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화났어요.

순식간이었다.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찻잔이 떨어진 것은. 흰색의 머그잔은 딱딱한 타일 바닥에 떨어져 조각조각으로 부서졌다.
쨍그랑- 하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연한 갈색의 물이 타일에 난 길을 따라 느리게 퍼져나갔다.
“민구야!”
날카롭지만 미세한 떨림이 섞인 목소리가 날아왔다.
“…”
민구는 정신없이 휘두르던 오른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아래로 천천히 내렸다. 주먹을 꽉 쥔 오른손이 덜덜 떨렸다.

송영주는 민구에게 뒷덜미를 잡혀 바닥을 나뒹굴었다. 돌처럼 단단한 바닥에 머리를 부딪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민구가 그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 상태로 몇 번이나 주먹으로 얻어맞았다. 구타 소리가 끔찍하게도 가게 안 적막을 깨부쉈다.

민구는 거칠어진 숨을 내뱉었다. 바닥에 깔린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잘생겼다 감탄했던 얼굴에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시원한 미소가 멋졌던 입술은 터져 있었고, 오뚝한 코에는 불그죽죽한 것이 흘러내렸다.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끔찍한 몰골이었다.
달려드는 순간부터 봄이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를 때까지, 귀마개를 낀 것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겨우 제정신을 차리니 아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를 때렸던 오른손이 얼얼했다. 튀어나온 뼈마디 마디가 쓰라렸다. 순간 너무 힘을 준 탓에 손가락이 박힌 손바닥이 아렸다. 미친듯이 뛰고 있는 심장도 화상을 입은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윽…”
송영주는 얼굴을 비틀며 아픔에 신음했다. 단정히 묶여 있던 머리가 엉망이 된 채 봄은 민구의 왼팔을 붙잡았다. 민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 그와 얼굴을 마주하기 두려웠다. 만약, 지금 이 순간에 고개를 돌린다면... 자신이 어떤 얼굴일지 스스로도 무서웠다. 그리고... 그 예쁘던 얼굴이 지금은 조금 미웠을지 모르겠다.
민구는 왼손에 잡힌 손을 천천히 빼내었다. 봄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가게 바닥은 엉망이었다. 흰색의 깨진 유리들이 산산이 흩어져 있었고, 의자도 한 개 넘어가 있었다. 입구 쪽도 지저분했다. 바닥에 쏟아진 커피와 각얼음이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커피 웅덩이 위로 뽀얗던 케이크 상자의 밑단이 어둡게 젖어들었다.
민구는 몸을 일으켜 뒤쪽으로 물러났다. 한 발짝 멀어지자, 맨발에도 찌릿한 아픔이 올라왔다. 내려다보니, 떨어진 유리조각을 밟았는지 피가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민구가 나오자, 송영주는 얻어맞은 얼굴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미간엔 주름이 한 가득이었다. 그리고 곧장 민구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소리쳤다.
“이 새끼 뭐야! 깡패야?! 다짜고짜 사람을 때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송영주는 한 번 더 바닥에 나뒹굴었다. 깜짝 놀라 바라보니 봄이 그를 걷어찬 것이었다. 엎어진 그가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봄은 그의 머리채를 잡았다. 거의 쥐잡듯이 잡아서 입구까지 끌어냈다. 비싸 보이는 정장이 바닥에 흘린 커피로 범벅되었다.
“악, 봄아!”
영주가 봄을 애타게 불러보지만 묵묵부답이었다.
가게 유리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송영주를 가게 밖까지 끌어냈다. 비가 내린 축축한 바닥에 송영주는 고꾸라졌다. 눈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그는 반 정도 뜯긴 머리를 부여잡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봄의 시선은 냉랭했다. 아니, 냉랭하다 못해 마주하는 사람을 얼어붙게 할 정도로 차가웠다.
"꺼져."
협박이라 들릴 만한 낮은 목소리로 짧게 뱉었다. 그 말을 끝으로 유리문이 거칠게 닫혔다.

지독하게 무섭도록 고요한 적막. 두 남자는 말이 없었다. 몇 분이 흘렀을까.
“너…발…”
봄은 피범벅이 된 민구의 맨발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놀란 듯 말을 더듬으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더 가관이었다. 슬리퍼와 발 사이에 피가 새어 나와서 조금 고여 있었다. 움직이면 고인 피가 타일 바닥에 뚝, 떨어질 것 같았다.
봄은 한번 숨을 삼키고 그의 왼팔을 잡았다. 이번엔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저 봄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잠시 가게 문을 걸어 잠그고 두 사람은 이층집으로 올라갔다. 작은 조각들이 박힌 것인지 걸을 때마다 살을 파고드는 고통이 느껴졌다.

민구는 시선을 내렸다. 봄은 그 앞에 앉아 가져온 구급상자에 들어있던 핀셋으로 박힌 유리를 조심스레 빼내고 있었다. 발 옆에 놓인 휴지 위에 작은 조각들이 한두 개씩 놓였다. 하얗던 휴지 위에 붉은 점들이 하나둘씩 퍼져나갔다.
손 놓지 말걸.
민구는 후회를 하고 있었다. 바로 전에 손을 놓았을 때 놀란 그의 숨소리가 선명했다.
많이 놀라셨을 텐데… 상처받으셨겠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역시 그러지 말 걸 그랬어.
민구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민구의 머리 위에 닿을 때쯤, 구급상자의 뚜껑이 탁 소리 내며 닫혔다. 조심스레 뻗었던 손은 결국 돌아왔다. 치료를 끝마친 봄은 구급상자를 들고 일어났다. 검음 머리칼에 얼굴이 가려져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보이지 않아도 느껴졌다. 우울함이...
“발 다쳤으니까, 쉬고 있어. 가게는 내가 치울 테니까.”
덤덤한 듯하지만 냉랭한 목소리였다. 민구는 쉽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아무 대답이 없자, 봄은 몸을 돌려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결국, 그가 나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혼자 덩그러니, 그저 바닥에 내팽개쳐진 장난감처럼 앉아있을 뿐이었다.

“…”
현관문을 열고 나간 뒤, 봄은 그 뒤에 기대서 스르륵 아래로 떨어졌다. 가로수길 바닥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힘이 없었다.
툭-
꾹 눌러 참았던 눈물이 뺨을 타고 턱 끝에 매달렸다. 떨어지기 싫어 매달려 있던 눈물은 결국 아래로 떨어졌다.
툭-… 툭툭
쉴새 없이 떨어진 눈물들은 셀 수 없었다. 오늘 새벽부터 내렸던 비처럼 계속 흘러내렸다. 하늘에 구멍이 뚤린 것도 아닌데, 쏟아졌던 비처럼 그렇게 계속 끊임없이 떨어졌다. 떨어지고 또 떨어져서 하얗던 바닥 위로 호수 같은 물웅덩이가 고였다.
봄은 손으로 꾹꾹 새어 나오는 울음을 삼켰다. 흐르는 눈물이, 뾰족한 칼처럼 마음을 몇 번이나 찢어 갈겼다. 참 지독히도 원망스러웠다. 다시금 나타난 그 남자도. 그리고 약속을 지키지 못한 스스로도, 원망스럽고 또 아파서 그저 쭈그려 앉아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한 사람의 숨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방에서, 돌아가는 시침 소리만 시끄러웠다. 민구는 멍하니 소파 위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언제 오시는 거지…”
가게 마감 시간인 열 시는 이미 넘어가서 열한 시를 달리고 있었다. 현관문은 조용했다. 민구는 휴대폰을 들어 확인했다. 혹시나… 봄에게 연락이 왔는데, 못들은 걸까 하여. 그가 나간 이후로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눈만 깜빡이고 있었으니 못 들었을 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확인했다. 바라는 마음과는 반대로 알림창은 무심하게도 깨끗했다.
결국, 민구는 몸을 일으켰다. 걷을 때마다 쓰라렸지만, 그래도 일어나야만 했다. 현관문을 나가니, 땅거미가 내려앉은 밤이었다. 어둠은 조용했지만, 귓속을 파고드는 바람 소리와 빗소리는 시끄러웠다. 잔잔했던 비가, 다시 축축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민구는 신발장 안에 두었던 작은 우산을 펴고 천천히 계단을 탔다. 비틀거리며 내려간 민구 앞에는 무정하게도 불한 점 들어오지 않은 가게가 그를 맞이해주었다. 들고 있던 우산을 내리고 창문 앞에 서서 안을 살펴보았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아무도 없었다. 가게 문이 밖에서 잠겨있는데, 당연한 사실이었다.
급속도로 불안해진 마음을 안고 민구는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의미없는 신호음만 빗소리와 함께 섞여 들렸다.
“대체 왜 안 받으시는 거야… 비도 이렇게 오는데, 대체 어디를 가신 거지…?”
열 번이 다 되어가도록 전화를 걸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듣고 싶지 않은 신호음만 귀를 괴롭힐 뿐이었다.
민구는 불편한 발을 옮기며 주변을 걸어 다녔다. 나올 때만 해도 그리 크지 않던 빗방울은 점점 굵어졌다. 우산에 부딪혀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유리알이 떨어지는 소리와 같았다.
“아…”
삼십 분쯤 걸었을까, 슬리퍼 안쪽이 축축히 젖어들었다. 이 때문에 상처 위에 둘린 거즈에 빗물이 빠르게 스며들었다. 민구는 미간을 구겼다. 따끔한 고통이 물 때문에 배가 되었다. 견디면서 걷다가 걷다가 안돼서 결국, 건물 외벽을 짚었다. 고개를 숙여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흰 거즈 위로 검붉은 것이 흰 도화지에 퍼진 물감처럼 물들고 있었다.

돌아간 이층집은 불빛 하나 없이 어둑했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밖보다 더 어둡고 추워보였다. 민구는 식은땀이 흐른 이마를 손등으로 훔쳤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 버린 비밀번호를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니, 여전히 고요했다.

시간은 잘만 흘러간다.
민구는 불도 키지 않은 채 휴대폰만 꼭 쥐고서 소파에 쭈그려 앉았다. 열 두 시가 훨씬 넘은 시각이었다. 멍하니, 울리지 않은 휴대폰 화면을 보았다.

열두 시를 훌쩍 너머 새벽의 중심을 달리고 있을 때즘, 현관문 도어락 소리가 미미하게 들려왔다. 처음 앉은 자리에서 쓰러져 소파에 잠들었던 민구였다. 희미하게 뜬 시야 속 보고 싶었던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잠시 그 앞에 서 있다가 떠나가려 하니, 민구는 다급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 방금 얼린 얼음처럼 손이 차가웠다. 민구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실루엣만 보이던 봄의 모습이 선명히 담겼다. 쏟아 내리던 비를 혼자 다 맞은 것인지, 푹 젖어있었다. 머리는 물론이고, 옷까지. 전부 엉망인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어디 갔다 오셨어요. 비… 다 맞으신 거에요? 우산은요?”
금방이라도 얼어버릴 것 같은 차가움에 민구는 그의 손을 꼬옥 잡았다. 너무나도 차가워서 산산이 부서질 것 같았다. 우수수 쏟아지는 질문에도 봄은 아무 말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만요. 수건 가져다 드릴게요.”
민구는 차가운 그의 두 손을 문지르다,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걸어갔지만, 곧 멈춰섰다. 그의 목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필요 없어.”
차갑던 손만큼이나 냉정한 목소리였다. 찌릿- 통증이 느껴졌다. 발밑이 아닌, 심장 속에서. 싸늘한 그의 말투에 민구는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입술을 꾹 깨물어 참고 말했다.
“필요 없기는요. 다 젖었잖아요.”
더듬거리며 걸어간 욕실 선반에서 새 수건을 꺼내었다.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는 싸늘함에 머리가 다시금 지끈거렸다. 그리고 조금… 아니 조금 많이 슬퍼졌다.

다시 거실로 돌아가니, 봄은 그대로 똑같은 위치에 서 있었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 민구를 바라보았다. 뺨을 타고 흐른 물이 뚝뚝 아래로 떨어졌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헷갈렸다.
가져온 수건으로 그의 머리를 닦았다. 보송보송하던 수건이 점점 빗물로 젖어들었다. 떨림을 꾹 참고 애써 담담한 척 다시 말을 이었다.
“감기 걸리게 왜… 우산도 안 들고 나간 거에요.”
“왜. 화 안 내?”
그는 예상외의 말을 뱉었다.
“화를 왜 내요.”
“화내야지. 다른 사람이랑 키스하고 있었는데.”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봄은 갑자기 픽- 힘 빠지는 웃음을 내뱉었다. 민구의 손이 점점 떨렸다. 혼란함과 아픔이 뒤섞여 정신이 어지러웠다.
“화났으면서 참지 마. 멍청하게.”
“화 안 났어요.”
“거짓말. 화났잖아. 사람을 그렇게 피떡을 만들어놓고는. 왜 아닌 척해? 화내고 싶으면 화내! 참지 말라고!"
봄은 민구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매서운 화살처럼 날아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박혔다. 아팠다. 화살 같은 그의 말도,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바라보는 그의 시선도. 수건은 나풀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결국, 꾹 눌러두었던 감정의 댐이 무너져 내렸다.
“그래요! 저 화났어요!”
쩌렁대게 울리는 목소리에 봄은 흠칫 놀라 숨을 죽였다. 불안하게 떨리는 눈동자가 민구를 담았다.
“왜!..왜…”
쩌렁대게 울렸던 목소리는 점점 회오리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줄어들었다.
“왜…전화 안 받았어요. 열 번이 넘게 했는데. 비가 이렇게 내리는데, 우산은 왜 안 들고 나갔어요. 가게에 하늘색 우산 있었잖아요. 왜… 정말 걱정했는데… 그렇게 못되게 말해요. 진짜 걱정했는데.”
결국, 참았던 눈물이 봇물 터지듯 터져버렸다. 꾸역꾸역 열심히 말하며 눈물을 참아보지만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삐죽삐죽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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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2-28 22:25 | 조회 : 861 목록
작가의 말
최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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