서 그래.”
“켁.”
길을 잘못 든 커피 때문에 마른 기침이 계속 나왔다. 민망할 정도로 끊이지 않는 기침 때문에 봄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 당황한 듯한 영주는 제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괜찮아?”
“괜. 괜찮아.”
봄은 충격을 받았다. 대체 누가 저 사람을 때렸을까. 오는 길에 취객이라도 만나서 시비라도 털린 것일까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범인이었다.
겨우 진정해서 숨을 고르니 영주는 혼자 웃음을 터트렸다. 큭큭 거리는 웃음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뭘 그렇게 놀라. 별거 아닌데.”
“…별거 아닌 일이야. 그게…?”
반 뿜어버린 커피 때문에 입가에 묻은 커피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맞을 수도 있지 뭐.”
“당연히 맞는 게 어딨어.”
“…”
“…”
영주는 잠시 말없이 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은은한 미소가 띄워진 그의 얼굴에선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계속 눈을 맞추기도 뭣해서, 봄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나 심하게 싸웠길래 그런 거야…?”
“음… 몰라, 이런 일 한두 번도 아니고.”
“한두 번 일이 아니라고? 아니 어떻게…”
“그냥 이 정도는 일상적인 일이야.”
“일상이… 이상하잖아.”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이렇게 충격적인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런 아픔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솔직히 그의 가족에 대해서 들은 이야긴 없었지만. 은연중에 확신하고 있었다. 동생은 없을 것 같았고... 형제가 있다면 누나가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외동아들이거나. 어쨌든 화목한 집에서 자란 그런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지금까지 보아온 그의 모습은 사랑받고 자란 사람의 표본같았으니까.
“그 이상한 것이 나한테는 일상이야.”
가슴에 바늘이 찔린 것 같았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자신이 더 서글퍼졌다.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영주는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의 앞머리를 위로 쓸어넘겼다. 검은 머리카락으로 가려졌던 눈앞에 밝아지며 그의 얼굴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너무 그렇게 슬픈 얼굴 하지 마. 난 괜찮으니까.”
“…”
봄은 자신의 머리 위에 올라간 그의 손을 붙잡으며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정말로 괜찮은 거 맞아?”
“…”
잔잔한 호수 같던 그의 눈빛이 잠깐 일렁였다.
“사실. 그렇게 괜찮은 기분은 아니었는데..."
영주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입가를 슬쩍 가리며 머뭇거리다 입을 떼었다.
"네 얼굴 보니까 괜찮은 것 같아.”
말이 끝난 뒤 영주의 눈이 부드럽게 접혔다.
“…”
순간 빨라지는 고동 소리에 참지 못하고, 봄은 조금 떨리는 손으로 부어오른 그의 뺨을 만졌다. 뜨거운 손이 그의 뺨에 닿자 그의 눈이 커졌다.
찬찬히 그의 아픔을 어루만지듯 그의 뺨을 쓰다듬으니, 그의 손이 겹쳐왔다. 기분 좋은 정도의 따뜻한 온도.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향이 심장 고동소리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스스로가 다가가는지, 그가 다가오는지 모를 때 즘. 봄은 자연스레 눈을 감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첫키스의 맛은 달콤하지도 않았고, 폭죽이 터지는 그런 느낌도 아니었다. 그저 그의 입안에 남은 쓴 커피맛이 났다.

“그 얘기를 들었을 당시는 슬펐지만. 한편으론 기분이 좋았어.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는 다는 건 그만큼 믿는다는 의미니까... 그 사람에게 내가 소중한 인연이구나 하고 혼자 그렇게 생각했어. 그에게 돋힌 가시가 날 향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봄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과거로 돌아가 그의 손을 붙잡고 도망칠 수도 없으니. 마음만 갑갑해진 민구는 어깨에 기댄 그의 작은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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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3-21 23:12 | 조회 : 1,018 목록
작가의 말
최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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