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터같은 연애

한 번 터지기 시작한 눈물은 쉬이 그칠 줄 몰랐다.
“왜…왜 그러는, 건데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였다. 눈물이 가득 차 희뿌연 시야 속에서 봄의 멍한 표정이 들어왔다.
“제가. 사장님 손 놓아서 죄송해요. 그것 때문에 화나신 거에요? 죄송해요. 잘못, 했어요. 아니면... 제가. 그 사람. 때려서..."
끅,끅 거릴 때마다 어깨도 자동으로 올라갔다. 손등으로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쉴 새 없이 닦았다. 하지만 닦아도 닦아도 마르지 않았다. 오히려 손등만 축축하게, 비를 맞은 것처럼 젖어갔다. 그렇게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고 있을 때, 봄이 그를 끌어안았다. 차가운 빗물이 반소매 티셔츠에 점점 스며들었다. 그가 머금은 빗물이, 차가움이 뜨거운 피부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미안.”
봄은 중얼거리듯 작게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언뜻 한숨 같기도 했다. 바닥에 착 가라앉은 먼지처럼 뿌옇고 잘 보이지 않는 그런 목소리였다. 민구는 양손으로 봄을 꽉 끌어안았다. 뜨거운 눈물이 그의 어깨에 닿아 미지근해졌다. 그렇게 한참을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맞닿아 있는 가슴엔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았다.

“…”
“…진정 됐어?”
애처롭게 보일 정도로 떨던 어깨가 멈추었다. 홍수 난 것처럼 쏟아져 내리던 눈물샘도 이젠 조금 말랐는지. 코만 훌쩍였다. 코끝이 새빨갛게 익은 과실처럼 붉어진 채였다. 민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옷도 다 젖어버렸네.”
“…괜찮아요.”
맞닿은 가슴께는 이미 빗물로 축축해진 지 오래였다.
“사장님… 어디 갔다 오신 거에요. 이 새벽까지.”
봄이 그에게서 조금 떨어지려 했다. 하지만 민구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품 안에 넣고서야 안심한 듯 다시 물었다.
“…벌 주러.”
“…누구요?”
“누구긴, 약속 못 지킨 사람이지. 나 말이야. 너한테… 아무 일도 없을 거라 했잖아.”
민구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조금 전보단 훨씬 안정적인 얼굴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눈가에 스며있는 슬픔은 가시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스스로 벌을 내린다니… 그것 때문에 이렇게 푹 젖어서 온 거야? 나한테 미안해서? 도대체… 이 사람은 정말. 사람 마음을 아프다 못해 아리게 만드는구나.
민구는 아프고 또 슬퍼서 그의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었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귀 옆으로 넘겨주었다. 다정한 손길에 봄은 웃었다.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리는 웃음이었다.
“바보. 정말… 미련둔탱이처럼. 오늘 날씨도 추웠는데…”
“그러게…”
봄은 다시 픽- 하고 웃었다.
“몇 시간 동안 맞은 거에요. 대체.”
“몰라… 한 세 시간은 맞았나.”
민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전히 그를 품에 꼭 안은 채 바닥에 떨어진 수건을 주웠다. 그리고 다시 그의 머리와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아 주었다. 봄은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보송보송하던 손수건도 그들처럼 점점 물들어갔다.

“예전에 만났다고 했잖아. 스무 살 때.”
봄은 민구의 어깨에 기댄 채 말을 이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내려다보았다. 뺨에 닿은 그의 차가운 머리카락이 조금 간지러웠다.
“네.”
“음… 사실, 그냥 안 좋게 끝났다는 말로 다하긴 좀 길어.”
봄은 그와 눈을 맞추었다. 서로의 눈동자에 서로의 얼굴이 담겼다. 어두운 방 안에서 창문 커튼 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이 그의 눈동자에 별을 박았다.
“궁금해요. 하지만… 제가 궁금하다는 이유로 사장님이 안 좋은 기억을 다시 되뇌게 해서, 다시 또 아프다면 그냥... 잊어버렸으면 좋겠어요.”
민구는 느릿하게 말했다. 마주한 눈이 접히며 웃었다.
“음…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흉터 같은 연애였어. 실제로 그렇게 남기도 했고.”
봄은 낮에 바닥에 떨어뜨렸던, 손수건을 다시 매고 있었다. 봄은 두 손으로 매듭을 풀어냈다. 어깨에 닿아있던 머리카락들도 뒤로 넘겼다. 흰 목덜미에 끔찍한 흉터가 고개를 내밀었다. 길고 쭉 뻗은 모양의 흔적이었다. 칼 같은 매서운 물건으로 길쭉하게 베인듯한.
민구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 흉터를 매만졌다.
“본 적 있지?”
손에 닿은 흉터의 감촉은 미미한 굴곡을 그대로 전해왔다. 민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봄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는 얼굴이었다. 느릿하게 봄은 입을 떼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어색한 적막 속. 봄은 괜히 볼 것 없는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디자인관 건물 1층 갤러리, 지금은 아무런 작품도 전시되지 않은 새하얀 공간 속에 사람들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벽에 딱 붙어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서로의 눈치만 슬쩍 볼 뿐이었다.
어색해 죽겠네… 어떡하지. 옆에 사람한테 말 걸어봐?
그때 마침, 건물 출입 유리문을 누군가가 열고 들어왔다. 자연스레 그곳에 있던 대학 새내기들의 시선이 쏠렸다. 키가 큰 남자가 가볍게 스타일링된 머리를 넘기며 주변인들을 둘러보았다.
봄은 멍하니, 유령에게 홀린 사람처럼 그를 응시했다. 봄뿐만이 아니라 그곳에 모든 인물의 눈이 그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훤칠한 키는 물론이요. 빼어난 얼굴은 모든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하다 못해 흘러넘칠 지경이었다.
아.
두리번거리던 남자의 시선이 봄에게로 와 닿았다. 두 눈이 딱 마주친 순간 봄은 고개를 아래로 내려버렸다. 닿은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던 미미한 미소가 눈부셨다. 순간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쿵 내려앉았다.
저 사람도… 신입생인가?
모든 사람들이 시선을 한몸에 받는 남자가 그에게 걸어왔다.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그의 발소리가 천천히 느린 동작처럼 들려왔다. 딱딱한 발 밑창이 대리석타일 바닥과 맞부딪히는 소리가 눈앞에 멈추어 섰다.
“어디서 오셨어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와 다정한 말투였다. 봄은 조심스레 왼쪽으로 돌아보았다. 봄은 절대 키가 작은 편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사람과 눈을 맞추려면 고개를 내리는 게 일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 저..는 학교 주변에 살아요.”
“자취?”
“자취는 아니고. 본가가 대학로 뒤편에 있어요.”
“바로 앞에요? 우와, 어떻게 집 앞 학교로 오셨네요.”
“네…저, 그쪽은…”
“저도 이쪽 지역에서 살긴 하는데. 거의 다른 지역이에요. 끄트머리 쪽이라.”
“아, 그러시구나.”
“이름이 뭐예요?”
처음 만난 사람들이 주고받는 다분히 형식적인 대화였다. 하지만 어색하게 주고받는 대화 속 이 미묘한 두근거림은 무엇일까. 봄은 조금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냥 어색해서 짓는 미소가 분명할 텐데, 올라간 입꼬리가 무척이나 청량하게 느껴졌다.
여자들이 걸크러쉬를 느낀다고 하는 게 이런 감정인가?
“김 봄이에요.”
“봄? 외자 이름이에요?”
“네.”
“우와… 신기하다. 진짜 이름 예뻐요. 잘 어울린다.”
그의 말에 올라오는 열기를 지우려 어색하게 손으로 오른쪽 뺨을 문지르며 시선을 피했다.
“그쪽은요…?”
“저는 송영주에요. 이름이… 조금 하하, 여자 이름 같죠.”
이름이 송 영주구나.
“그쪽도 이름 잘 어울려요…”
“하하. 진짜요? 고마워요. 나이는 몇 살이에요?”
“저는 스무 살이요.”
“그렇구나… 저는 재수해서 스물한 살이긴 한데. 그냥 편하게! 존댓말 하지 마시고 친구처럼 대해주세요.”
“…! 형이시구나.”
“아잇, 참. 편하게 말해주세요.”
영주는 그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한번 툭 건드렸다.
“앗, 네…”
“편하게!”
“아, 응. 알겠어…”
때마침, 1층 계단 쪽에서 과 잠바를 입은 사람들이 내려왔다. 곧이어 그들의 대표처럼 보이는 여성이 앞으로 나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어색하게 모여있던 새내기들은 그들을 따라 학교의 강당처럼 보이는 건물로 들어갔다. 입학식이 진행되고 있던 강당 안에는 다른 과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자연스레 옆에 서게 된 영주를 힐끔거렸다. 훈훈하다 못해 반짝거리는 얼굴이었다. 솔직히 말해 자기 자신도 어디 가서 꿀리거나 그러진 않았는데, 이 사람 옆에 서니…
혼자 머릿속으로 중얼거리다, 영주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영주는 눈을 한번 크게 떴다. 그리고 곧장 귓속말하듯이 가까이 다가왔다.
“왜?”
좋은 목소리가 에이 에스엠 알처럼 귓가를 간질였다.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 봄은 흠칫 놀라며 대답했다.
“아, 그냥 잘생겨서요.”
“…”
잠시 두 남자 사이에 짤막한 적막이 흘렀다. 영주의 멍한 시선이 봄에게 향했다. 봄은 겨우 진정시켰던 뺨에 다시 열이 훅, 올라올 것 같았다.
아, 나 오늘따라 왜 이렇게 바보같냐.
“아… 고마워.”
영주는 미미한 홍조를 띄우며 말했다. 조금 어색하면서도 부끄러운 것인지 한 손으로 어색하게 턱을 만지작거렸다.
한두 번 들어봤을 이야기도 아닐 텐데, 영주는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영주를 보고 있던 봄은 간질거렸던 감각이 다시 선명하게 살아났다.

입학식이 끝난 뒤, 학생들은 다 같이 과에서 대여한 버스에 올라탔다. 입학식이 끝난 뒤 새터 행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층 건물에서부터 입학식 옆자리까지. 지금은 버스 옆자리에 영주와 함께했다. 사교성이 본래부터 좋은 것인지, 영주는 조금 수다스럽다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 많았다. 무슨 말이든지 반응도 크고 좋아서 가는 내내 봄도 그의 말에 장단을 맞추었다. 한 시간 조금 넘게 걸리는 짧지 않은 거리였지만 덕분에 심심한 겨를이 없었다.

“형! 아 좀 제대로 받치고 있어 봐! 왜 이렇게 힘이 없어! 키도 나보다 훨씬 크면서!”
봄은 자기 밑에 두 손으로 제 어깨를 붙잡고 버티고 있는 영주에게 말했다. 자신의 어깨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얼마나 떨리는지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몇 번째인지 몰랐다. 영주가 버티지 못해 무너진 부채꼴이. 총 8명이 힘을 합쳐 버텨야 깰 수 있는 게임이었는데, 맨바닥에 있는 사람이 가장 힘든 위치였다. 봄 포함 남자가 세 명뿐인 조에선 자연스럽게 봄과 영주가 가장 밑의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
영주는 뻘뻘 흘린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말했다. 이대로 가면은 도저히 게임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영주와 마찬가지로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쳤다. 봄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헉헉대는 영주를 내려다보았다.
“안 되겠다. 형이 내 위로 가. 위치 바꾸자.”
“뭐? 나 무거워서 너 못 버텨!”
“에잇! 그래도 일단 바꿔 봐! 형보다 내가 더 힘셀 거 같은데 뭘.”
영주는 영 내키지 않는 듯했으나, 불꽃처럼 일렁이는 눈빛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났다.
결과는 봄의 승리였다. 그토록 빨리 끝나기를 바랐던 게임이 끝을 맞이했다. 삼 십분 넘게 지속된 인간 부채꼴 탓에 지쳐버린 조원들은 하나같이 전부 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위기는 이것이 마지막인 줄 알았으나 계속되었다. 그 위기의 주인공은 하나같이 송 영주가 차지했다. 영주는 게임을 많이, 아니 심하게 못 하는 편이었다. 마지막엔 10명의 조 중에서 결국 꼴등을 아주 손쉽게도 낚아챌 수 있었다.
처음 보았던 완벽한 인간상이라는 이미지는 게임을 하면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와르르 맨션처럼. 무너진 자리엔 대신에 친근함이 자리 잡았다. 막상 게임을 할 때는 답답했지만, 이상하게 터지는 헛똑똑이 끼에 조원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결과는 뒤에서 1등이었지만, 분위기는 훈훈했다.

히터가 빵빵하게 틀어지는 건물 속에서 땀을 뻘뻘 흘렸다. 게임이 끝난 뒤, 여섯 시 반이 되어선 사람들은 리조트 지하에 있는 식당에 모였다.
“영주 오빠는 어디 가셨데?”
같은 조원이 돼서 친해진 현진은 앞자리에 앉아 밥을 먹는 봄에게 말했다. 봄은 식판 위에서 밥 한 숟갈을 뜨다 말고 대답했다.
“몰라…? 잠깐 화장실 간다고 하더니. 안 왔네.”
화장실 간다고 말한 뒤 한참을 오지 않았던 그였다. 조원들은 식당 앞줄에서 그를 기다리다 결국 먼저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때마침 버스에서 주고받았던 영주의 번호로 문자가 한 통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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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3-07 13:44 | 조회 : 721 목록
작가의 말
최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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